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제공=bob스타컴퍼니

[미디어파인=유진모의 이슈&피플] 젊은 여자들에게 김정훈이라고 하면 드라마 ‘궁’의 이율 역으로 진한 여운을 남긴 UN 출신의 ‘꽃미남’이 연상되겠지만 나이 지긋한 ‘어머니’들은 이모 나이쯤 되는 아내를 위해 어른 못지않은 남자다움을 보여 수많은 ‘이모’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영화 ‘꼬마 신랑’(1970)의 타이틀롤을 맡은 배우를 떠올릴 것이다.

그 김정훈(57)이 20여 년의 공백을 깨고 돌아왔다. 그는 한국연예매니지먼트협회 손성민 회장이 이끄는 bob스타컴퍼니와 전속계약을 맺고 2월 22일 TV조선 ‘인생 다큐-마이 웨이’ 출연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방송활동을 선언했다.

4살 때 친척의 소개로 영화 ‘이 세상 끝까지’에 데뷔, 의외로 뛰어난 연기 신동의 자질을 펼친 그는 1968년 ‘미워도 다시 한 번’으로 전 국민의 눈물, 콧물을 다 쥐어짠 뒤 ‘꼬마 신랑’으로 아역 배우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전 국민적 사랑을 독차지하며 대한민국 영화의 전성시대를 함께 달렸다.

하지만 1970년대 이승현과 함께 ‘고교 얄개’ 시리즈 등으로 청춘영화 시대를 열곤 슬그머니 사라져 대중에게 잊혔다. 당시 ‘집으로’의 유승호가 비교가 안 될 만큼의 유일무이한 아역 대스타로 우뚝 섰던 그는 왜 갑자기 연예계를 떠났고, 그동안 뭘 했으며, 왜 이제야 되돌아온 것일까?

“국민학교(당시) 4학년 때 어린 나이지만 ‘과연 이게 진정한 내 삶인가?’라는 철학적 고민에 빠졌어요. 저는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거든요. 친구들은 그 하루 전에 설레서 잠을 못 이룰 정도지만 전 촬영장에서 밤샐 생각에 스트레스가 밀려와 잠을 못 잤죠. 얼마 후 대만 영화계에서 절 불렀는데 가보니 정말 좋았어요. 그래서 그대로 눌러앉은 거죠.”

-행복했나요?

“당시 한 작품만 찍자고 해서 갔는데 6개월 동안 8개나 찍었어요. 외국영화를 찍어서가 아니라 자유로워서 행복했습니다. 한국에선 길거리를 지나가면 해코지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악수를 청한다거나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어도 될 텐데 툭 치거나 심지어 때리고 도망가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때 매니저나 보디가드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대만에선 아무도 제게 간섭하거나 귀찮게 하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자유란 게 뭔지도 몰랐던 시절이지만 숨통이 확 틔는 게 정말 사는 게 사는 것 같더라고요. 중학교 때 홍콩 쇼브라더스 영화사의 감독 겸 배우인 양모로 모시는 분에게 ‘무조건 벗어나게 해달라’고 부탁했죠. 어디서 벗어나야 할지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는 몰랐어요. 그냥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한국 영화계에서 달아나는 게 목표였어요. 말하기 창피하지만 1년에 영화를 80편 찍을 때도 있었는데 그래서 평생 찍은 영화가 무려 400여 편입니다. 예전에 인터뷰에서 그게 부끄러워 150편이라고 거짓말을 했을 정도니까요.”

▲ 사진 제공=bob스타컴퍼니

-그때 루머가 많았는데?

“예, 별의별 소문이 나돌았죠. 납치됐다는 것부터 심지어 죽었다는 얘기까지 나왔을 정도죠. 제가 대만에 가면서 모든 연락을 다 끊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평범한 생활이 절실했던 겁니다. 대만에서 그냥 학생으로서 사니 비로소 행복이 뭔지 알 것 같더라고요.”

-현재 미얀마에 사는데?

