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블랙 팬서>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MCU에 새롭게 합류한 ‘블랙 팬서’(라이언 쿠글러 감독)는 흑인 감독에 의한 흑인 배우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까만’ 영화다. 그래서 아예 대놓고 인류의 기원이 아프리카라는 고고학을 강조함으로써 흑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부각한다.

아프리카 미지의 나라 와칸다는 최빈국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최강의 금속 비브라늄의 유일한 생산지로서 국민들은 외부와 단절된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세워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1992년 티차카 왕은 세계 각국에 워독이란 스파이를 심어놓고 비밀 지령을 내린다.

그의 동생 은조부 왕자는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워독으로 암약하던 중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에 분노해 임무를 저버린 채 백인에 대한 무력 저항운동 중이다. 이에 티차카가 나타나 죄를 따지고, 그 과정에서 오랜 레지스탕스 동지였던 바두가 티차카의 스파이였음이 드러난다.

현재. 아버지 티차카의 죽음으로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된 티찰라(채드윅 보스만)는 귀국해 전 부족을 모아 즉위식을 준비한다. 만약 부족장이나 왕족 중 도전하는 이가 있을 경우 블랙 팬서로서의 능력을 제거하는 특별한 약물을 마시고 응해야 하는 게 오랜 전통.

▲ 영화 <블랙 팬서> 스틸 이미지

티찰라를 지지하는 모든 부족과 달리 자바리 부족장 맨 에이프(윈스턴 듀크)가 도전을 선언한다. 대결의 끝은 항복 아니면 죽음. 티찰라가 맨의 목을 졸라 제압하며 항복을 권유하지만 맨은 명예를 지키겠다는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 생존을 선택한다.

왕좌에 오른 티찰라의 첫 임무는 30년 전 와칸다에 침입해 현재 국경 보안 책임자이자 자신의 죽마고우인 와카비(다니엘 칼루야)의 아버지를 죽이고 달아난 불법 무기상 클로(앤디 서키스)를 잡아 와카비의 한을 풀어주는 것. 와카비는 티차카가 클로를 잡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불만을 품고 있다.

클로가 대영박물관에서 탈취한 비브라늄을 대한민국 부산에서 밀거래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티찰라는 여동생인 과학자 슈리(레티티아 라이트)로부터 최첨단 블랙 팬서 슈트를 받고, 옛 연인인 스파이 나키아(루피타 뇽), 왕 호위대장인 최정예 전사 오코예(다나이 구리라)를 대동해 현지로 출동한다.

부산의 한 비밀 카지노에 들어간 티찰라는 친분이 있는 CIA 요원 로스(마틴 프리먼)를 만난다. 서로 힘을 합쳐 클로를 잡지만 그의 심복 킬몽거(마이클 B. 조던)의 습격에 무기력하게 빼앗긴다. 이 과정에서 로스가 나키아를 구하기 위해 대신 총을 맞아 목숨이 경각에 달한다.

▲ 영화 <블랙 팬서> 스틸 이미지

티찰라는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하게 금지하는 전통을 어기고 로스를 와칸다로 데려와 슈리의 첨단 과학으로 쉽게 완치한다. 한편 킬몽거는 클로를 죽인 뒤 그 시체를 갖고 와카비를 찾아온다. 빈손으로 온 티찰라에 실망했던 와카비는 킬몽거와 함께 티찰라를 몰아내기로 모의하는데.

서키스의 악역 연기는 명불허전이다. 2명 빼곤 전부 흑인인 주역들의 놀라운 피지컬 액션도 숨을 멎게 한다. 신화 속 엘도라도는 아메리카가 아니라 아프리카였다는 자부심도 보기 좋다. 하지만 MCU의 전작들이 줬던 아기자기한 재미와 폭발적인 유머, 그리고 진중한 철학은 찾기 쉽지 않다.

해외 평론가들은 ‘햄릿’과 ‘라이언 킹’을 언급하며 찬사를 늘어놓는다는데 한국과 정서가 많이 다른 듯하다. 아버지의 복수라는 키워드는 시대적으로 뒤떨어진다. 혈연관계에 대한 집착이 남다른 한국에서도 그런 소재는 사라진 지 꽤 됐다. 다만 ‘검은 햄릿’의 플롯과 여성의 역할 설정은 매우 미래지향적이다.

시리즈 중 가장 무겁고도 어둡다. ‘데드풀’의 B급 정서와 화장실 유머도, ‘앤트맨’의 따뜻한 가족애도, ‘닥터 스트레인지’의 동양적 신비와 마술의 판타지가 만든 초현실적 비주얼도, ‘어벤져스’의 철학적 고뇌도 읽히지 않는다. 다른 시리즈가 과학과 우주적 스케일을 토대로 철학을 완성한다면 ‘블랙 팬서’엔 흑표범 부족의 토테미즘만 돋보일 따름이다.

▲ 영화 <블랙 팬서> 스틸 이미지

가장 큰 허점은 주인공들의 고뇌. 티차카는 와칸다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피붙이의 희생도 감수하고, 은조부는 흑인의 인권을 찾겠다며 무장봉기한다. 양측 모두 타협이 아닌 극단적 선택이다. 블랙 팬서(흑표당)는 1965년 출범한 급진 폭력 흑인 인권운동단체다. 티차카나 티찰라가 아니라 은조부와 킬몽거가 블랙 팬서다.

결국 티찰라가 양극의 이념을 봉합할 해법을 찾긴 하지만 진부하다. 그럼에도 ‘스타워즈’를 연상케 하는 와칸다 번화가의 이국적인 비주얼과 켄드릭 라마, 시저, 제이 락 등이 참여한 힙합과 아프리카 토속음악과의 크로스오버는 눈과 귀를 호강하게 만든다. ‘화이트 워싱’ 논란으로 점철된 할리우드에서 이런 영화가 나왔다는 점 하나만큼은 높이 살 만하다.

슈리와 킬몽거의 캐릭터와 해당 배우들의 매력도 볼거리. 특히 슈리가 공주임에도 불구하고 선진국을 앞서는 과학적 지식과 능력을 지녔다는 설정은 매우 반갑다. 친근한 자갈치시장과 찬란한 광안대교의 밤 풍경, 그리고 뇽의 어눌한 한국어는 한국 관객을 위한 보너스다. 135분. 12살 이상. 2월 14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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