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좀비랜드>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2016년 국내 최초의 좀비 영화 ‘부산행’이 흥행에 크게 성공함으로 인해 여전히 좀비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관객의 관심은 진행 중이라는 게 입증됐다. 이를 계기로 이전 좀비 영화들이 종종 거론되는데 거기서 빠질 수 없는 게 ‘새벽의 황당한 저주’에서 모티프를 얻은 ‘좀비랜드’(루벤 플레셔 감독, 2009)다.

좀비 바이러스의 창궐로 생존자가 거의 사라진 미국. 평소 외출도 안 하고, 친구도 없이 컴퓨터 게임에 파묻혀 살던 은둔형 청년이 한 명 있다. 그런 나약한 그가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은 타인과의 접촉을 자제하고, 자신만의 규칙을 철저하게 지켜왔기 때문.

외롭고 무서운 그는 평소 담을 쌓고 살아온 부모가 사는 동부 콜럼버스로 향하다 한 터프한 중년 남자를 만나 그의 차에 동승한다. 애완견 벅을 좀비에게 잃은 뒤 좀비 사냥꾼이 됐다는 그는 현란한 솜씨로 단숨에 수많은 좀비를 죽이는 전투능력의 소유자. 청년이 이름을 묻자 중년 남자는 “이름을 알게 되면 지나치게 친해진다”라고 거리를 둔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콜럼버스(제시 아이젠버그)와 탤러해시(우디 해럴슨)라는 목적지로 호칭을 정한다.

아몬드가 들어간 과자를 싫어하고 트윙키에 집착하는 탤러해시를 따라 대형마트에 들어간 콜럼버스는 또래의 미모의 여자 위치타(엠마 스톤)와 그 여동생 리틀록을 만난다. 그 이름들 역시 지명. 위치타는 리틀록이 감염됐다며 탤러해시에게 증세가 나타나기 전에 끝내달라고 부탁한다.

▲ 영화 <좀비랜드> 스틸 이미지

탤러해시가 총을 조준하는 순간 갑자기 위치타는 자신이 직접 하겠다고 총을 달라더니 막상 총을 건네받자 두 사람에게 총구를 겨눈다. 차와 총을 탈취하기 위한 사기였던 것. 사실 그 자매는 지금까지 미모의 젊은 여자와 어린 소녀라는 걸 이용해 사기 치며 살아왔다.

털털 걷던 두 남자는 운 좋게 무기가 가득 실린 허머를 발견해 그걸 타고 이동하다가 위치타 자매를 만나 또 사기를 당하지만 차 안에서 일시 화해한다. 위치타가 콜럼버스가 전멸됐다고 증언한 게 걔기. 오래전 사회에서 소외된 위치타 자매는 둘 이외엔 누구도 믿지 말자고 약속했다. 탤러해시처럼 콜럼버스도 부모를 잃었다.

할리우드에 도착한 그들은 최고로 호화스러운 스타의 집에서 묵자는 목적으로 빌 머레이의 집에 도착한다. 텅텅 빈 궁궐 같은 그곳에서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1984, 머레이 주연)를 보며 즐기는데 갑자기 좀비가 된 머레이가 나타난다.

좀비들이야 엑스트라이니 실명의 카메오로 출연한 머레이를 빼면 주요 등장인물은 단 4명. 폐허가 된 미국 도시와 길거리 풍경이 배경이고 중요한 오픈세트는 머레이의 집과 놀이공원뿐. 은둔해 살던 콜럼버스가 좀비들의 세상이 된 후에야 밖으로 나온 건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메타포다.

30여 가지의 자신만의 규칙을 잘 지켰기에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인데 좀비에게 가장 먼저 희생된 사람은 뚱보라는 설정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스턴트 음식에 중독되고 운동과 멀어진 현 인류에 대한 조소. 오히려 이기적인 인간 군상과의 단절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아온 콜럼버스가 생존확률이 높다는 사실이 소름 끼친다.

▲ 영화 <좀비랜드> 스틸 이미지

터프한 탤러해시는 내면이 한없이 나약한 울보. 벅은 사실 애완견이 아니라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들이었다. 화면상 아내는 등장하지 않는다. 즉 그는 외로움을 잘 타고 그리 강하지 않은 미혼부였다. 그러니 아들이 얼마나 소중했을까마는 좀비에게 희생당한 뒤 나약할 때 갈무리했던 세상을 향한 설움과 분노를 좀비 사냥에 대한 통쾌함으로 보상받고 있는 것이다.

