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쓰리 빌보드>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쓰리 빌보드’(마틴 맥도나 감독)는 ‘킬러들의 도시’보다 한층 더 심오한 철학으로 중무장한 감독의 수준이 코엔 형제에 근접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를 알아챈 골든 글로브가 4개 부문 상을, 영국 아카데미가 5개 부문 상을 각각 줬고, 곧 열릴 미국 아카데미가 6개 부문에 후보로 올렸다.

미주리주 작은 시골 에빙. 이혼 후 남매를 키우며 살던 중장년의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맨드)는 수개월 전 딸 앤젤라를 강간한 뒤 살해한 범인을 경찰이 잡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고 분노해 집 앞 국도변에 설치된 세 개의 광고판에 경찰서장 윌러비(우디 해럴슨)를 저격한 도발적인 글을 게재한다.

퇴근하던 다혈질 경찰 딕슨(샘 록웰)은 이 광고판을 보고 기겁해 윌러비에게 전화를 건다. 마침 부활절을 맞아 아리따운 아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어린 두 딸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던 윌러비는 순간 화가 나 욕을 한 뒤 두 딸에게 사과를 한다. 홀로 마구간에 선 윌러비는 지난한 ‘전쟁’을 예감한다.

곧이곧대로 살아온 윌러비는 그동안 쌓은 좋은 평판이 훼손될까 두려워 밀드레드를 찾아가 광고를 내려달라고 설득하지만 씨알도 안 먹힌다. 최후의 카드로 자신이 췌장암에 걸려 곧 죽을 것임을 고백하지만 그녀는 막무가내다. 그러자 충성심이 강한 딕슨이 그녀의 직장동료 페넬로페를 잡아들인다.

밀드레드의 발걸음도 순탄치 않다. 마을 여론이 그녀에게 좋지 않게 흘러가 고교생 아들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가 하면 19살 여자와 사는 전 남편 찰리까지 찾아와 불편함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던 중 광고판에 방화로 추정되는 불이 붙고, 밀드레드의 분노는 하늘 끝으로 치솟는데.

▲ 영화 <쓰리 빌보드> 스틸 이미지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연상케 하는 걸작이 나왔다. 윌러비는 ‘노인을~’의 살인마 시거를 쫓는 보안관 벨이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말투로 봐 그의 과거는 그리 순탄치 않았다. 하지만 나름대로 성공했고, 젊고 아름다운 아내와 두 딸이란 장밋빛 미래가 있어 하루하루가 행복하다.

그런데 암이라니! 화나서 주삿바늘을 거칠게 잡아 뽑는 그의 모습에서 벨의 아버지에 대한 꿈이 겹쳐진다. 벨의 꿈은 물질(돈)에 연연하지 말고 정신수양에 정진해 해탈의 경지를 향하는 게 바람직한 삶이란 의미다. 임무 수행 중 각혈을 할 정도로 삶이 경각에 달한 윌러비는 명예욕에 집착한다.

얼마 뒤 죽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을. 벨 역시 결국 시거를 잡지 못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벨이나 윌러비지만 결국 그런 ‘노인’(경험이 많아 판단력이 뛰어나고 심성마저 착하거나 정의로운)은 이 험한 세상과 잘 안 어울린다. 앤젤라를 죽인 범인은 어디선가 잘 먹고 잘 살 텐데 윌러비는 곧 죽는다니!

딕슨은 시거와 연결된다. 그는 법보다 주먹이 앞선다. 인종차별은 물론이고 장애인에 대한 혐오감까지 편견과 아집으로 똘똘 뭉친 어긋난 인격의 소유자다. 그에겐 흑인이나 히스패닉을 때리고 고문하는 게 업무고, 경찰서에서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도넛을 먹는 게 일상이다. 심지어 백인도 때린다.

▲ 영화 <쓰리 빌보드> 스틸 이미지

하지만 알고 보면 그 역시 상처받은 인물. 홀어머니의 충고가 곧 법인 마마보이다. 밤 12시까지 집에 가야 되는 이유도 어머니 때문. 시거가 돈 자체에 집착하지 않고, 남에게 기대지 않으며, 운명을 믿지 않고 오직 자신과 자신에게 닥치는 우연을 믿는 것처럼 딕슨에겐 어머니의 돌발과 즉흥이 가치관이다.

딕슨의 신념은 잘못됐지만 그게 향하는 지점이 자신만의 질서를 통한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인식의 관점에선 그는 적어도 자신이 옳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동시에 흔드는 노인들이 세뇌에 의한 착각을 신념이라 굳게 믿는 환상에 빠져있듯.

무식할 정도로 우직하고, 무모할 정도로 승부욕이 강한 밀드레드는 ‘노인을~’에서 돈에 집착하는 모스다. 그녀는 차를 빌려달라는 앤젤라의 부탁을 무시했다. 앤젤라가 구사하는 거친 언행은 밀드레드에게 배운 것. 앤젤라는 “밤길을 걷다 강간당할 것”이라고 엄마의 가슴에 못을 박고 나갔는데 진짜 밀드레드의 가슴에 아예 큰 구멍이 뚫렸다.

광고판으로 윌러비와 그 가족에게 큰 불행을 안긴 뒤에도 그녀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 어긋난 집착이자, 비뚤어진 자존심이다. 모든 사람은 완벽할 수 없고, 금과옥조라 믿었던 가치관조차도 남에게 민폐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녀가 광고판을 철수해달라고 설득하러 온 신부에게 “옷 맞춰 입지, 아지트 있지, 갱단과 똑같지 않냐? 죄가 없어도 죄가 있는 조직에 있으면 죄인”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

▲ 영화 <쓰리 빌보드> 스틸 이미지

그녀는 분명히 피해자다. 그런데 다수가 광고판을 반대함으로써 그녀를 가해한 것처럼 그녀 역시 무의식 속의 의식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한 피해자에게 똑같은 상처를 입힌다. 분노의 표출 탓에 궁지에 몰린 그녀를 도운 난쟁이 제임스와 마지못해 저녁식사를 하다 결국 그의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것.

유색인종, 늙은 이혼녀, 노인, 장애인, 빈자, 소수성애자 등은 이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이다. 사회와 국가는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배려하는 척하지만 결국 구조적 흐름은 부자와 지식층과 지도층 위주로 흘러간다. 다른 건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이라는. 여기에 정의와 질서와 도덕과 신은 없다는 메타포가 웃기고, 메시지가 ‘웃프’다.

‘노인을~’이 배경음악을 자제함으로써 메마르고 참혹한 세상의 건조함을 최대한 부각했다면 ‘쓰리 빌보드’는 컨트리음악을 필두로 한 다양한 배경음악으로 복잡하고 다양한 인간 군상의 천차만별하고 천변만화하는 심리와 세상의 구석구석을 표현하려 노력했다. 3개의 광고판은 증오(분노), 갈등(어긋난 신념과 오해로 인한 분쟁), 협업(상호 이해를 통한 화해)이라는 인간 심리와 그 발전단계를 의미하는 듯하다.

맥도맨드와 해럴슨은 두말할 것도 없이 명불허전이고, 특히 ‘아이언맨 2’에서 인상 깊은 악역을 펼친 록웰의 성격파 연기가 제대로 불을 뿜는다. 웨스 앤더슨의 유머의 성인 버전과 코엔 형제의 블랙코미디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니! 115분. 15살 이상. 3월 15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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