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렛 더 선샤인 인>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오프닝부터 질펀한 베드신으로 시작되는 프랑스 영화 ‘렛 더 선샤인 인’(클레어 드니 감독)은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 겸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의 책 ‘사랑의 단상’을 영화적으로 각색했다. 평범한 멜로가 아니고 성애물은 더더욱 아니다. 소통을 위한 대화와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한 키워드다.

남편 프랑수아와 이혼하고 10살 딸 세실을 키우며 사는 화가 이자벨(줄리엣 비노쉬)은 유부남 은행가 뱅상과 한낮에 뜨거운 정사를 나눈 뒤 주말 약속을 재확인한다. 그러나 전화 한 통 없이 주말은 흘러갔다. 이자벨은 “당신도 아내도 사랑한다"라는 뱅상에게 혐오감을 느끼고 등을 돌린다.
 
이자벨은 오늘도 단골 생선가게 앞에서 별장을 가진 부자 매튜와 마주친다. 매튜는 별장에서 마음대로 작업을 하라며 유혹하지만 이자벨은 콧방귀도 안 뀐다. 저녁을 사주겠다고 불러낸 연극배우는 카페에서 거푸 맥주를 마시며 알맹이 없는 자신의 신세타령만 주절주절 늘어놓는다. 이자벨은 배가 고프다.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의 대화는 여전히 물과 기름처럼 겉돈다. 배우는 자신은 아내와 이혼을 준비 중인데 그 속내를 아내는 전혀 모른다는 엉뚱한 말만 늘어놓는다. 이자벨은 속이 터질 것만 같다. 배우는 승용차로 이자벨을 데려다주고 이자벨은 제 집에서 ‘라면 먹고 가라’고 제안한다.

▲ 영화 <렛 더 선샤인 인> 스틸 이미지

이후에 다시 만난 배우는 “그날 섹스를 하는 게 아니었다”라고 후회하며 “다시 만나되 섹스는 하지 말자”라고 거리를 둔다. 이자벨은 갤러리 대표들과 시골의 현대 미술제에 참석한 뒤 뒤풀이 파티에서 촌스럽고 무식하지만 순수한 남자 실뱅을 만나 사귄 지 3주 만에 헤어진다.

갤러리 직원인 흑인 마르크는 지금까지 만나왔던 남자들과 달리 매우 친절하고 부드러우며 배려심이 강하다. 그러나 “내 집에 가자"라는 이자벨의 유혹에 천천히 가자고 거리를 둔다. 프랑수아와 다시 잘 될 듯하다가 벽에 부닥친다. 이자벨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기분으로 상담 전문가를 찾아가는데.

프랑스 아트무비 특유의 수평적인 잔잔한 진행의 형식이지만 간간이 웃음을 주는 코드가 살아있어 로맨틱 코미디의 외형도 보인다. 전성기 ‘나쁜 피’ ‘퐁네프의 연인들’ ‘세 가지 색: 블루’ 등으로 한국 팬들을 사로잡은 비노쉬의 모노드라마 같은 원 톱 작품을 이끄는 연기력은 탁월하다.

얼핏 참사랑의 의미 혹은 대상을 찾는 중년의 탐험 같은 영화지만 사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컨택트’ 같은 구조주의 언어학을 뿌리로 그 위에 소쉬르의 전달의 기호학과 의미 작용의 기호학을 기둥으로 세운 뒤 바르트의 신화와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개념을 인테리어로 꾸몄다.

뱅상은 이자벨의 작품 전시와 판매를 도와줄 새 파트너에 대해 그녀의 전 남편과 한때 내연관계였다고 이간질을 하더니 은행 동료들을 책도 안 읽고 예술도 모르는 부르주아라고 비난하는 양면성을 보인다. 결국 그는 우는 이자벨을 원숭이라고 비난한다. 대화가 안 통한다.

