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영웅본색4>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중국으로의 반환을 11년 앞둔 1986년 홍콩의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우위썬(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은 그야말로 홍콩 누아르의 핵심이었다. 저우룬파(주윤발)의 성냥을 입에 문 트렌치코트 스타일은 남성의 상징, 장궈룽(장국영)이 부른 주제곡 ‘동닌칭(당년정)’은 낭만의 주제곡으로 성지에 안치됐다.

당시 하이틴으로서 열혈 팬이었던 딩성(정성)은 청룽(성룡)에게 발탁돼 감독의 길에 접어든 후 드디어 ‘영웅본색4’로 원작과 감독, 그리고 자신 같은 열성분자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한다. ‘한번 형제는 영원한 형제’라는 의리를 중요시하는 남자들의 세계는 시대가 변했어도 영원하다는 ‘응답하라, 1980년대여’를 외친다.

카이(왕카이-왕개)와 차오(마티안유-마천우) 형제는 홀아버지 밑에서 각별한 우애를 나눴지만 범죄자와 경찰이라는 각기 다른 길로 성장했다. 보스인 하 사장 밑에서 마약 밀매를 하는 카이는 일본 한복판에 뛰어들어 야쿠자 거물 오카무라와 한판 승부를 벌인 끝에 독점 밀매 계약을 따내 큰돈을 번다.

그에겐 10년 전 만나 상하관계를 떠나 친형제와 다름없는 우정을 나누는 고아 출신 심복 마크(왕다루-왕대륙)가 있다. 마크는 카이의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하고 신뢰한다. 오랜 일본 출장을 마치고 귀국한 카이는 차오를 만난다. 아버지는 현재 심한 치매로 치료를 받고 있다.

하 사장 조직에는 그의 수양아들 창과 또 다른 심복 고무줄이 있다. 하 사장은 후계자인 창에게 카이로부터 많은 걸 배우라고 당부한다. 그런데 자꾸 카이와 충돌하는 고무줄은 제어하기가 만만치 않다. 그러던 어느 날 하 사장은 마지막이라며 카이에게 일본 손님들과 은밀한 거래를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차오는 마약전담반에 배치돼 하 사장의 마약 거래를 조사하는 중이다. 정보를 입수해 동료와 함께 어느 유흥업소에 위장근무 중이던 그는 웬 괴한들의 총격을 목격하고 마약사범임을 직감해 그들의 뒤를 쫓는다. 창과 함께 도망가던 카이는 어둠 속에서 그를 알아보지 못한 차오가 쏜 총에 맞은 뒤 쓰러진다.

▲ 영화 <영웅본색4> 스틸 이미지

차오는 드디어 몸통을 잡았다는 성취감을 느낄 겨를도 없이 카이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하늘이 무너질 듯한 고통을 느낀다. 카이는 3년 형을 선고받아 투옥되고 귀가한 차오는 아버지에게 칼을 휘두르는 괴한과 한바탕 혈투를 벌여 제압하지만 이미 칼을 맞은 아버지는 끝내 숨을 거둔다.

이 모든 게 카이 탓이라고 생각한 차오는 그에 대한 원망을 더욱 키워간다. 마크는 카이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가 고무줄을 죽이는 과정에서 오카무라의 총에 다리 하나가 불구가 된다. 3년 뒤 출소한 카이는 아버지 영정에 인사하고 싶다고 집을 찾아오지만 “여길 떠나”라는 차오의 냉대만 받는다.

카이는 항구 건달들 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마크를 찾아간다. 마크는 다시 힘을 합쳐 예전처럼 돈을 벌자고 뛸 듯이 기뻐하지만 카이는 새 삶을 살겠다며 합법적이고 안정적인 일을 하자고 제안한다. 실망한 마크가 반발하지만 카이의 결심은 굳다. 그는 항구에서 구매한 싱싱한 생선을 식당에 공급한다.

