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이성우의 세계와 우리] 국제정치에서 다자협의체의 구성은 ‘힘에 의한 질서’가 아니라 ‘규범과 협력에 의한 평화와 공존’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또는 이상주의적 가치를 실현한다는 관념에 기초해있다. 나아가서 국가의 국력이 아니라 일국일표주의라는 국제사회에서 국가들 사이의 평등주의와 이에 기초한 대등한 대표권을 인정하는 의회주의를 구현한다는 점에서 도덕적 우월성을 갖추고 있다. 다자협의체를 통한 국제질서가 가지는 이러한 장점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공동체 구성으로 그 가능성을 확인하였고 이제 동아시아에서도 그 가능성이 실질적인 실험의 단계에 들어가 있다.

아시아에서 다자협의체 구상의 태동은 역사적으로 1960년대까지 올라가지만 실질적인 논의가 시작된 것은 탈냉전 이후 동아시아에 새로운 협의체에 대한 필요성이 증가하면서이다. 동아시아에서 탈냉전 이후 지속적으로 다자협력이 추진되고 있지만 결실을 맺지 못하는 이유는 동아시아의 다자협력을 공동의 선을 위한 다자협력이 아니라 미국과 중국의 세력대결에 있어서 양국이 다자협력을 외교정책수단으로 활용하는 이른바 멤버십 게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양자관계의 중복된 협력관계를 통해서 패권을 유지하고 있는 미국은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현상변경을 위한 동아시아 다자협력체에 우호적이지 않다. 중국은 동남아국가연합(ASEAN: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을 중심으로 아시아라는 지리적 정체성에 기초한 폐쇄적 다자협력을 선호한다. 이에 반해서 미국은 아태경제협력체(APEC: 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를 중심으로 아시아와 태평양이라는 확대된 정체성을 포괄적 다자협력을 선호한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다자주의와 중국의 다자주의는 공동의 목표를 찾아가는 협력의 과정이 아니라 이익의 균형과 세력의 균형을 추구하는 외교정책의 수단에 불과하다.

미국은 동남아에서 미국의 포함과 협조를 강조하는 호주, 일본, 인도네시아를 협력 파트너로 다자주의 맴버십 게임을 추진하고 있고 중국은 미국의 배제와 견제에 중점을 두는 말레이시아와 미얀마를 파트너로 미국과 중국의 대결의 구도를 보여 왔던 측면이 있다. 미국이 배제된 형태로 추진된 동아시아정상회의(EAS: East Asia Summit)에 대하여 일본, 인도네시아, 싱가포르와 같은 미국에게 호의적인 나라들이 직접 나서서 역외국가의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지배적 역할을 견제하였다. 동아시아 국가만으로 구성된 경제협의체인 (EAEG: East Asian Economic Group)와 이러한 배타성을 조정하여 회원국의 범위를 확대한 동아시아 경제협의체(EAEC: East Asia Economic Caucus)가 대표적인 동아시아 다자협력의 경쟁구도였다.

중국은 남중국해에서 일어나는 미국의 봉쇄정책에 맞서 다자주의에 더욱 적극적인 형태로 주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한 이후 오바마 흔적 지우기의 일환으로 2017년 1월 30일 미국이 주도해왔던 환태평양경제동반자 협정(Trans-Pacific Strategic Economic Partnership: TPP) TPP에서 공식적으로 탈퇴함에 미국의 역할이 축소되고 중국은 주도적으로 역내 포괄적 경제 동반자 협정(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RCEP)을 통해 역내 국가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ASEAN 10개국에 추가하여 일본, 호주, 뉴질랜드, 인도를 포함하여 16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중국은 APEC에서 일대일로(One Road One Belt) 전략을 발표하고 이를 위한 아시아 인프라 투자 은행(Asia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 AIIB)에 서유럽국가를 포함해서 세계의 47개국이 참여하는 새로운 금융질서를 구축하여 미국 중심의 IMF의 지배구조를 개혁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최근에 나타나는 중국의 다자주의 공세는 아시아 지역의 경제질서 형성은 물론 국제 금융질서의 주도권을 확보하려고 할 뿐 아니라 국제질서 전반에 대하여 미국에 대한 주도권 경쟁을 준비하는 것으로 읽힌다. 문제는 중국의 다자주의가 회원국들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중국의 패권경쟁을 위한 회원국의 동원인지 아직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패권국으로 부상하는 과정에 미국은 세계의 질서를 담보하는 경찰이라는 공감대를 얻었기에 가능했다. 21세기에 중국이 새로운 세계질서를 형성하는 과정에 주도적 역할을 맡고 싶다면 미국의 경찰을 대신하는 수준은 충분하지 않다. 중국이 제시하는 다자주의가 회원국 사이에 회원국 공동의 이익을 위한 제도라는 공감대의 형성과 중국이 “공동이익의 보증인”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동의를 얻어야 한다.

▲ 이성우 박사

[이성우 박사]
University of North Texas
Ph. D International relations
현) 제주평화연구원 연구위원,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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