“계속 외국 생활을 하면서 서울 은평구 부모님 댁에도 가끔 들르고 하다가 디자인으로 파리 유학까지 다녀온 아내를 만나 1996년 한국에서 결혼했어요. 다음 해에 아들을, 그로부터 2년 뒤엔 딸을 각각 얻었죠. 이제 가장이잖아요. 그래서 당시 사회적 이슈이던 새집증후군 설루션 사업을 벌였는데 쫄딱 망했어요. 지금 머리숱이 없는 게 그때 빠진 겁니다. 하지만 아내는 저를 믿고 용기를 북돋워주더라고요. ‘혈기왕성한 젊음이 죄지만 그 젊음의 혈기를 바탕으로 오기로 도전하면 언젠가 되지 않겠냐’라고요. 그래서 미얀마에서 새로운 사업을 펼쳤는데 운이 좋은지 아내의 위로가 결정적인 힘이 됐는지 안정적으로 잘 흘러가더라고요. 게다가 제가 전성기 때 갑자기 사라진 이유에 걸맞게 상대적으로 문명의 혜택이 적고 느리며 조용한 그곳 생활이 체질에 맞더라고요.”

-그런데 왜 늦은 나이에 컴백을 결심했는지?

“연예인 중에 가장 친한 분이 (이)덕화 형이에요. 앞선 사업 실패로 심근경색까지 와서 사경을 헤맬 때 물심양면으로 가장 큰 도움을 준 지인도 그고요. 사실상 그때 형이 절 살려주셨죠. 최근 자주 귀국하면서 형과 어울렸는데 형이 슬쩍 제 허파에 바람을 불어넣는 거예요. 이제 애들도 다 컸고(대학생), 경제적으로도 안정을 찾았는데 살아온 날보다 적은 살 날을 어떻게 살 것이냐고 묻는 거예요. 제가 왜 연기에 대한 아쉬움이 없었겠어요. 단지 어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높은 자리에 오르는 바람에 어린아이로서 당연히 누리고 거쳐야 할 성장의 추억과 단절됐다는 게 견디기 힘들었을 뿐이죠. 그래서 형의 유혹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가기로 했답니다, 하하하. 마침 손 대표랑 인연을 맺게 되고 여러모로 앞뒤가 착착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어요.”

-아내의 반대는 없었는지?

“아내가 참으로 고마운 건 제가 뭘 한다고 했을 때 단 한 번도 반대를 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누가 봐도 절세 미녀인 아내가 저와 결혼해준 것만 해도 고마울 따름인데 실패한 사업까지도 그냥 순리대로 받아들이고 그다음에 뭘 하겠다고 해도 절대 딴죽을 걸지 않으니 전 정말 복을 타고난 남자인가 봐요. 어릴 때나 귀여운 꼬마 신랑이었지 30대 중반의 저는 그냥 평범한 ‘아재’였을 뿐인데. 이번 일도 그냥 ‘쿨’하게 ‘아빠가 좋을 대로 하세요’였어요. 게다가 장인과 장모 역시 정말 제게 잘해주세요. 그래서 뒤늦게 컴백하겠다는 만용을 부리는지도 모르겠지만.”

▲ 사진 제공=bob스타컴퍼니

-자식이 배우를 하겠다고 나서면?

“지금은 모두 성인이니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야죠. 그런데 저는 도움을 줄 처지가 안 되지만 주려고 나서지도 않을 겁니다. 만약 어릴 때 그랬다면 원천봉쇄했을 겁니다. 제가 아역배우로서 정상에 서 봤고 그래서 모든 걸 포기하려 했기 때문에 잘 압니다. 지금 어린 나이에 연예인이 되겠다고 하거나, 그렇게 시키겠다는 부모가 저에게 자문을 구한다면 무조건 반대입니다. 아역 스타일 때의 저는 아이가 아니었어요. 처음엔 촬영장에 가는 게 정말 행복했습니다. 집에선 그냥 아이 취급을 받았지만 촬영장에선 왕자 대접을 받았으니까요. 눈치가 100단이고, 잔머리가 200단이었어요. 어른 머리 꼭대기에 앉았었으니까요. 아이는 아이답게 순수하고 맑아야 순탄하게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게 아닐까요? 연기는 더욱 문제죠. 아무리 아역배우가 연기를 잘 한다고 해도 과연 그게 장인정신과 예술혼을 담은 진정한 연기일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직접 겪어본 적도, 간접적으로 경험담을 들어본 적도 없는 내용의 대본을 습관처럼 외워 감독이 하라는 대로 흉내만 내는 건 대중에 대한 ‘눈 가리고 아웅’이라고 봅니다. 자기야 참 잘 한다고 착각하겠지만 요즘 대중은 다 압니다.”