▲ 영화 <렛 더 선샤인 인> 스틸 이미지

배우는 공연하느라 밤마다 고역인데 관객은 한 번만 보니 자신의 아픔을 모른다며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라고 하소연한다. 직업상 당연한 일인데 그는 프로답지 않게 투정을 늘어놓는다. 저녁을 먹자고 여자를 불렀으면 로맨틱한 대화로써 침대로 갈 분위기를 조성해야 하는데 어리광만 부린다.

이자벨은 여러 남자들과의 사이에서 매번 대화가 안 되거나 아예 대화가 없는 데 지친다. “말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라는 대사는 참으로 내포한 뜻이 깊다. 하이데거는 언어를 ‘발성화를 지시하기 위한 용어적 표현’으로, 말을 ‘언어적 발성화의 존재론적-실존론적 기초’로 각각 규정했다.

동물에게 기호가 있듯 인간에게도 기호와 이를 확실하게 정의하거나 의사를 표현하는 랑그(등질적 언어체계)가 있기에 파롤(랑그의 개인적 수행)이 가능하고 필수적인데 영화 속 남자들은 시니피에(소리로 표시되는 말의 의미)에 무지하고 시니피앙(소리로 의미를 전달하는 형식)에 취약하다.

이자벨이 새 파트너가 전 남편과 내연관계였는지 확인하는 시퀀스는 개인이 전체의 체계 안에서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는 구조주의다. 만약 사실일 경우 매우 불편해질 수도 있지만 전체적 관점이 옳기 때문이다. 개인의 행위와 인식은 결국 즉자적이 아니라 대자적인 관점에서 개념화된다.

영화는 남녀라는 대표적인 이항대립이란 개념쌍으로 소쉬르를 거론한다. 남과 여라는 두 상징의 외연 의미와 함축 의미를 통해 사랑을 넘어선 관계에 대한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또 하나의 이항대립은 뱅상의 백발의 백인 운전기사(부르주아)와 흑발의 흑인 택시 운전기사(프롤레타리아)다.

▲ 영화 <렛 더 선샤인 인> 스틸 이미지

백인은 뒷자리의 이자벨을 힐끔힐끔 훔쳐보지만 흑인은 부드러운 대화를 통해 그녀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파악한 후 재즈를 틀어 달래주려 애쓴다. 뱅상은 오로지 이자벨의 육체만 탐하는 데 반해 마르크는 점잖게 유혹을 사양한다. 화면에 살짝 등장하는 샤를 페팽의 저서 ‘실패의 미덕’이다.

그가 이자벨에게 ‘한 달 뒤’를 기약하는 이유는 그동안 많이 실패했기에 더 이상 실패를 통해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것. 카운셀러가 이자벨에게 “당신은 사랑 때문에 사람을 못 끊는다. 사랑이 가장 큰 고민”이라며 “안 굴려도 (세상만사는 잘) 돌아가니 마음을 오픈하라”라고 조언하는 장면은 매우 중요하다.

이자벨은 그리스신화의 판도라 혹은 아프로디테(베누스, 비너스)다. 아프로디테는 사랑의 여신인데 그녀에 대한 얘기는 극과 극이다. 사랑이 그렇게 파란만장하다는 의미다. 점술가는 제우스다. 세상 모든 걸 다 꿰뚫어보는 신 중의 왕이지만 사실 그도 이런저런 사연이 많다. 점술가도 방금 실연을 경험했다.

프랑수아는 집 열쇠를 내놓으라는 이자벨의 성화에 “이 집 지분의 절반 이상이 내 것”이라며 거부한다. 신화와 각종 미디어가 남성의 우월주의와 지배체제에 여성이 순응하도록 만들었다는 바르트의 신화의 의미 작용이다. 그런데 이제 사랑을 초월했을 법도 한 초로의 주인공들이 왜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프랑스 영화답게 결론은 ‘오픈 마인드’다. 이자벨은 지지리 복이 없는 것일까, 복을 못 찾는 것일까? 영화의 내용만 놓고 본다면 후자에 가깝다. 아니 어쩌면 진정한 사랑 자체가 판타지일 수도 있다는 암시마저 엿보인다. 러닝타임 95분. 15살 이상. 4월 26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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