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마블의 블록버스터 ‘블랙 팬서’가 한차례 흥행 광풍을 몰아치고 지나간 극장가에서 한국영화 ‘궁합’이 선두를 내달리는 가운데 그 바로 뒤에서 ‘리틀 포레스트’(임순례 감독)가 조용히 100만 관객을 향해 잰걸음을 옮기고 있다. 순수제작비 15억 원이니 손익분기점 돌파는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건 흥행 성적이 아니라 업계와 관객을 두루 아우르는 찬사다. 원작 만화를 출판한 일본 고단샤조차 극찬할 정도고 해외 수출이 줄을 잇고 있다. 관람한 관객은 마니아를 자처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뭐가 그토록 이 영화에 열광하게끔 만들까?

원작이 자급자족하는 요리와 음식에 초점을 맞췄다면 임 감독은 그걸 어느 정도 따르면서도 한국의 현실은 물론 일본, 더 나아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전 세계인이 가졌을 고민과 행복에 주목하고, 한국 자연의 사계를 또 다른 주인공으로 배치함으로써 차별화를 꾀했다.

임 감독은 2번째 장편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마니아들의 본격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 영화의 주제 역시 ‘행복하니?’였다. ‘리틀 포레스트’가 집중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은 ‘왜 사느냐?’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할까?’라는 존재론적 물음표다.

평범한 사람의 일생.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죽어라 공부하고 입학한 뒤엔 대기업 등 안정된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 더 죽어라 노력한다. 취업한 뒤엔 진급하기 위해 더 많이 죽어라 일하고 상사에게 아부한다. 어느 정도 안정되면 공식처럼 결혼을 하고, 진급하면 자식도 낳는다.

▲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틸 이미지

이제부턴 자식 교육을 위해 영혼마저도 낡은 서랍 한 귀퉁이에 처박아둔 채 기계처럼 일한다. 그러다가 자식이 독립하고 자신은 은퇴하면 비로소 과거를 반추하고 후회하며 외로움을 느끼면서 서러워 남몰래 눈물을 흘린다. 배우자는 몸이나 마음 중 최소한 하나는 떠난 상태.

‘리틀 포레스트’는 이 일생에서 3분의 1, 혹은 4분의 1쯤 온 사회 초년생 3명의 당면한 문제의 해법인 동시에 5분의 3쯤 산 엄마의 자아 찾기다. 혜원(김태리) 은숙(진기주) 재하(류준열)는 시골 초등학교 동창생이다. 은숙은 전문대학을 졸업한 뒤 마을 농협에서 근무한다.

재하는 지방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에 성공했으나 곧 때려치운 뒤 아버지의 농사를 물려받았다. 서울의 4년제 대학을 졸업한 혜원은 임용고시에 떨어지자 텅 빈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오래전 세상을 떴고, 엄마(문소리)는 혜원의 여고 졸업을 앞두고 편지 한 장 남긴 채 훌쩍 떠났다.

혜원이 귀향한 이유는 일단 생활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녹록지 않은 월세만으로도 벅차다. 일 자체가 힘들 뿐만 아니라 당연히 비전이 없다. 게다가 남자친구는 합격했다. 자존심이 상한다. 가장 중요한 건 미래가 안 보인다는 것. 그래서 작전상 후퇴.

은숙과 재하는 예전과 다름없이 혜원에게 살갑다. 살면서 처음으로 며칠만 무장을 해제한 채 휴식을 취하면서 재충전을 하고,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려 했던 혜원은 1년을 보낸다. 은숙에게서 임용고시에 합격한 뒤의 자신을, 재하에게서 그런 ‘남이 설계’한 인생에서 탈출한 가까운 미래의 자신을 본 것.

▲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틸 이미지

시나리오는 그리 거창하거나, 무척 새롭거나, 아주 충격적이지 않다. 누구나 다 알고 있을 얘기, 낯익은 풍광 등이다. 그런데 신선하다. 그렇게 살고 싶지만 현재 갖고 있는 걸 놓기 싫고, 더 갖고 싶은 게 많으며, 그 욕심을 하루아침에 내려놓을 용기가 없거나 그게 용기가 아니라 항복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 주인공의 현실은 막막하다. 아버지 덕에 재하는 비교적 안정적인 경제활동을 하는 것 같지만 농사가 쉬운 게 아니다. 꽤 큰돈이 될 듯했던 사과농사는 폭풍우에 작살났다. 은숙은 부장과 앙숙이라 출근길이 지옥행이다. 잦은 회식 땐 억지로 탬버린을 흔들고 춤을 추느라 매번 고문을 당하는 것 같다.

혜원은 최악이다. 아직도 엄마가 왜 어린 자신을 홀로 놔두고 갑자기 집을 나갔는지 알 수 없다. 무작정의 칩거 생활은 당연히 불안하다. 그런데 살고자 고모의 밭일을 돕고, 자신도 작물을 직접 키워 그걸로 요리를 해 먹다 보니 서서히 엄마의 가르침을 깨닫게 된다.

‘혜원이 힘들 때마다 이곳의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한다면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엄마는 믿어’라는 편지글이 이해가 된다.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아서” 직장을 때려치웠다며 “그렇게 바쁘게 산다고 문제가 해결이 돼?”라고 충고하던 재하에 비친 ‘나’를 찾는다.

발신자가 엄마로 추정되는 편지 수령을 거부하자 “이 편지를 읽을지 말지는 네 자유지만 나는 이 편지를 배달해야 된다. 우편배달부의 숙명 같은 거지”라며 편지를 던지고 떠난 배달부의 철학을 배운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작은 숲을 찾아봐야겠다”라며 어릴 때 엄마와 거닐던 숲의 향기를 맡는다.

▲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틸 이미지

요즘 지상파 방송이든 케이블 TV든 ‘자연인’을 취재하는 다큐멘터리부터 식당 혹은 요리 프로그램이 예능처럼 동시에 유행 중인 이유가 여기에 담겨있다. 양측은 극단의 대척점이다. ‘자연인’은 귀찮고 힘들며 많이 부족할지 몰라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건강해진다.

후자는 무조건 편리하다. 그렇게 즐길 정도면 사회적으로 성공했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다. 하지만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이고, 밖에서 사 먹는 음식이 편하고 남들에게 그럴듯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건강에 그리 긍정적이진 않을 것이다.

플라톤 이전에도 철학은 존재했다. 먹고사는 게 어느 정도 해결되자 인류는 존재의 이유와 행복의 조건을 놓고 어떻게 사는 게 인간답게 혹은 제대로 사는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디서 온 누구이고, 왜 왔으며, 어디로 가야 올바로 가는 것일까?’에 대한 사유와 고뇌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행복이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치열하게 싸웠던 건 행복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저마다 달랐기 때문이고, 자본주의가 헤게모니를 쥔 건 돈이 주는 편리함 때문일 것이다.

성공한 공동체 마을 덴마크 스반홀름 정도는 아닐지라도 자급자족과 내 것 네 것 없는 나눠먹기로 공동체와 다름없는 삶을 사는 세 주인공의 삶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성선설에 대한 믿음을 준다. 그걸 굳게 믿고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 장 자크 루소의 위대함에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들기도 한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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