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꾼>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이준익 감독의 조감독 출신 장창원의 연출 데뷔작 ‘꾼’(쇼박스 배급)은 영화에서 시나리오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새삼스레 깨닫게 만든다. 117분 동안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하며 내달리던 스토리는 뒤통수를 몇 번 때린 뒤 아주 시원하고 통쾌한 결말로 스트레스를 확 풀어준다. 할리우드가 안 부러운 맥거핀-케이퍼 무비다.

2008년. 사기꾼들 사이에서 전설로 통하는 밤안개(정진영)는 은퇴한 뒤 외아들 지성(현빈)과 평범하게 살고 있다. 지성은 아버지의 능력을 그대로 물려받아 소소한 사기를 치며 살아간다. 은퇴했다던 밤안개는 마지막으로 ‘딱 한 번’이라며 두칠의 위조여권을 만들어 직접 전달해주지만 다음날 자살로 위조된 시신으로 발견된다.

두칠은 수조 원의 다단계 사기극을 펼쳐 수많은 ‘개미’들을 자살로 몰고 간 희대의 사기꾼으로 거액을 들고 외국으로 도피하지만 이내 중국에서 돌연 사망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그럼에도 그가 그런 큰 범죄를 벌일 수 있었던 배경은 거액을 들여 권력자들에게 로비를 해온 데 있고, 그들의 도움으로 도피할 수 있었으며, 사망은 조작된 뉴스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돈다.

▲ 영화 <꾼> 스틸 이미지

8년 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 희수(유지태)는 한민당 대선후보의 측근인 검찰총장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며 출세가도를 달리는 중이지만 두칠을 놓친 담당검사라는 핸디캡에 번번이 발목을 잡힌다. 두칠에 대한 증언이 불거지자 후보와 총장은 그를 아예 죽이려 하지만 희수는 검거하고자 하며 ‘어르신’들과 갈등을 빚는다.

희수는 1년 전 사기꾼 석동(배성우)을 잡아넣은 인연으로 그와 그의 사기 파트너 춘자(나나) 김 과장(안세하) 등을 자신의 수사에 활용해왔다. 두뇌회전이 좋고 분장술마저 뛰어난 지성은 그동안 사기꾼을 속이는 사기꾼이라는 전대미문의 수법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희수에게 석동을 제보함으로써 석동과 원수지간이 됐다.

8년 전 지성은 아버지를 살해한 두칠을 죽이기 위해 태국에 갔지만 오히려 그의 부하들에게 붙잡혔다 간신히 살아 돌아온 뒤 제대로 된 복수를 준비 중이다. 희수는 두칠을 잡기 위해서 지성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공동작업을 제안한다. 서로의 속셈은 다르지만 목표하는 지점은 엇비슷한 다섯 명이 그렇게 한 팀을 구성한다.

▲ 영화 <꾼> 스틸 이미지

먼저 작업한 인물은 부동산 사기꾼 강석(최덕문). 그를 통해 두칠의 최측근인 승건(박성웅)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승건은 의외로 만만치 않은 인물이다. 춘자가 나서 미인계를 쓴 끝에 그의 숙소와 휴대전화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는 데 드디어 성공하는데 뜻밖에 두칠이 서울에 있고, 곧 승건과 남산에서 만난다는 정보를 얻어 두칠의 검거에 나서는데.

양파 같은 영화다. 까고 또 까도 끝이 안 보이는 복선의 연속이다. 소재와 주제는 간단하지만 플롯이 복잡한 게 웬만한 맥거핀-케이퍼의 수준을 뛰어넘는 게 강점이다. 1970년대 지구촌의 모든 관객들을 속인 ‘스팅’의 디지털화된 충격이다. 그런 장치와 효과를 위해 집중한 곳은 각 인물들이다.

어느 조연 한 명을 소홀하게 볼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인물에 집중해야 나중에 감독에게 당하지 않는다. 지성의 목표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복수의 칼끝이 최종적으로 목표로 삼는 지점이 어디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게다가 진짜 목적마저도 오리무중으로 슬그머니 잠수한다.

▲ 영화 <꾼> 스틸 이미지

석동의 속내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겉으론 어리바리해 보이지만 진면목은 안갯속을 잠행한다. 신출귀몰하던 그가 수사망에 걸려들어 결국 1년형의 실형을 살게 된 이유는 지성의 제보 때문이다. 철천지원수인 지성과 오월동주라는 일시적 연합체를 형성할 만큼 희수가 그에게 무서운 존재인지, 두칠을 잡아서 그가 얻으려는 게 뭔지 의문투성이다.

희수는 더욱더 알 수 없는 인물. 그는 대선후보가 이끄는 ‘로열패밀리’의 ‘행동대장’이다. 그 자리는 총장이 주선했지만 오래전 그는 총장을 넘어서 후보와 독대하는 도발을 저지르는가 하면 두칠과도 개인적인 거래를 터왔다. 과연 그는 두칠을 잡을 마음은 있는 것일까? 잡아서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그의 주변을 맴도는 한신일보 최 기자의 진면목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조희팔을 모티프로 출세욕에 불타는 검사와 소시민의 복수극을 뼈대로 세웠다. 이미 ‘내부자들’ ‘더 킹’ ‘검사외전’ 등을 통해 검찰에 지나치게 편중된 엄청난 공권력에 대한 반대급부의 위험에 대한 경고가 이뤄진 바 있기에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다. 그래서 검찰의 고위층은 지난 영화들이 그려온 출세주의자로 설정했지만 희수만큼은 복합적인 인물로 스펙트럼을 부여하는 걸로 차별화를 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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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범죄자들을 ‘수사관’으로 활용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중국에서 역사적으로 써먹었던 ‘이이제이’의 병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첨단의 디지털 시대에 원칙이 바로 서는 게 중요한 법치주의다. 아무리 결과가 좋아도 과정이 불온하거나 불법이 개입된다면 그건 정의라고 하기 힘든 게 현행법이다.

물론 영화다. 영화적 장치, 즉 재미를 위한, 서스펜스의 과정에 더한, 과장된 인테리어나 액세서리라고 가볍게 넘어간다면 전혀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물론 다 의도다. 그렇게 유도함으로써 다섯 주인공과 고위층이 두칠을 어떻게 처리할지, 아니면 두칠이 어떤 반격을 가할지에 집중하게 만드는 솜씨가 탁월한 감독의 필력과 연출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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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은 재미보다는 정서에 치중하는 작가다. 그에게서 배운 장 감독이 오히려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는 게 신기할 만큼 상업영화로서 최상의 팝콘 맛을 선사해준다는 게 놀랍지만 이런 멀티캐스팅에 순수 제작비를 겨우 약 40억 원밖에 안 들였다는 데서 장 감독이 이 감독의 '도제시스템' 출신이란 걸 실감하게 만든다.

군 복무 후 확실히 달라진 현빈의 연기력은 ‘공조’ 이후 상승세인데다 은근히 패션쇼까지 펼쳐 눈을 즐겁게 만든다. 유지태는 ‘올드보이’의 니힐리즘에서 탈피한 서늘한 연기를 오랜만에 펼치며 모처럼 안성맞춤의 캐릭터를 만난 모양이다. ‘메소드’로 의외의 연기 색깔을 보인 박성웅의 또 한 번의 변신도 놀랍고, 무엇보다 배성우의 진가가 빛난다. 나나는 ‘아이돌’을 벗고 배우를 입었다. 다만 안세하는 캐릭터의 정체현상이다. 15살 이상. 11월 22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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