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강철비>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양우석 감독이 2013년 데뷔작 ‘변호인’으로 10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할 때만 해도 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정권에 실망한 다수 국민들의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상대적인 존경심과 그리움이 크게 한몫한 건 맞다. 그래서 양 감독은 자신이 대단한 얘기꾼이고 작가주의적 연출자란 걸 당당히 인정받으려는 듯 두 번째 작품 ‘강철비’로 엄청난 스토리와 화려한 비주얼 안에서 유머 서스펜스 스릴 액션 드라마 등의 놀라운 조화와 재미를 선사한다.

북측. 한때 최정예 요원이었으나 지금은 약물중독에 아내와 딸을 걱정하는 중년이 된 엄철우(정우성) 앞에 전 상관인 정찰총국장 리태한이 나타나 은밀한 지령을 내린다. ‘현재 공화국 내에선 새로운 세력자 김두원과 박광동을 중심으로 은밀하게 쿠데타가 진행 중이니 두 사람을 제거하라’는 것. 엄은 교묘하게 교통사고로 위장해 김두원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

남측. 현 대통령 이의성의 정치 선배 김경영이 삼수 끝에 차기 대통령에 당선된다. 의성은 정보보고를 통해 북한의 실력자가 암살당했고, 커다란 정치적 변혁이 일어날 것을 알지만 경영과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다.

엄은 박광동이 나타날 공개 기념식장을 타깃으로 근처 건물에 은신하지만 과녁에 들어오는 인물은 ‘1호’, 즉 위원장이다. 그때 갑자기 미군의 다연장 로켓포로부터 MLRS(강철비, 스틸 레인)가 발사돼 ‘1호’와 환영 인파가 모인 광장으로 쏟아진다. 쿠데타 세력이 미군의 무기를 탈취한 뒤 공격함으로써 미국이 선제공격을 했다고 북측 국민들을 속이기 위한 교란작전으로 ‘1호’를 죽이고 정권 이양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

▲ 영화 <강철비> 스틸 이미지

불행 중 다행으로 ‘1호’는 목숨이 붙어있었고, 엄은 천신만고 끝에 그를 남한으로 피신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우연히 청와대 안보수석 곽철우(곽도원)의 전처 수현(김지호)의 병원에 갔다가 곽을 만나 그의 도움을 받게 된다. 이제 남북은 물론 미국과 중국이 긴박하게 돌아간다.

북측은 선전포고를 하고, 의성은 계엄령을 선포한 뒤 핵 선제공격을 하려 하지만 경영은 이를 반대한다. 의성은 ‘1호’가 남측의 수중에 있고, 북측이 혼란에 빠진 데다 미국이 전쟁을 거드니 핵으로 북측을 무력화시킨 뒤 통일을 이룩할 절호의 기회라 주장한다. 하지만 경영은 그렇게 되면 수많은 북측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갈 텐데 그런 통일에 북측 주민들이 우리를 동포로 생각이나 하겠냐고 반박한다. 그 와중에 쿠데타 세력이 보낸 특수부대는 ‘1호’를 암살하기 위해 시시각각 엄의 목을 죄어오는데.

일단 재미있다.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했던 두 철우가 GD 햄버거 잔치국수 등을 매개로 경계의 벽을 허물고 마음을 열면서 쏠쏠한 유머가 쏟아진다. 엄은 자신의 딸이 좋아하는 지디를 아냐고 묻고, 곽은 “지디 모르면 간첩이지”라고 답했다가 엄의 얼굴을 바라보며 “너, 남파된 적 있지?”라고 묻는 식이다. 햄버거 역시 유머의 좋은 소재가 되는데 이는 한반도를 가른 절반의 책임자 미국에 대한 알레고리다.

시위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양손에 흔드는 것 따위에 대한 조소. 미국의 제국주의는 반대하지만 자본주의의 달콤한 유혹은 뿌리치기 힘들다는 현대인의 양면성. 곽이 CIA 한국지부장과 은밀히 만난 트럭의 외벽엔 ‘Delicious American Food’란 글이 선명하다. 곽은 “멀쩡한 나라 두 동강 내니까 이렇게 개고생하지”라고 뇌까린다. 미국 소련 중국을 향한 투정일까? 이데올로기를 향한 경고다.

