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미스 페티그루의 어느 특별한 하루>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 이어 ‘바람 바람 바람’(이병헌 감독)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멜로 영화가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바람~’은 일단 코미디로써 관객을 끌어당기지만 결국 사랑과 인생의 얘기다. 예의에 대한 준엄한 교훈이다. ‘미스 페티그루의 어느 특별한 하루’(2008)는 무겁지만 일맥상통한다.

지난 그래미 어워드에서 환갑에 ‘쓰리 빌보드’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프랜시스 맥도맨드가 타이틀 롤을 맡은 ‘미스 페티그루~’는 코미디는 많지 않지만 ‘바람~’과 매우 유사한 철학과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바람을 피우는 데도 예의가 있고, 사랑을 하는 데엔 반드시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바람~’. 결혼한 지 20년 된 석근은 지난 세월 내내 틈만 나면 바람을 피워왔다. 그의 소신은 완벽함. 육체적 관계는 맺되 절대 가정에 흠집을 내면 안 된다. 아내 담덕과 아직도 키스를 할 정도니 당연히 이혼은 절대 불가. 그런데 담덕에게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 제니의 속옷을 소지한 걸 들킨다.

알고 보니 담덕은 지금까지 석근의 외도를 거의 다 알고 있었다. 석근을 사랑하고, 그의 바람이 자신이 싫어서라기보다는 철이 없고 유혹에 약한 천성 탓이기에 언젠간 잦아들 것이라 믿으며, 가능하면 서로 스트레스를 받거나 싸워서 헤어지는 건 막자는 생각이었다. 한국형 아내라서가 아니라 사랑이었다.

그렇게 제니의 속옷에 대한 화를 풀고 주눅 든 석근을 위해 칼국수 재료를 사러 시장에 나서는 것도 그 증거. 그러나 그 길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이를 계기로 석근의 철부지 바람기는 잠잠해진다. 여동생 미영이 ‘제발 여자 좀 사귀라’고 성화를 해도 요지부동이다. 아내에 대한 예의다.

▲ 영화 <바람 바람 바람> 스틸 이미지

‘미스 페티그루~’. 양차 세계대전 사이 런던. 전쟁 때 사랑하는 남자를 잃은 중년의 빈민 페티그루는 직업소개소를 통해 가정교사로 취업하지만 융통성 없는 성격 탓에 벌써 3번이나 중간에 해고됐다. 마지막 부탁이라 애원해도 소장이 쌀쌀하게 등을 돌리자 책상 위에 있던 명함 한 장을 몰래 집어온다.

주소는 호화 맨션으로 클럽에서 노래 부르는 치명적인 매력의 라포스가 산다. 그녀는 돈 많은 중년의 클럽 주인 닉, 갑부 뮤지컬 극단주를 아버지로 둔 19살 필, 클럽에서 피아노를 치는 가난한 청년 마이클 등 3명을 동시에 사귀고 있다. 맨션은 닉 소유. 그런데 침대엔 필이 누워있고, 곧 닉이 들이닥칠 상황.

위기에 어쩔 줄 모르는 라포스를 위해 페티그루가 기지를 발휘해 침착하게 잘 대처해주자 라포스는 그녀를 사교담당 비서로 고용한다. 그렇게 무료급식소에 줄을 서던 극빈자에서 상류사회로 수직 상승한 그녀는 각종 파티를 누비며 침착함과 신념을 바탕으로 훌륭한 비서 역할을 해내며 주목받게 된다.

닉은 라포스를 의심하는가 하면 그녀를 존중하지 않고 육체의 노예 정도로 업신여긴다. 필은 라포스가 새 뮤지컬 주인공에 캐스팅되려고 자신과 사귀는 걸 알면서도 비즈니스를 떠난 순수한 사랑을 갈망하는 한편 아직은 사리판단 능력이 현저하게 뒤져 다른 여배우와 바람을 피운다.

마이클은 가진 건 없지만 라포스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큼은 그 누구보다 진지하고 강렬하다. 라포스의 과거를 아는 유일한 그는 그녀의 출신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그녀의 모든 걸 사랑한다. 그는 라포스의 사생활을 알면서도 뉴욕에서 결혼해 함께 무대에서 연주하고 노래하며 살자고 애원한다.

