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퍼시픽 림: 업라이징>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퍼시픽 림: 업 라이징’(스티븐 S. 드나이트 감독)은 ‘퍼시픽 림’을 연출한 기예르모 델 토로가 제작자로 한 발 물러선 속편으로 사이즈를 더 키웠다. 외계 종족 프리커서가 인류 멸절을 위해 환태평양 지역의 차원 통로인 브리치를 통해 거대 괴물 카이주를 보냈던 2025년.

인류는 범태평양연합방어군을 결성하고 카이주와 유사한 사이즈의 로봇 예거를 앞세워 승리한다. 그로부터 10년 뒤. 지구는 겉으론 평화스러워 보이지만 내부적으론 몸살을 앓고 있다. 키 80m, 몸무게 2000톤의 예거들과 카이주들이 치열하게 싸운 장소는 황폐해졌고, 그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희생으로 지구를 구한 흑인 영웅 스타커 펜테코스트의 아들 제이크(존 보예가)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예거 조종사(파일럿)가 되지만 적성에 안 맞아 퇴역한 뒤 버려진 호화 저택에서 기거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큰돈을 벌 수 있는 파괴된 예거의 부품을 훔치려다 한 괴한에게 선수를 빼앗긴다.

제이크가 추적 장치를 통해 쫓아가 잡은 괴한의 정체는 10년 전 카이주에게 부모를 잃은 소녀 아마라(케일리 스피니). 그녀는 그동안 예거의 부품을 모아 자신만의 공간에서 12m의 작은 예거 스크래퍼를 만들었다. 경찰이 들이닥치자 두 사람은 스크래퍼를 타고 도망치지만 결국 붙잡힌다.

▲ 영화 <퍼시픽 림: 업라이징> 스틸 이미지

스타커가 양녀로 거둔 동양인 누나 마코는 제이크가 카뎃(인턴 파일럿) 교관으로 복귀하고 아마라가 카뎃에 합류하는 조건으로 인맥을 동원해 사면시켜준다. 승전 10주년 기념식 때 제이크는 예전에 티격태격했던 동료 네이트와 리더 예거 집시 어벤저를 드리프트(조종)한다.

그런데 갑자기 바다에서 미등록 예거가 등장해 행사장을 쑥대밭으로 만든 뒤 홀연히 사라진다. 상하이에 본사를 둔 샤오 기업의 회장 리웬(징 티안)은 파일럿이 예거에 탑승해 신경망을 직접 연결하지 않고도 어느 장소에서든 원격 조정이 가능한 드론 예거를 개발해 방어군의 승인을 기다리는 중이다.

방어군의 허먼 박사는 야심만만한 리웬에 빌붙어 있는 뉴튼 박사를 살짝 경멸한다. 그러나 뉴튼은 누가 뭐라 하든지 상관없이 자신의 야욕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는 인물이다. 그는 수족관에 담은 카이주의 살아있는 뇌를 침실에 두고 ‘마누라’라고 부르며 살고 있는 괴짜.

제이크는 미등록 예거와의 대결 중 마코를 구하지 못한 자책감에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정의감과 책임감을 갖추게 된다. 그는 네이트와 함께 집시를 드리프트해 극지에 은신한 미등록 예거를 찾아내 제압한 뒤 파일럿을 확인하기 위해 조종실 부위를 뜯어낸 후 깜짝 놀란다.

그곳엔 파일럿이 있는 게 아니라 카이주의 뇌가 들어있었다. 이 놀라운 사실은 방어군을 뒤흔든다. 허먼 박사는 이게 드론으로 지구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리웬의 음모라고 잠정 결론을 내리고 친분을 내세워 뉴튼에게 접근한다. 뉴튼은 흔쾌히 허먼을 도와 샤오 전산망의 심장부에 접근하는데.

▲ 영화 <퍼시픽 림: 업라이징> 스틸 이미지

델 토로는 연출뿐만 아니라 각본과 제작에도 자주 손을 댄다. 뤽 베송이 ‘그랑 블루’를 연출했을 때와 ‘택시’ 시리즈를 제작했을 때를 비교하면 이해가 쉽다. 따라서 이 영화는 델 토로가 연출한 게 아니라 제작했다는 걸 감안하면 크게 실망하지 않는다. 그냥 즐기자는 오락영화다.

약간 디스토피아 분위기를 풍기는 인트로는 뭔가 있을 법하지만 거기까지. 살짝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나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의 배경과 유사하다. 세계대전 규모의 전쟁터는 승패와 상관없이 폐허가 되기 마련. 10년 동안 복구 작업 없이 방치된 상황이라 부랑자와 범죄자가 넘친다.

제이크는 영웅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뒤를 따르지만 이내 스스로 부랑자로 전락한다. 언제 카이주의 재공격이 있을지 모르는 불투명한 혼돈의 시대이니 ‘오늘을 마음껏 즐기자’는 절망적 패배주의가 팽배한 세상이다. 그러나 백인 소녀 아마라는 정반대다.

눈앞에서 카이주에게 부모를 잃은 아마라는 직접 1인 조종용 예거를 제작했다. “무기력하게 마냥 구조를 기다릴 수 없다"라는 게 이유. 전편이 그랬듯 여느 할리우드 영화와 달리 흑인이 지구를 구한다는 설정은 꽤나 도발적이다. 이번엔 동양인에 청소년까지 가세한다.

▲ 영화 <퍼시픽 림: 업라이징> 스틸 이미지

백인 어른은 편견에 사로잡혀있고, 무능하며, 이중적인 양면성까지 지녔다. 겉으론 동양의 자본에 충성하는 듯하지만 역이용해 위험한 음모를 꾸민다. 러시아 소녀 빅토리아에 대한 조롱은 얼핏 러시아를 향한 듯하지만 사실은 빅토리아 여왕의 이음동의어인 대영제국의 최고 전성기를 겨냥한 뉘앙스를 풍긴다.

그리스 신화의 승리의 여신 니케(나이키)는 로마 신화에선 빅토리아다. 영화에서 빅토리아는 빅이라 부르면 좋아하고 빅토리아라고 하면 분노한다. Vic은 희생(자), 죄수, 봉이란 뜻이 있고 남자 이름이다. 스스로 여성성을 부정하고 봉이 되길 원한다는 건 미국을 봉으로 여겼던 영국의 역사에 대한 조롱일지도.

전편에 이어 이번에도 일본이 사건의 중심이긴 하지만 중국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늘었다. 중국이 할리우드에서 봉인 건 새삼스럽지 않지만 영국이 미국을 봉으로 알았다가 역전당한 것처럼 슬금슬금 미국과 유럽 시장에 침투한 중국의 자본이 언젠가 지구촌의 정치와 경제의 헤게모니를 움켜쥘지도 모른다.

별생각 없이 즐길 팝콘무비로선 제격이다. 중국 무협지를 연상케 하는 스스로 타락한 제이크의 영웅으로 거듭나기와 어린 아마라의 성장기 등은 전형적이지만 그래서 즐기기에 무난하다. 111분. 15살. 상영 중.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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