-요즘 눈여겨보는 후배는?

“MBC에서 ‘하얀 거탑’을 재방송하잖아요. 김명민의 연기는 정말 대단하더군요. 그 디테일한 표현력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입니다. 또 tvN ‘비밀의 숲’의 유재명도 때가 되면 손에 꼽을 만한 연기파로 인정받을 듯합니다. 유재명은 20년 넘게 연극 무대에 섰다죠? 제가 가진 핸디캡이 바로 연극입니다. 요즘 연극과 드라마(혹은 영화)를 넘나드는 배우들이 많은데 그들을 보면 정말 저도 절로 고개가 숙연해질 정도입니다.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드라마를 참 많이 보는 것 같습니다.

“전성기 때 모든 게 관성처럼 습관화되는 게 참으로 싫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영화를 안 보는 거부감만 키웠는데 언제부턴가 본능이 스멀스멀 밖으로 기어 나오더라고요. 나이를 먹으면 피가 혼탁해지긴 하지만 본질이 변하진 않는가 봐요. 영화나 드라마를 관객 입장에서 봐야 하는데 자꾸 업계의 시각으로 분석하게 되더라고요. 성공하면 왜 성공했는지, 실패하면 왜 그랬는지 자꾸 원인을 따지고, 현상을 해체해보는 버릇이 나타나더군요. 제가 굳이 떠났던 곳을 다시 찾게 된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는 듯해요. 무의식의 인식론화라고나 할까요? 어릴 땐 ‘모던 타임즈’의 찰리 채플린 같았어요. 온종일 공장에서 나사못을 조이는 단순한 반복 작업을 하다 보니 눈에 보이는 모든 걸 조여야 직성이 풀리는 강박관념에 빠져 급기야 정신 병원에 실려 가는 찰리 같은 맥락이죠. 간단히 말하자면 이제야 연기가 뭔지 조금 알 것 같고, 연기에 대한 참된 열정이 저절로 생겨난 것이죠. 관성화가 위험하고 강박관념이 무섭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고요.”

▲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 스틸 이미지

-향후 계획은?

“일단 미얀마에 들어가 제가 오래 자리를 비워도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사업체를 잘 정비해놓고 다시 귀국해야죠. 제 컴백 기사가 살짝 나갔는데도 인터넷 보급이 원활하지 않은 미얀마에서 벌써 난리예요. 우리나라 연예계에서도 작품 섭외가 슬슬 들어오고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예전의 ‘꼬마 신랑’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이제 중장년의 신인 김정훈이 새롭게 도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를 불러주는 곳이 있다면 영화든 드라마든 예능이든, 그리고 어느 플랫폼이든 달려갈 작정입니다. 뭐든지 배우는 자세로 성실하게 하겠다는 약속과 함께요. 저는 한때 연예인이었고, 한때는 평범한 시청자였습니다. 그래서 연예인이 한동안 쉬다 컴백하면 일부 대중이 ‘쟤, 돈 떨어졌나 봐’라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도 압니다. ‘그동안 연기가 그리웠습니다’라는 천편일률적인 동냥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늦게나마 연기가 뭔지 알 것 같아서, 그래서 이젠 대중에게 냉정하게 평가받고 싶은, 그럼으로써 나중에 많이 늙었을 때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편한 마음을 갖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