▲ 영화 <미옥>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제50회 시체스영화제에서 ‘포커스 아시아-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미옥’(이안규 감독,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배급)은 일단 타이틀롤을 맡은 김혜수에게 눈길이 간다. 2015년 ‘차이나타운’에서 ‘너의 쓸모를 증명해 봐’라며 서늘한 면모를 보인 바 있는 그녀의 또 한 번의 누아르 도전이 어떤 스타일로 다가올지 궁금한 건 사실이다.

범죄조직 JC는 회장 김재철(최무성)이 뒤에서 조종하고, 2인자 나현정(김혜수)이 실질적인 경영을 하며, 3인자 임상훈(이선균)이 부하들과 현장에서 몸으로 해결하는 형식으로 운영된다. 현정과 상훈의 노력 끝에 유망 중소기업들을 합병해 재계의 유력기업으로 우뚝 선다. 검사 최대식(이희준)은 검사장의 딸과 결혼한 뒤 출세에 가속도를 내기 위해 JC의 뒤를 캐는 중이다.

현정의 아지트는 헤어샵 라떼뜨. 여기에 검찰 경찰 재벌 등 유력인사들을 불러 모아 은밀한 회합을 갖고, 여자와 뇌물을 제공하며 뜻한 바를 이뤄왔다. 대식은 이곳의 에이스 웨이(오하늬)에게 푹 빠져있다. 열혈검사이던 그는 어느 날 밤거리에서 괴한에게 폭행을 당하는 웨이를 우연히 발견해 구해준 인연으로 사랑의 감정이 싹튼 것.

▲ 영화 <미옥> 스틸 이미지

하지만 이는 모두 현정의 계략이었다. 이미 대식의 수사망이 좁혀오는 것을 눈치챈 현정이 결정적인 덫을 놓은 것. 대식을 불러낸 현정은 몰래 촬영한 두 사람의 섹스비디오를 보여주며 수사에서 손을 뗄 것을 ‘협박’한다.

재철 현정 상훈 대식 웨이 등 5명의 남녀관계는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얽히고설킨 모양새로 흘러간다. 현정은 길거리의 ‘싸구려’였던 자신을 거둬준 재철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린다. JC의 성장기 때 인천조직이 재철의 아내와 아들을 죽이자 그 두목을 죽이고 조직을 와해시킨 뒤 ‘총대’를 메고 감옥에 갔다 왔을 정도.

상훈은 고아였다. 어릴 때부터 뒷골목에서 거칠게 자란 그가 믿을 것이라곤 주먹밖에 없었지만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현정의 밑에 들어온 뒤 사랑과 정을 알게 됐다. 처음 그의 손에 칼을 쥐여주고 살인을 하게 만든 이도, 처음 칼에 맞아 위험에 처했을 때 응급처치로 상처를 꿰매줘 미련의 상흔이 남게 만든 이도 바로 그녀였던 것.

▲ 영화 <미옥> 스틸 이미지

대식은 러프하지만 날것의 순수함이 탱글탱글한 웨이에게 자꾸 마음이 끌린다. 그러나 사실 웨이의 마음속에 자리한 사람은 상훈. 웨이는 상훈에게 애정공세를 퍼붓지만 그의 마음은 요지부동이다. 웨이는 그의 왼쪽 가슴 아래에 새겨진 ‘미옥’이란 문신을 보고 ‘미옥이 누구냐’고 묻지만 입은 열릴 줄 모른다.

현정은 이제 ‘은퇴’하려 하고, 그런 그녀를 상훈은 이해할 수 없다. 대식은 섹스비디오 위협에 굴하지 않고 의외의 반격을 개시하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활을 노리는 인천조직이 도전해온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상훈은 재철이 엉뚱한 데에는 돈을 펑펑 쓰면서 정작 자신은 물론 그의 부하들에게 소홀한 데 대해 서운한 마음이 점점 커져만 가는데.

의외의 복선이 몇 개 깔려있지만 정작 집중하는 곳은 반전이 아니라 각 인물의 감정선이다. 표면적인 첨병은 현정이지만 갈등과 매조짐의 중심을 이루는 인물은 상훈이다. 1인자가 될 수도 없고, 되고자 욕심을 부리지도 않는, 내상이 깊은 두 떠돌이 영혼이 정착하고자 하는 지점에 스포트라이트를 들이대지만 불행하게도 둘은 같은 곳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비극으로 진행한다.