하지만 건달들이 사사건건 방해를 하는 데다 3년 동안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한 창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설상가상으로 창과의 만남이 재범이라고 오해한 차오마저 카이 주변을 맴돌며 감시한다. 차오의 수사망이 턱밑까지 왔다는 걸 깨달은 하 사장은 카이에게 차오가 수사에서 손을 떼게 만들지 않으면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는데.

▲ 영화 <영웅본색4> 스틸 이미지

음악이 5할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운드의 향연이 다채롭고 웅장하게 펼쳐진다. 피아노로 시작해 스트링, 나일론 기타, 하모니카, 단조의 일렉트릭 기타 등이 어우러져 러닝타임 내내 허무하거나 염세적인 분위기를 조장한다. 심지어 장중한 코러스와 강렬한 헤비메탈 콤비네이션에 고전 엔카까지 동원된다.

원작처럼 마크와 그 역을 맡은 왕이 가장 강력한 임팩트와 매력을 발휘한다. 이미 국내 배우와 닮은꼴로 유명한 그는 거칠고, 제멋대로며, 막무가내인 캐릭터를 아이로니컬하게도 연민이 물씬 풍기는 인물로 완성해냈다. 카이는 원작보다 더 굵고, 공허하며, 매력적인 사나이로 업그레이드됐다.

‘피는 물보다 진한가’라는 질문이 영화 전반에 걸쳐 흐른다. 혈연은 아버지라는 키워드에서 비롯된다. 고아인 마크는 부모라는 존재가 아련하지만 카이는 ‘아버지는 항구’라는 확실한 인식이 있다. 출항(사회 진출)하면 잊지만 막상 정박(정착)하게 되면 절실하게 생각나는 항구 같은 아버지.

그러나 부모는 자식에게 항상 미안하다. 치매가 심해져 두 아들을 인식하지 못한 아버지는 “자식을 만나면 ‘미안하다’라는 말을 하고 싶다"라고 고백한다. 또 의리, 영웅, 시간이라는 철학을 담는다. 카이는 감옥에서 만난 한 장년의 수감자로부터 “뉘우칠 줄 아는 자가 진정한 영웅”이란 가르침을 받는다. 하지만 창은 “요즘 세상엔 돈 많은 자가 영웅”이란 천박한 신념을 지니고 있다. 영웅.

▲ 영화 <영웅본색4> 스틸 이미지

이렇게 세상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산다. 종이 같다고 인격과 존재의 양태마저 일색이지 못한 게 인간이다. 그래도 주인공들은 “형제(친구) 사이에 미움이 있거든 죽을힘을 다해 용서하라"라는 아버지의 충고를 되새긴다. 그래서 “거짓말을 제일 싫어”한다. 그럼에도 세상은 그들이 적응하기 힘들 만큼 “빨리 변해”간다. 의리와 시간.

1980년대는 이미 30년이란 세월 뒤로 숨었다. 주인공들은 내내 ‘세상이 변했다’와 ‘그래도 의리는 안 변한다’의 충돌 사이에서 고뇌하고 번민한다. 추억에 얽매여 고루할 것인가, 변화에 잽싸게 적응해 ‘영웅’이 될 것인가의 갈등은 선험론과 이성론의 대립이다. 감각과 초감각의 우위 싸움.

카이는 마크에게 보스이자 형이자 친구이자 아버지다. 차오에게는 스승이자 친구이자 친형이자 또 다른 아버지다. 10대 때 아버지 품을 떠나 독립한 카이는 감옥에서 처음으로 자신에게 참다운 가르침을 주는 장년의 수감자에게서 잊고 있었던 아버지라는 스승 혹은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아버지는 형이고 친구라는, 포지션을 잃은 이 시대 아버지의 공허한 메아리를 담았다.

홍콩 영화의 영원한 ‘따거’ 창치와이(증지위)를 카메오로 등장시키고, 장궈룽의 LP를 고색창연한 전축에 올려 ‘동닌칭’을 들려주는가 하면, 바에서 뜬금없이 이쑤시개를 입에 문 한 손님의 시선을 통해 저우룬파의 전매특허 사진을 보여주는 등 추억 소환에 많은 공을 들였다. 114분. 15살. 3월 22일 롯데시네마 단독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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