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7년의 밤>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정유정의 동명 소설을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추창민 감독이 스크린에 옮긴 ‘7년의 밤’은 시종일관 음울하다. 호러 장르가 아니지만 그 어떤 공포영화보다 음산하고 괴기스럽다. 장동건 류승룡 송새벽 고경표, 4명의 남자가 펼치는 연기 대결은 숨이 막힐 지경이다.

2004년. 인적이 드문 세령마을은 세령호를 막아 건설한 세령댐으로 인해 수몰된 지역을 품고 있는 탓에 늘 어둡고 축축하다. 이 일대의 최고 권력자는 치과를 운영하는 부동산 갑부 오영제(장동건). 그는 사랑하는 하영과 결혼해 12살 딸 세령을 키워왔지만 지금은 불행하다.

하영은 집을 나가 이혼소송을 냈고, 세령은 그녀와 내통하며 영제와 거리를 두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하영은 폭력적인 영제를 ‘악마’라고 표현할 정도로 진저리를 쳤다. 영제의 극에 달한 아내에 대한 집착과 원망은 세령에 대한 혐오감으로 변질돼 더욱 심한 폭력으로 그녀에게 가해진다.

어느 날 밤 영제는 세령에게 하영과의 연락 여부를 추궁하지만 끝내 부인하는 그녀에게 분노해 폭력을 가하고, 이에 겁먹은 세령은 도망친다. 그녀가 유일하게 기댈 사람은 댐을 관리하는 청년 안승환(송새벽). 전에 세령을 보호해주다가 오히려 성추행범으로 몰린 바 있기에 영제에 대한 감정이 안 좋다.

이날도 세령은 승환의 사택 문을 두들기지만 응답이 없고 영제가 여기까지 쫓아온다. 세령은 다시 내달린다. 댐 관리팀장으로 부임을 앞둔 최현수(류승룡)는 회식 중 아내의 성화에 사택을 보기 위해 음주운전을 하다 안개가 짙게 깔린 세령마을 입구에서 갑자기 도로로 뛰쳐나온 세령을 친다.

▲ 영화 <7년의 밤> 스틸 이미지

죽은 줄 알았던 세령이 일어나자 현수는 그녀 곁에 다가가는데 갑자기 그녀의 휴대전화벨이 울리자 당황해 황급히 그녀의 입을 막아 죽인 후 호수에 유기한다. 2주 후 그는 가족과 함께 부임해 사택에 살림을 푼다. 영제는 호수의 물을 빼고 수색한 끝에 싸늘한 딸의 주검을 발견한다.

경찰이 수사에 착수하자 진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세령은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직접 사인은 타인에 의한 질식사고, 몸 곳곳에서 줄곧 구타당한 상흔이 발견된다. 경찰은 영제를 의심하지만 영제는 인맥을 동원해 은밀하게 수사를 펼친 끝에 현수에게서 강력한 혐의점을 발견하고 그를 압박해간다.

현수에겐 세령과 동갑인 아들 서원이 있다. 서원은 세령의 위령제에서 신들린 듯한 무당에게 지적을 당한다. 서원은 세령을 본 적도 없다고 손사래를 치며 공포감에 휩싸인다. 그 시각 영제는 하영이 목을 맸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광기에 휩싸여 밖으로 뛰쳐나오는데.

영제는 성악설, 현수는 성선설, 승환은 보호적 자유방임주의 철학, 서원은 예정조화를 의미한다. 현수의 아내는 남편의 폭력에 “그 피가 어디 가?”라며 발악을 한다. 현수의 정서 한가운데엔 대한민국의 남성우월주의가 낳은 아버지의 폭력에 대한 트라우마가 깊게 똬리를 틀고 있다.

군대에선 폭력에 노출된 후임자일수록 선임자가 됐을 때 더욱 폭력을 휘두른다는 말이 있다. 현수와 그의 아버지의 모습은 2004년 혹은 그 이전에 한국 가정에서 보기 어렵지 않았다. 엄마와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폭력이 고통스러웠던 그는 그러나 아버지의 나이가 돼 아내에게 손찌검을 한다.

