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배트맨 비긴즈>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요즘은 슈퍼히어로 무비의 전성시대다. 올해에도 ‘어벤져스: 인피니트 워’ ‘아쿠아맨’ ‘블랙 팬서’ ‘엑스맨: 뉴 뮤턴트’ ‘엑스맨: 다크 피닉스’ ‘데드풀2’ ‘앤트맨과 와스프’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등이 개봉될 예정이다. 다수의 슈퍼히어로 무비들은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돈으로 만들었음에도 나름대로 철학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블록버스터와 구분된다.

스튜디오가 만든 영웅의 시작을 크리스토퍼 리브 주연의 ‘슈퍼맨’(1978)이라고 본다면 철학적 블록버스터 전성기의 효시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비긴즈’(2005)라고 정의해도 무방할 것이다. 20세기폭스의 ‘엑스맨’ 시리즈가 일찌감치 2000년부터 시작됐지만 철학적 무게는 ‘로건’만큼 강하지 않았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그래서 ‘배트맨 비긴즈’를 ‘왓치맨’이나 ‘어벤져스’ 등의 철학적 슈퍼히어로 무비의 전성기의 발판으로 평가하는 분위기다. 슈퍼히어로 무비 사상 가장 예술적이고 철학적인 트릴로지로 평가받는 ‘다크나이트’ 시리즈의 오프닝인 이 영화는 거창하게 칼 구스타프 융의 ‘원형이론’을 저변에 깔고 펼쳐진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대저택에 사는 어린 브루스 웨인은 여자 친구 레이첼과 놀다 발견한 엄청나게 오래된 화살촉의 소유권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지만 ‘주운 사람이 임자’라는 레이첼의 이론에 순응한다. 그는 너른 웨인가의 땅을 돌아다니다 용도폐기된 우물에 빠져 박쥐로부터 엄청난 공포를 경험한다.

▲ 영화 <배트맨 비긴즈> 스틸 이미지

부모와 뮤지컬을 감상하던 그는 무대 위의 배우들의 분장에서 박쥐가 떠오르자 호흡곤란을 호소해 부모와 함께 공연 도중에 극장을 나온다. 그런데 때마침 그 앞을 지나던 강도 칠에게 부모가 살해당한다. 칠은 고든 형사(개리 올드먼)에게 검거된다.

브루스(크리스천 베일)가 성인이 된 후의 고담시는 마피아 두목 팔코니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정치인 언론사 검찰 경찰 등이 죄다 팔코니의 ‘장학금’에 매수돼있어 그는 마약장사 등의 불법으로 돈을 긁어모으는 중이다. 칠은 의식 있는 검찰에 의해 팔코니와 한 방에 수감된 경력이 있고, 이때 보고 들은 범죄의 증거를 증언함으로써 가석방될 기회를 잡았다.

그 재판 때 브루스는 권총을 숨겨 참여하지만 그가 쏘기도 전에 팔코니의 부하가 먼저 칠을 쏴 죽인다. 분노에 찬 브루스는 팔코니를 찾아가지만 그의 부하들에게 제압당한 뒤 망신만 당한다. 모멸감에 빠진 그는 부모에 대한 죄의식과 칠에 대한 분노만 더 커져간다.

▲ 영화 <배트맨 비긴즈> 스틸 이미지

아버지는 명예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지만 그는 자신의 의지도 부모의 가르침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실천한 게 없다. 자괴감에 빠진 그는 세상을 떠돌며 범죄자들과 어울리다 중국 공안에 검거돼 수감된다. 그날도 감옥 내의 헤게모니를 쥐려는 ‘덩치’들과 어울려 싸운 뒤 독방에 수감된 그에게 듀카드(리암 니슨)가 나타나 “내일 풀려날 테니 ‘파란 꽃’을 갖고 티베트 ‘어둠의 사도’의 본부로 오라"라고 말한다.

신비한 인물 라스 알굴이 이끄는 ‘어둠의 사도’는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정의구현 비밀결사단체다. 이들은 동양의 신비의 무술을 통해 습득한 절정의 전투와 생존의 능력을 이용해 법으로 처단하지 못하는 전 세계의 악의 무리들을 제거하는 신성한 임무를 수행해왔다.

드디어 모든 무술을 전수받은 브루스에게 알굴과 듀카드가 마을의 범죄자 한 명을 죽임으로써 ‘졸업장’을 받으라는 투로 명령한다. 그러나 ‘어둠의 사도’의 폭력적이고 편파적인 세계관에 반발한 브루스는 폭탄을 터뜨림으로써 그들의 본거지를 와해시킨다. 이 과정에서 듀카드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브루스는 사력을 다해 구해 마을사람들에게 맡긴 뒤 고담시로 되돌아간다.

그가 없는 사이 웨인컴퍼니는 얼 이사가 장악했다. 고담시는 여전히 팔코니가 휘어잡고 있었고, 그의 브레인 역할을 하는 크레인 박사(킬리언 머피)가 실질적인 실력자로 급부상한 상황. 브루스는 예전의 그 우물에 들어갔다가 거대한 지하공간을 발견하고 거기에 상황실을 꾸민다.

