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신과 함께’ ‘1987’ ‘코코’ ‘메이즈 러너: 데스 큐어’ 등을 제치고 ‘그것만이 내 세상’(최성현 감독)이 흥행 1위를 질주 중이다. 이런 내용의 언급들이 포털사이트를 비롯한 인터넷 공간을 주름잡는데 사실 별로 대단한 ‘사건’은 아니다.

드라마는 회를 거듭할수록 순위가 바뀔 수도 있지만 영화는 대부분 개봉 순서에 따라 후발주자가 선발주자를 밀어내기 마련이다. ‘신과 함께’도 ‘1987’도 이제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기에 ‘그것만이 내 세상’이 장강의 물결처럼 자연스레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그것만이 내 세상’의 평일 하루 10만 명 안팎의 스코어는 앞선 1위에 비해 덜 폭발적이다. ‘1987’이 700만 명을 넘긴 것에 비교해 그 정도 최종 성적을 내기 쉽지 않을 듯하다. ‘염력’(1월 31일)과 ‘조선명탐정: 흡혈괴마의 비밀’(2월 8일)도 고비지만 ‘골든 슬럼버’ ‘흥부’ ‘블랙 팬서’ 등이 개봉되는 2월 14일은 마지노선이다.

그럼에도 별로 대단할 것 같지 않은 가족 드라마로 경쟁이 치열한 1월 극장가에서 선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건 이병헌 박정민 윤여정의 주연 트리오와 김성령 한지민 최리의 조연 트리오의 뛰어난 연기력과 조화, 그리고 음악이라는 또 다른 주인공 덕이다.

▲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 스틸 이미지

불치병으로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인숙은 애지중지 키워온 서번트 증후군의 20대 아들 진태의 앞날을 걱정하던 중 헤어진 지 20여 년 된 첫아들 조하를 만나자 데려와 그의 보호를 맡긴다. 인숙은 과거 알코올중독으로 폭행을 일삼는 남편을 견디지 못해 중학생 조하를 버린 채 가출해 자살을 시도했다. 그때 구해준 남자와 결혼해 진태를 낳은 것.

인숙은 모든 게 부족하지만 피아노 실력만큼은 수준급인 진태에게 피아니스트로서의 길을 열어주는 게 꿈이다. 40살의 조하는 아버지의 폭행과 어머니의 배신이란 트라우마를 안고 산다. 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눠주거나 격투기 스파링 상대로 일하며 주거지도 없이 만화방을 전전했다.

인숙은 이부형제가 친형제처럼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살기를 바라지만 엄마와 세상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조하는 고분고분하지 않다. 그러던 조하가 엄마의 미처 말하지 못했던 진실과 시한부 생명을 알고 마음을 연다는, 그리고 재벌가 외동딸이자 스타 피아니스트였지만 조하와는 다르면서도 유사한 상처를 안고 은둔생활을 하는 진태의 우상 가율의 도움으로 진태가 우뚝 선다는 얘기다.

별로 대단하거나 새로울 게 없는 이 클리셰 신파조의 시나리오를 매우 특별하게 만드는 건 일단 이병헌이다. 시나리오에 반해 투자까지 했다는 ‘싱글라이더’의 선택이 패착이란 결과를 보였기 때문에 할리우드 스타로 성장한 그가 이런 소품을 선택한 데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한 건 사실이다.

▲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 스틸 이미지

하지만 감독이 만든 조하의 캐릭터와 이에 확실한 생명력을 불어넣은 그의 능력의 결과물은 그런 우려를 말끔히 씻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는 영화계에 안착할 수 있었던 ‘공동경비구역 JSA’(2000) 이후 지금까지 죄다 멋있거나 악하더라도 강렬한 역만 맡아왔다.

조하는 이제까지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가장 이병헌답지 않은 캐릭터다. ‘내부자들’의 안상구보다 더 무식하고 지질하다. 권투를 제일 잘한다고 착각하지만 현재의 그는 노쇠한 전직 복서 겸 노숙자에 다름없는 만화방 붙박이다. 그 나이 되도록 제대로 한 것도, 해놓은 것도 없다.

이렇게 마치 이웃의 실존 인물처럼 조하를 실사화한 이병헌의 명연기는 만약 박정민이 아니었다면, 다른 유명 배우가 맡았더라도 그만큼의 연기력과 캐릭터 소화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면, 그만큼 피아노를 잘 치지 못했다면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을 만큼 그의 캐스팅은 신이 찍은 방점이었다.

윤여정이야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니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고, 호스트바 마담 역의 김성령은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감한 임팩트를 남겼으며, 그녀의 여고생 딸 역의 최리는 경력이 일천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김태리의 탄생을 엿보게 만들 만큼 차진 연기를 펼쳤다.

우리나라 곳곳엔 아직도 권력형 비리가 잔존해있다. 일본과 러시아로 각각 귀화한 아키야마 요시히로(추성훈)와 빅토르 안(안현수)의 사례부터 최근 대한빙상연맹 파동이 그렇다. 가율은 그런 권력형 커넥션의 비리에 희생된 암시를 준다. 많은 걸 가졌지만 정작 중요한 자존감을 잃은, 이 영화에서 가장 어두운 역할을 더 가라앉은 분위기로 그려낸 한지민의 특별출연도 돋보였다.

▲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 스틸 이미지

진태와 조하는 성리학의 심성론 혹은 이기론이다. 진태가 이(理)와 정신이라면 조하는 기(氣)와 육체다. 성리학을 완성한 주자는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에서 벗어나 인간은 본래 선하긴 하지만 타고난 기질에 따라 악하게 변하기도 한다고 주장했다.

이부형제가 처음에 보이는 갈등은 관념론(혹은 합리론)과 경험론(혹은 유물론)의 대립이다. 마냥 착하기만 한 진태는 예술성까지 뛰어나다. 조하는 약하고 선하게 태어났지만 사회에서 낙오된 아버지의 알코올 의존에 의한 폭력적 성향을 자신도 비슷한 처지에서 물려받게 된다.

그래서 권투에서 소질을 보이고, 이를 통해 마음속 응어리를 풀려 하지만 기성의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고 분노조절에 장애를 일으킴으로써 제도권에서 퇴출된다. 통속적이다 못해 천박했던 조하는 결국 진태의 세계를 받아들임으로써 헤겔의 '즉자대자'(대립의 통일)를 완성한다.

이병헌이 47살(지난해)의 나이에 브레이크 댄스로 영화의 흥행에 가속도를 붙였다면 박정민은 영화를 위해 배웠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피아노 실력으로 감동의 진동에 큰 힘을 보탰다. 한마디로 그는 왜 영화가 그토록 음악과 음향에 심혈을 기울이는지 보여줬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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