리틀록은 언니보다 더 사기꾼 기질이 농후하다. 위치타는 가진 것이라곤 몸밖에 없었다. 세상에 내던져진 이 힘없지만 섹시하고 영악한 자매가 생존할 수 있었던 건 매력과 어린 나이를 역이용한 사기밖에 없었던 것. 그래서 그녀들은 그들 이외엔 그 누구도 믿지 말자고 약속했다. 세상에 버려진 그녀들은 세상을 믿을 수 없었고, 더 이상 사랑 따윈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머레이는 그 넓은 집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좀비분장을 하고 매일 영화처럼 연기하며 살고 있다. 그 이유를 묻는 탤러해시의 질문에 좀비들을 속이기 위한 위장이라고 답한다. 관객은 좀비와 다름없다는 뜻. 이는 할리우드 배우들에 대한 알레고리다. 톰 크루즈가 B급 스타고 머레이가 진짜 스타 중의 스타라고 환호하는 주인공들을 통홰 할리우드의 허상을 까발린다.

머레이의 집 대문에 붙어있는 ‘BM’이란 글자를 보고 탤러해시가 콜럼버스에게 “밥 말리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내용은 미국의 인종차별에 대한 조소다. 말리는 레게 장르를 전 세계에 유행시킨 자메이카의 국민적 영웅이다.

콜럼버스는 머레이의 개인 영화감상실에서 리틀록과 함께 ‘고스트 버스트즈’를 감상하며 언니가 어떤 스타일의 남자를 좋아하냐고 묻는다. ‘나쁜 남자’를 좋아한다는 대답에 갑자기 터프해진 콜럼비아는 때마침 그들을 놀리려 좀비 흉내를 내며 갑자기 들어온 머레이를 총으로 쏜다.

▲ 영화 <좀비랜드> 스틸 이미지

가슴에 구멍이 뚫린 머레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콜럼버스를 놀리라고 제안했던 자책감과 슬픔에 울던 위치타는 갑자기 웃는다. 슬프지만 웃기다는 게 이유다. 이 얼마나 아이로니컬한 일인가? 좋아하는 할리우드 스타의 죽음 앞에서의 웃음이라니! 게다가 자그마한 유머조차도 안 통하는 이 답답하도록 꽉 막힌 세상!

코미디 전문 배우인 머레이는 이렇게 죽어가면서까지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다. 일부 건방진 스타와 달리 장인정신으로 살다 간 진정한 예술가에 대한 레퀴엠이다. 영화는 코믹 패러디라고 알려졌지만 정확하게 블랙코미디를 지향한다. 자매가 믿었던 좀비 없는 마지막 파라다이스라고 소문난 놀이공원은 알고 보니 조명을 켜자 부나방처럼 좀비들이 모여드는 좀비 인구밀도 최고의 지역.

놀이공원이 어린이들의 순수한 동심을 악용한 돈벌이에 눈이 먼 자본주의 부나방들이 들끓는 곳이란 메타포는 참으로 간담이 서늘해진다. 미국 영화답게 정서적 메시지의 마무리는 역시 가족이다. 유일한 생존자이지만 친해지는 게 싫어(사실은 두려워) 이름 밝히길 거부할 만큼 가장 못 믿었던 4명이 가족이 되는 과정은 억지스럽지 않아 훈훈하다.

콜럼버스가 탤러해시로부터 배운 새 교훈이 ‘작은 것을 즐겨라’. 욕심을 버리고 소소한 일상에서 즐거움과 행복과 만족을 찾자는 일이다. 탤러해시가 트윙키를 좋아하는 건 어른이랍시고 폼 잡지 말고 본능대로 소박하게 소통하자는 의미다. 어깨에 힘줘봐야 일시적으로 사회가 준 지위 혹은 세월이 쌓아준 나이다. 죽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살았을 때 즐기자.

우리나라는 ‘흡혈형사 나도열’과 ‘부산행’이 유일한 뱀파이어와 좀비 영화였다. 중국엔 이미 1980년 ‘귀타귀’를 기점으로 중국판 좀비인 강시 영화가 일대 붐을 조성한 바 있다. ‘좀비랜드’는 썩 괜찮은 레퍼런스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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