▲ 영화 <미옥> 스틸 이미지

그 극적인 대비는 현정의 라떼뜨와 상훈의 ‘쉼터’이자 ‘작업장’인 개사육장으로 대표적으로 표현된다. 호텔인지 살롱인지 모를 라떼뜨는 최고급 유흥의 철옹성이다. 자본주의가 가진 장점의 이면에 도사린 천박한 탐욕이 넘쳐흐르는, 소비와 비리와 범죄의 온상이다. 버려진 소녀 웨이는 ‘최고로 만들어주겠다’는 현정의 제안에 이곳에 와 ‘최고의 창녀’가 됐다. 창녀가 최고인가?

최고도 최상도 아니지만 오갈 곳도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웨이에겐 그렇게 해서라도 허기를 면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스펙으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는 게 최적일 수도 있다. 비록 몸을 팔아서라도. 라떼뜨는 겉으론 화려하지만 현정과 웨이 같은 ‘그녀들’에겐 상훈의 개사육장과 다름없는 곳이다.

개사육장의 잔인한 투견들은 ‘그녀들’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그녀들’이 현정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듯 철장 안의 투견들은 상훈이 ‘작업’한 인육에 미친 듯이 달려들어 증거를 인멸한다. 라떼뜨와 개사육장이 다를 게 뭔가? 독이 오를 대로 오른 투견이 인육으로 허기를 채운다는 메타포는 참으로 가슴을 멍하게 만든다. ‘그녀들’ 역시 현정과 재철이 던져준 먹이에 환장해 달려드는 사냥개가 아닌가?

▲ 영화 <미옥> 스틸 이미지

영화가 가진 미덕은 각 캐릭터들이 구질구질하지 않다는 게 가장 크다. 첫 장편인 감독의 연출실력은 깊이가 살짝 떨어지는 게 옥에 티지만 비교적 군더더기가 적어 매끄럽다. 인간미가 없는, 제동장치가 풀린 폭주기관차라는 점에서 재철과 대식은 ‘이란성쌍둥이’다. 앞에선 자선사업을 하지만 뒤에선 부하들을 시켜 살인을 일삼는 재철과, 정의구현이란 법치주의에 몸을 내던지는 척하지만 출세를 위해 지위로 불법을 자행하는 대식이 다를 바가 뭔가?

현정은 ‘차이나타운’의 엄마와 묘하게 맞닿아있는 캐릭터다. 평생을 범죄로 살아온 엄마는 자신의 피가 정화될 수 없음을 알기에 파국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면 현정은 악행 끝에 ‘아직은 기회가 있다’는 헤겔의 변증법의 ‘종합’의 정화된 인성을 갖춰간다. 겉으로 보기에 상훈은 그런 현정과 정반대의 대척점에 선 폭력과 이기주의의 고집불통이다.

하지만 감독은 단순하면서도 의외로 영민하다. 사업가로 위장한 마초(재철)와 그냥 마초인 마초(상훈) 같은 흉악한 범죄자들도 가슴에 흐르는 피만큼은 따뜻하다는 걸 웅변한다. 영화의 주제는 꿈 소유 정(미련)이다. 현정이 현재가 불안한 건 뒤늦게나마 꿈을 갖게 됐기 때문이고, 상훈에게 불만스러운 건 그에게서 꿈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상훈에겐 오직 소유욕밖에 없다.

▲ 영화 <미옥> 스틸 이미지

재철은 상훈에게 충고한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억지로 가지려고 하는 게 아니라 지켜주는 것’이라고. 상훈은 매번 자신에게 사무적인 현정의 뒷모습을 보며 “돌아보는 적이 없어”라고 서운한 마음을 뇌까린다. 그가 그동안 현정과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쌓아온 정이자 그래서 도저히 그걸 끊을 수 없는 미련 때문이다.

‘킬 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미지를 짙게 풍기는 영화다. 그러나 쿠엔틴 타란티노 식의 유머감각에 대한 기대는 금물. 상업성에 집착한 액션의 화려함과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왜 인물들이 그토록 자신만의 아집에서 벗어나오지 못하는지, 그리고 밑바닥과 상류층의 과욕은 ‘거기서 거기’라는 알레고리를 설파한다.

시종일관 어둡고 흔들리는 화면은 기존의 누아르처럼 스타일리시하기보다는 디스토피아적 혼돈에 가깝다. 김혜수의 원톱 우먼누아르를 보려고 티케팅을 했다가 문을 나설 때쯤 로맨틱코미디 ‘내 아내의 모든 것’이나 ‘임금님의 사건수첩’ 같은 코미디로만 생각해온 이선균의 진한 수컷냄새에 취할 것이다. 90분. 청소년관람불가. 11월 9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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