▲ 영화 <7년의 밤> 스틸 이미지

그럼에도 그는 선천적으로 착하고 나약한 남자다. 흥겨운 술자리를 털고 일어나 위험천만한 음주운전을 한 건 용기가 아니라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다. 세령을 친 뒤 어쩔 줄 몰라 당황한 것도 약해서다. 그가 악마적 선택을 한 건 서원이 또 다른 자신이 되는 걸 막기 위한 부성애 때문이다.

영제와 현수를 내세운 건 성선설과 성악설의 패러독스와 불완전 때문일 것이다. 감독은 맹자와 순자라는 현인이 과연 얼마나 제대로 인간의 본성을 꿰뚫었는지 대담한 질문을 던진다. 동물의 본능은 생존이지만 사람은 이기심이다. 그게 현수고 영제다. 그래서 철학은 로고스를, 종교는 이타심을 강조해왔다.

서원은 피해자다. 아버지가 살인마로 낙인찍혀 수감 중이고, 그 내용을 표지로 한 삼류 주간지가 급우들 책상 위에서 떨어질 날이 없어 전학 다니는 것마저 포기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원망했다. 엄마도 집도 다 날아간 채 승환의 보호 아래 살아온 그는 다 자란 뒤 분기를 갈무리하고 현실에 순응하기로 바꿨다.

승환은 말수가 적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듯하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선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밤마다 호수 바닥을 뒤지는 그는 마치 아틀란티스를 찾아 헤매는 구도자 같다. 어쩌면 억울한 영혼을 위로하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피 한 방울 안 섞인 세령과 서원을 보호하는 데 집착했을까?

영제가 왜 그렇게 분노와 광기와 집착을 이겨내지 못하는지 명확하게 드러난 바는 없다. 술이나 여색 혹은 도박에 빠진 것도 아니다. 확실한 건 하영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 표현과 방식이 잘못됐다. 처음부터 악한 사람은 자신이 악한 걸 모른다. 다른 사람처럼 감정은 있지만 선한 표출에 대한 인식이 약하다.

▲ 영화 <7년의 밤> 스틸 이미지

세상 전부였고, 꼭 자신에게 되돌아오리라 믿었던 하영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령이 죽은 것이 아픈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분노와 광기를 더욱 부채질한 것은 확실하다. 여기에 더한 아내의 사망 소식은 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이유도, 행복해질 여지도 모두 앗아갔다. 악이 악을 단죄하는 아이러니.

마을엔 마치 ‘곡성’의 무명(천우희) 같은 한 신들린 처녀가 자주 출몰한다. 그녀의 눈엔 일반인이 안 보이는 그 무엇이 보이기에 사람들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경고한다. 그녀는 물속에 잠긴 마을과 그곳에 서린 슬픔과 한을 볼 수 있다. 어쩌면 영제가 먼저, 현수는 마을에 들어섬으로써 그 귀기에 홀린 것이다.

영화가 집중하는 곳은 상실이다. 부자인 영제도, 가난한 현수도 많은 것을 잃었다. 상실이 낳은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과, 그게 야기한 불행에 연쇄적으로 많은 걸 잃어야 했던 또 다른 상실. 물안개가 자욱한 이 수몰의, 침잠의 마을은 결국 착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모두 살기 힘든 ‘현실’을 은유한다.

‘친구’의 동수가 야비한 눈빛이었다면 영제는 음울하고 허망하며 공허하다. 매번 2% 부족한 듯했던 장동건의 연기 솜씨는 이번엔 류승룡을 압도할 듯하다. 승환의 캐릭터는 착한데 송새벽의 스타일은 음산하다. 경지에 올랐다. 세령은 망자의 영혼을 깨끗하게 씻겨 위로해 주는 의식인 세령무다.

시간 때우기, 연인과의 데이트, 기분전환 등의 용도라면 관람 후 불편할 듯. 인간의 심리 탐구 및 배우들의 열연을 즐기고 싶다면, 그리고 원작이 좋았다면 추천. 주의, 시종일관 어둡고 음산하니 카디건 하나쯤. 123분. 15살. 3월 28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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