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다운사이징>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행동주의 철학자 제레미 리프킨은 저서 ‘육식의 종말’을 통해 거대 축산업이 야기한 환경파괴 및 육식을 즐기는 인류의 현대병 등을 통해 한마디로 ‘소고기 좀 그만 먹어’라고 경고한다. 영화 ‘다운사이징’(알렉산더 페인 감독)은 전혀 다른 주제와 소재를 다루지만 결국 키워드는 환경오염으로 인한 인류의 위기다.

인구의 증가와 과학의 발달로 지구촌에 먹구름이 드리운다. 이에 노르웨이의 요르겐 박사는 사람의 크기를 2744분의 1로 축소시키는 기술을 성공시켜 스스로 다운사이징을 한 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모기와 새의 공격이 없는 천혜의 장소에 소인국을 건설한다.

다운사이징을 하면 성인남녀 36명이 배출하는 연간 쓰레기가 고작 비닐봉지 한 개. 가장 매력적인 건 1억 원이 소인국에서 무려 120억 원의 값어치를 한다는 것. 세계 각국이 이 놀라운 신기술을 속속 받아들이는 가운데 미국에 레저랜드라는 초호화판 소인국이 건설된다.

물리치료사 폴(맷 데이먼)은 사랑하는 아내 오드리(크리스틴 위그)와 나름대로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내는 경제적으로 불만족스럽다. 폴은 그런 오드리를 위해 더 큰 집으로 이사하기 위해 대출상담을 하지만 기존 대출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답을 듣고 크게 낙담한다.

▲ 영화 <다운사이징> 스틸 이미지

이 부부는 그들의 전 재산인 1억 수천만 원이 레저랜드에선 150억 원의 값어치를 한다는 말에 이끌려 지긋지긋한 서민생활을 마감하기로 결정하고 다운사이징 회사와 계약을 맺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수술대에 오르고 무사히 소인이 된 폴은 레저랜드의 직원에게 오드리의 행방을 묻는다.

그때 그에게 걸려온 전화기 너머의 오드리는 울먹이며 "미안하다"라고 말한다. 가족 친지 등과 헤어질 것을 비롯해 장점만큼 단점이 공존하는 다운사이징이 두려워 수술을 포기한 것. 다운사이징 수술을 받으면 원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덩그러니 레저랜드의 초호화 주택에 홀로 남겨진 그는 주택을 처분한 뒤 아파트로 들어가고 오드리와 이혼을 한다. 1년 뒤. 외로운 그는 한 미혼모와 만나고 있다. 그날도 그녀와 둘이서 조용히 저녁을 먹는데 위층에서 소음이 들려온다. 이웃 두샨(크리스토프 왈츠)이 파티를 열고 있는 것. 미혼모와 헤어지는 과정에서 자괴감을 느낀 폴은 두샨의 파티장으로 가 만취한 채 오랜만에 해방감을 맛본다.

다음날 아침. 베트남 이민자 녹 란(홍차우)과 그녀의 청소용역업체 직원들이 어수선한 두샨의 집을 청소하기 위해 방문한다. 그런데 녹 란의 걸음걸이가 왠지 어색하다. 전문가인 폴은 그녀가 의족을 하고 있고, 그 상태가 안 좋아 곧 골반 및 허리 등에 커다란 이상이 올 것을 직감해 그녀의 숙소로 동행한다.

▲ 영화 <다운사이징> 스틸 이미지

그런데 수상한 경계선을 넘어 도착한 곳은 폴이 사는 곳과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세계 각국의 반체제 인사 등이 강제로 다운사이징을 당한 뒤 쫓겨나 사는 난민촌. 녹 란은 청소를 해주고 부자들의 음식과 각종 생필품 등을 얻어와 이들에게 나눠주는 인도주의 운동에 매진하고 있었다. 폴은 녹 란과 놀라운 두 세계, 그리고 최초의 소인국인 노르웨이의 ‘호빗 마을’을 통해 생존의 방식을 놓고 갈등하기 시작하는데.

뤽 베송이 인류의 조상인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아파렌시스 루시에서 영감을 얻은 ‘루시’를 통해 인간종의 능력의 한계치를 무한대로 봤다면 페인은 호모 사피엔스의 오만이 멸종을 초래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다운사이징’은 자본주의를 비꼬는 자본주의 영화고, ‘노아의 방주’를 비트는 ‘요르겐의 방주’다.

레저랜드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지만 극소수만 이루는 미국인 혹은 그 미국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다. 큰돈과 이를 통한 부유한 생활은 당장 눈앞의 욕심은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게 행복과 가까운지 절대 보장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앞 다퉈 추구하는 편리함은 결코 인류의 미래에 파란불은 아니라고 매섭게 비판한다.

▲ 영화 <다운사이징> 스틸 이미지

이곳은 5번가와 할렘이 공존하는 뉴욕이 모델이고 더 나아가 미국의 현실에 다름없다. 이 밖에도 곳곳에 메타포가 가득 차있다. 한 서민이 소인들이 소득세를 안 낸다고 불평하는 건 특혜 계층에 대한 조소다. 노르웨이의 소인국은 ‘반지의 제왕’의 ‘호빗 마을’을 연상케 하는가 하면 에덴동산의 알레고리 같기도 하다. 그들의 주술적인 파티는 ‘집시의 시간’이 오버랩 된다.

노르웨이의 자연경관에 감탄하는 “자연은 인내심 가득한 조각가”라는 대사가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폴과 녹 란의 관계는 베트남 내전에 참전했다 망신만 당한 미국에 대한 조롱이다. 동굴 속 신세계를 건설하러 떠나는 무리가 마지막으로 석양을 바라보는 건 멸종과 새 종의 시작을 의미한다. 루시에서 호모 사피엔스로 넘어가는. 그래서 “언어는 안 중요해”라고 말한다.

기존 인류의 세상, 레저랜드, ‘호빗 마을’ 등 몇 종류의 세계 중 어느 게 정답이고 어느 게 정상인지는 감독도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바로 ‘호빗 마을’의 나비다. ‘장자’의 ‘제물론’의 호접몽(꿈이 현실인지, 현실이 꿈인지)을 유럽과 미국은 불교나 중국 철학만큼이나 신비롭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폴의 결론은 과연? 재미를 보장하는 녹 란 역의 홍차우는 신의 한 수다. 135분. 15살 이상. 11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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