▲ 영화 <배트맨 비긴즈> 스틸 이미지

그의 도우미는 얼 이사의 농간에 의해 한직으로 밀려난 과학자 폭스 이사(모건 프리먼). 폭스는 예전에 만든 각종 첨단 장비와 더불어 그 기술을 밑바탕으로 새로 제작한 각종 무기 및 배트맨 복장 등을 브루스에게 제공한다. 브루스는 낮에는 회사 정상화에 힘써 얼을 쫓아내고 폭스를 대표이사 자리에 앉히는 데 성공하고 밤에는 팔코니 일당을 일망타진하고 팔코니도 고든 형사에게 넘긴다. 그런데 크레인 박사가 실질적인 어둠의 수괴였고, 그를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은 놀랍게도 듀카드라는 가명을 써온 사실상의 알굴이었다.

알굴은 ‘파란 꽃’에서 추출한 강력한 마약성분을 시의 수도관에 흘린 뒤 이를 기화시켜 시민 전체를 절멸시킴으로써 타락한 고담시를 정화시키겠다는 자기만의 망상에 빠져 이를 행동에 옮기려 하고, 배트맨은 크레인 박사의 마약에 된통 당한 뒤 폭스에게 해독제 생산을 부탁하고 고든과 공조체제를 꾸리는데.

“범죄자는 사회의 이해심 때문에 증가한다”라는 대사는 중의적이자 반어적인 표현이다. 그만큼 죄에 대해 법이 추상같아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지만 반대로 더 큰 사회악이 수많은 빈민을 양산함으로써 그들을 칠처럼 좀도둑이 되고 또 강도로 변하게끔 내몬다는 양면성을 증명하기도 한다.

“분노로 슬픔을 억누르면 과거는 고통”이라는 스승 듀카드, 아니 알굴의 가르침은 두려움 분노 죄의식 등 자책감에 시달리는 브루스는 물론 모든 사람들에 대한 교훈이다. 그래서 나중에 그는 우물 밑으로 떨어진 이유가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라는 것을 깨닫고 이번엔 자의에 의해 우물에 뛰어들고 거기서 ‘그림자의 보금자리’를 발견함으로써 앞으로 자신이 살아가야 할 정체성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 영화 <배트맨 비긴즈> 스틸 이미지

브루스의 정체가 배트맨인 걸 알게 된 레이첼(케이티 홈즈)은 브루스의 민낯을 만지며 “이 모습이 내가 아는 브루스가 아니라 가면을 쓴 모습이 진짜 그가 됐다”라며 정체성에 갈등하는 브루스 혹은 배트맨의 인격을 규정해준다. 그들을 잇는 대사는 “나를 나타내는 건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다. 이것 역시 정체성과 직결되는 말이다.

융의 심리학의 중심개념은 집단무의식이고, 이의 여러 가지 내용인 출생, 재생, 죽음, 신화, 영웅, 권력, 마법, 신, 악마, 거인, 난쟁이, 자연계의 모든 대상, 페르소나(개성), 아니마(남성 속의 여성적 요소), 아니무스, 그림자, 자기 등은 태고유형, 즉 원형이다.

융은 인간은 선행인류부터 인류의 조상으로 이어져 내려온 이런 이미지를 현생인류가 선천적으로 물려받았기에 이미 잠재적으로 보유한 채 태어난다고 봤다. 유전에 관한 라마르크의 획득형질 이론을 받아들여 인간의 무의식을 진화의 관점에서 설명한 것. 그렇다면 크레인 박사의 이론은 어느 정도 맞는다. 알굴의 세계관 역시 그런 관점에선 설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브루스가 선택하는 건 아이로니컬하게도 “두려움을 이겨내는 건-곧 승리하는 건-숨는 게 아니라 안 보이는 법”이라는 알굴의 가르침이다. 그는 브루스로 있든 배트맨으로 활동하든 자신을 숨기거나 꾸민다. '전우'인 고든 앞에 갑자기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진다. 그와 가장 가까운 집사 알프레드와 폭스조차 헷갈릴 정도다.

▲ 영화 <배트맨 비긴즈> 스틸 이미지

융은 그림자를 모든 태고유형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잠재적인 동물적 본성의 근원으로, 페르소나를 사회에 대한 순응의 가면으로으로 각각 봤다. 브루스의 페르소나가 고담시의 최고 갑부인 웨인 가문의 상속자로서의 화려하고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청년이라면 그의 그림자인 배트맨은 강력한 영웅인 동시에 브루스에 내재된 동물성(폭력성)의 발현이다.

브루스는 융이 집단무의식의 대립개념으로 본 개인무의식의 특징인 콤플렉스가 강한 인물이다. ‘다크나이트’ 트릴로지의 2편의 주인공은 사실상 조커다. 조커는 배트맨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넌 절대 나를 못 죽여”라고 호언장담한다. 그렇다. 놀란은 조커를 배트맨의 그림자로 그린다. 두려움이라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배트맨과 두려움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는 조커는 동전의 양면이다.

사족: 검사가 된 레이첼은 브루스의 정체를 안 뒤 그에게 ‘내 첫사랑 브루스는 이제 없다’라는 뉘앙스의 말을 한 뒤 화살촉을 선물로 준다. 이 오래된 화살촉은 융의 집단무의식이 얘기하는 유전자다. 크레인 박사가 자신의 범죄를 집단무의식으로 합리화한다면 레이첼은 화살촉으로써 브루스의 정체성의 혼란을 바로잡으려 하는 것이다. 성악설과 성선설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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