▲ 영화 <강철비> 스틸 이미지

병원을 둘러싼 각종 논란을 경고하는 히포크라테스 정신에 대한 메타포도 있다. 엄이 ‘1호’를 데리고 처음 찾은 남측 병원이 수현 친구 숙정(박은혜)의 산부인과. 숙정은 그 위급한 상황에서 ‘1호’의 배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이게 애라면 내가 응급처치하겠지만”이라는 식으로 관객을 웃긴다. 얼굴은 안 나오지만 김정은을 암시한다. 엄이 두 번째로 찾은 병원은 수현의 성형외과다. 하지만 숙정도 수현도 전공을 떠나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1호’임을 알면서도 열과 성을 다해 치료한다. 과연 의사란 무엇인가?

곽은 “너네 두더지 잡아먹지? 통일되면 지하철 공사는 너네가 해야겠다”라며 땅굴파기 선수인 북측을 비아냥거리고, 엄은 의정부 거리의 수많은 부대찌개 식당을 보고 “너네 전쟁 준비를 이렇게 심하게 하냐"라고 놀란다. 그렇게 아옹다옹하며 우정을 쌓아가던 둘은 “나도 딸 이겨본 적 없다”라며 결국 그들도 평범한 가장이자 이념에 희생된 국민의 하나임을 깨달으면서 친구가 된다.

‘변호인’의 송우석이 처음엔 시위하는 대학생을 보고 “학생들이 공부는 안 하고 데모는 무슨”이라고 혀를 끌끌 찼다가 무고한 대학생 진우가 간첩으로 조작된 사건의 변호인을 맡으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열린다면 ‘강철비’의 두 철우는 정권의 ‘충견’이었다가 정치적 암투에 희생되면서 점차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는다는 인식론적 탄착점은 유사하다. 그들을 과거 현재 미래가 혼재된 남과 북의 표상으로 설정한 감독은 매우 영악하다.

곽은 이혼했고, 엄은 아내를 극진하게 생각한다. 곽은 나름대로 열심히 살지만 상관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주변인이자 주체가 아닌 대체다. 엄은 최고의 요원이었고 지금도 충실하게 상관의 명령에 목숨을 내던지고 있지만 사실 그는 췌장암 말기라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약물에 의존한다. 북측은 허황된 이데올로기와 우상숭배에 가까운 독재체제를 통해 잘 유지되는 듯 내부적인 착각이 추동하지만 실체는 말기 암과 다름없다는 의미다.

▲ 영화 <강철비> 스틸 이미지

그렇다고 남측은 건강할까? 수현과 이혼한 곽이 모처럼 만난 자식에게 먹이는 게 고작 햄버거다. 보수를 외치지만 제 편리함과 기득권 유지에 길들여져 있고, 진보를 주창하지만 전통의 가치관이 무너진 이 아이러니! 20세기에 일제강점기란 굴욕의 역사를 거친 뒤 ‘삼성이 소니를, 현대가 혼다를 각각 제친’ 한국이지만 여전히 일제의 잔재는 남아있고, 반민특위의 숙제 등이 해결되지 못한 현실을 웅변한다. 엄은 ‘쇠 鐵, 벗 友’, 곽은 ‘밝을 哲, 집 宇’다. 남북 국민의 이데올로기를 암시하는 절묘한 작명이다.

별 대사도 없는 북측 특수요원 최명록(조우진)의 역할이 강렬하다. 명록과 엄의 권총 대결 액션은 마치 ‘이퀄리브리엄’의 유사한 시퀀스를 연상케 할 정도로 현란하다. 조우진은 ‘내부자들’에 이어 제대로 존재감을 자랑한다. 문제는 여전히 ‘잘생김’만 돋보이는 정우성과 ‘범죄와의 전쟁’과 ‘곡성’의 연기가 완전히 굳어진 곽도원. 함께할 때는 잘 어울리지만 각각의 신으로 떨어지면 단점이 확연하게 부각되는 게 옥에 티다.

곽은 엄에게 “우린 운명인가 봐”라고 말한다. 한 민족이니 당연하다. “분단국가 국민은 분단 때문이 아니라 그걸 이용하는 자들에 고통을 받는다”와 “원래 하나였던 나라는 반드시 하나가 돼야 한다”라는 대사가 주제다. 곽이 엄에게 “살 좀 쪄라, 난 좀 빼고. 그렇게 해서 반포에서 만나 소주 한잔하자”라고 던지는 마지막 인사가 울컥하게 만든다. 통일을 위한, 가장 단순 명료하면서도 피부에 팍팍 박히는 조언이다. 연말에 정말 훌륭한 '작품' 하나 나왔다. 139분. 15살 이상. 14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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