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흥부>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흥부: 글로 세상을 바꾼 자’(조근현 감독)는 촛불 집회로 부패 정권을 교체한 이 시대의 필독서일 듯하다. 이 씨 조선시대 작자미상의 고전소설 ‘흥부전’에서 착안했는데 빈부격차의 세태를 꼬집고 권선징악의 통쾌한 결말을 내리는 원작의 골자를 따르면서도 원작을 뛰어넘는 철학과 메시지를 담았다.

양반들의 권력 다툼 탓에 백성들의 삶이 날로 피폐해져가던 헌종(정해인) 14년(1848). 홍경래의 난 이후 도처에서 민란이 발발하고, 세도가들은 혼란을 틈타 어머니 순원황후의 수렴청정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왕을 쥐락펴락하는 가운데 민란군은 물론 양민까지 무차별 학살하던 혼란의 시대다.

15년 전 그 학살에 부모를 여의고 생이별을 한 형 놀부(진구)와 재회하는 게 숙원인 흥부(정우)는 음란소설로 먹고사는 베스트셀러 인기 작가다. 그는 자신처럼 고아인 선출(천우희)을 제자로 거둬 함께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친구 김삿갓(정상훈)이 놀부의 소재를 알 만한 사람이 있다는 희소식을 가져온다.

그 주인공인 조혁(김주혁)은 병조판서 김응집(김원해)과 정쟁 중인 형조판서 조항리(정진영)의 친동생이지만 형과 적대관계다. 돈과 권세에 눈이 먼 항리에게 겉으론 고아들을 거둬 먹여 살리고 공부를 가르쳐준다지만 뒤에선 민란군에게 경제적 지원자와 정신적 지주로서 큰 힘을 보태는 혁이 눈엣가시인 것.

세간엔 백성이 바라는 진인(도의 체득자)이 나타나 혁명으로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내용의 ‘정감록’이란 괴서가 나돌고 있다. 조정은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이를 빌미로 항리와 응집의 대결은 더욱 치열해진다.

▲ 영화 <흥부> 스틸 이미지

흥부는 백성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글을 쓰라는 혁의 충고에 그들 형제에게서 영감을 받아 ‘흥부전’을 펴낸다. 이를 소재로 판소리와 마당놀이 등 다양한 콘텐츠가 양산될 정도로 팔도를 뒤흔든다. 그 능력을 인정한 항리는 흥부에게 ‘정감록 외전’을 써달라며 거금을 제안하는데.

최근 한국영화 중 쉽지 않다는 기준으로 서열 5위 안에 무조건 들 작품이다. 희극으로 시작해 서스펜스물로 가다 비극이 되더니 장엄한 대하드라마로 변한다. 이 영화를 감상할 땐 정신무장을 단단히 하고, 집중력을 최대한 높여야 골계미 비장미 숭고미 우아미를 차례로 잡을 수 있다.

흥부는 풍기를 문란하게 한 죄로 포도청에 잡혀가 곤장 100대에 벌금까지 때려 맞고 풀려나온다. 그래도 그의 모토는 ‘문방사우’다. 선비의 벗인 ‘종이 붓 벼루 먹’이 아니다. ‘여자 술 풍악 상상력’이다. 음란소설 작가답다.

‘흥부전’의 탄생 과정도 재미있다. 혁이 노비 모녀를 구하려다 형수에게 밥주걱으로 뺨을 맞은 뒤 다른 쪽도 때려달라거나, 며칠 뒤 그 소녀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을 나는 제비를 바라보며 희망을 품는 장면 등에서 흥부가 소재를 얻었다는 설정 등이다.

흥부와 선출의 말장난도 꽤 의미심장하다. 진인의 존재에 대해 토론하던 중 흥부가 “지도자가 마구간 같은 데서 나오냐”라고 하자 선출은 “서양에 진짜 그런 사례가 있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시퀀스 등이다.

▲ 영화 <흥부> 스틸 이미지

원수인 혁과 항리, 더할 수 없는 형제애의 놀부와 흥부의 완전히 다른 형제를 통해 웅변하는 가족애가 외형적 주제다. 형제임에도 원수가 될 수도 있지만 결국 물보다 진한 게 피라고 하면서도 남남인 흥부와 선출의 목숨마저 아끼지 않는 우정과 의리를 보여주는 뫼비우스의 띠(구분도 끝도 없는) 같은 가족애, 인본주의, 조건 없는 인간적인 도리와 정이다.

다음은 꿈이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꿈꾸는 사람이 모이면 세상이 달라진다”라는 혁과 흥부의 대사는 민심의 꿈이 있어야 국민의 희망이 이뤄질 수 있다는, 절묘하게 현시점과 맞닿은 메시지를 던진다. 선출이 애지중지하는 흥부의 선물인 바람개비와 홍경래가 혁에게, 혁이 다시 흥부에게 남긴 빨간 띠는 그 연장선이다.

바람개비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바람이란 동력이 있어야 아름답게 자전한다. 백성이 자존감에 의거한 생생한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근거는 꿈이란 원심력에 있다.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어야 역동적으로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간다. 빨간 띠는 곧 혁명의 행동이다.

빨간 띠에는 ‘백성의 목숨과 임금의 목숨은 다를 게 없다’고 씌어있다. 존재론이다. 헌종은 내관에게 “내 꼴이 우습지요?”라고 자조하고, 흥부는 “땅이 하늘이 되는 세상”을 외친다. 헌종은 현존하는 존재자이지만 왕으로선 허수아비와 다름없는 비존재자다.

▲ 영화 <흥부> 스틸 이미지

사람이란 존재자로 태어난 민초들은 그러나 인권을 빼앗긴 비존재자다. 이렇게 그들이 존재론적 회의와 절망에 빠져있을 때 혁은 홍경래를 이어 이데아를 꿈꾸고, 그 바통을 놀부와 흥부가 이어받는다. 결국 이러한 존재의 사변에 의한 존재의 시현은 수많은 백성들의 횃불집회로 이어진다.

김주혁과 천우희는 얼굴살을 쪽 빼 당시 헐벗고 굶주리며 인권을 유린당하던 민초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가운데 가슴을 저리게 만들 만한 연기를 펼쳤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정우의 거듭된 오열 연기다. 삐딱한 이미지만 보였던 정우가 이런 깊고 짙은 감정 연기를 분출하는 대배우로 성장했다는 걸 확인할 기회.

시나리오가 워낙 탄탄해선지 감독이 가능한 한 테크닉을 자제하려는 노력을 보인 기색이 역력하다. 극장 문을 나설 땐 시원한 막걸리 한 잔이 절실할 가슴 절절한 작품이다. 쇠 젓가락을 구부리면 곡해가, 곧게 펴면 이해가 되는 게 ‘장발장의 빵’이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인권과 가장 기초적인 욕망인 식욕에 대한 대서사시다. 105분. 12살. 2월 14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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