▲ 영화 <미스 페티그루의 어느 특별한 하루> 스틸 이미지

라포스도 마이클이 가장 자신을 순수하게 인간적으로 위해줄 평생의 친구란 걸 잘 안다. 그러나 그녀는 당장 닉과 헤어지면 빈털터리가 되는 게 두려운 한편 필을 통해 스타덤에 올라 닉의 손아귀에서도 벗어나고, 부와 명예도 얻고 싶다. 페티그루와 라포스는 사랑을 놓고 의견 차이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페티그루가 라포스에게 윤리나 도덕을 가르치는 건 절대 아니다. 세 사람을 동시에 사귄다는 걸 문제 삼는 게 아니라 셋 중의 하나와 결혼해야겠는데 누구인지 확실한 신념을 갖지 못한 라포스에게 인생의 선배다운 진심에서 우러난 조언을 하는 것이다. 바람에 대한 예의다.

라포스에겐 유명 디자이너 이디스란 친구가 있다. 패션업계의 거물인 늙은이 조와 약혼했었는데 젊은 남자와 바람을 피우느라 조와의 약속을 어겨 파혼당한 상황. 하지만 그녀는 출세를 위해 어떻게든 조와 결혼해야만 하는 절박한 입장이라 라포스를 통해 페티그루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남자 양말 디자이너로 출발해 지금은 여성 속옷으로 거물이 된 조는 상류사회의 가식과 출세지향적인 비즈니스 관계에 신물이 나있던 상황. 그런데 촌스럽지만 순수하고 자기주장이 강하며 사랑에 대한 신념이 확실한 페티그루에게 어느새 끌려들어 간다.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긴 하지만 깊은 뜻이 있다.

파티 중 공습경보가 울리자 부자들은 도망가느라 바쁘다. 훈련용이라는 라포스의 말에 페티그루는 연습은 연습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고 응수한다. 사람은 실수를 하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다음에는 잘할 수 있다고 믿지만 실수와 실패는 거듭된다. 사랑도 일도 워밍업이 아니라 모든 게 실전의 연속이란 뜻.

▲ 영화 <바람 바람 바람> 스틸 이미지

‘바람~’의 미영의 남편 봉수는 바람둥이인 손위 처남 석근을 경멸했지만 최근 그가 만나는 제니를 보자 결혼 후 처음으로 흔들려 결국 그녀와 불륜관계가 된다. 참으로 저질 남편들이다. 그렇다고 담덕과 미영이 순결했을까? 모든 비밀을 아는 유일한 인물인 석근은 그러나 최종적으로 예의를 선택한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그래서 잘못을 저지른다. 중요한 건 뭐가 옳고 그른지, 도대체 자신에게 부족하거나 문제인 건 뭔지 파악하고 그걸 해결하려는 노력이다. 담덕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의 능력과 예의, 육체와 정신의 임계점을 찾은 그는 무능해서 무지한 봉수에게 지성과 지혜를 깨우쳐준다.

페티그루는 연인이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쟁이란 재앙을 통해 애정에서 소외됐기에 주눅 들어있다. 그녀가 대인관계나 업무에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음에도 번번이 무시당하는 건 가난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총체적 난국과 패배의식이 그녀의 칙칙한 잿빛 소재에 고루한 디자인의 코트로 표출된다.

그러나 그녀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예의 바르다. 라포스의 실질적인 메이드지만 결코 복종하거나 아부하지 않고 예의와 배려의 테두리 안에서 바른말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바람~’은 ‘이솝 우화’의 ‘해와 바람’을, ‘미스 페티그루~’는 ‘신데렐라’를 각각 닮은 전형적 정형성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럼에도 꽤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바람~’), 받아온(‘미스 페티그루~’) 이유는 코미디라는 쉬운 접근성과 상류사회에 대한 비판 이데올로기를 통해 각각 ‘사랑의 형태’를 비교적 입체감 있게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외형(형태)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상투적 교훈이 불편하지 않은 이유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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