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나를 기억해>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나를 기억해’(이한욱 감독)는 연쇄 살인마의 스릴러보다, 귀신의 호러보다 더 소름 끼치는 스릴러다. 14년 전 경기도 양평. 여고생 유민아는 채팅을 통해 알게 된 또래의 김진호를 만나 그가 건넨 음료수를 마신 뒤 기절해 그의 친구들에게 윤간을 당하고, 이 동영상이 퍼지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문이 인다.

현재 서울. 30대 초반의 고등학교 여교사 한서린(이유영)은 애인 우혁과의 결혼 날짜를 잡은 게 학생들에게 알려져 축하를 받는다. 책상에 놓인 선물더미 속 커피를 아무 생각 없이 마신 뒤 그대로 잠든다. 그대로 다음날 아침을 맞은 그녀의 휴대전화에서 자칭 마스터라는 자의 문자와 동영상을 보고 놀란다.

마스터는 서린의 속옷 차림 동영상을 퍼뜨리겠다고 위협하고,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의 일상은 완전히 망가져 결혼의 꿈마저 깨진다. 다급해진 그녀는 전직 형사 오국철(김희원)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한다. 수업 중 마스터의 문자가 서린은 물론 반 전원에게 온다. 그리고 곧 전송된 사진.

그런데 사진 속의 주인공은 서린이 아닌 그 반 학생 양세정(오하늬). 서린은 달래주는 과정에서 그녀가 모범생 반장 김동진(이학주)와 연인 사이고, 그에게 동영상까지 찍혔다는 충격적인 얘기를 듣는다. 국철은 후배 형사에게 김진호의 소재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하는데 돌아온 답은 수배 중이지만 행방불명.

▲ 영화 <나를 기억해> 스틸 이미지

동진은 미성년자를 강제로 제압해 음란물을 찍은 사건으로 입건된 적이 있었지만 검사장인 아버지의 ‘빽’으로 풀려난 바 있다. 그의 두 얼굴을 알게 된 서린은 자신의 동영상 사건과 연관이 있음을 직감하고 그의 뒤를 쫓아 노래주점에 갔다 오히려 그의 일행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학철은 일당 중 한 명을 붙잡아 다그치는 과정에서 그들이 마스터에게 돈을 받고 음란물을 찍어왔으며, 노래주점에서도 마스터의 지령에 의해 서린을 붙잡아 찍으려 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세정이 연락이 끊긴 채 행방불명됐다. 게다가 마스터는 서린의 일거수일투족을 꿰뚫어보고 있는데.

마스터의 정체를 찾는 여정과 3번 이상의 반전이 전율을 넘어서 엄청난 충격과 그만큼의 재미를 보장한다. 피해자들의 상황에 몰입·이입시키는 뛰어난 연출력 때문에 그녀들의 현실을 차마 두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아프다는 게 정말 최상의 공포인데다 사회적 경종이 무척 커 진지한 수준도 꽤 높다.

청소년범죄 처벌 강화 여론이 강하고 ‘미 투’ 운동이 한창인 요즘 절묘한 타이밍이다. 어린 소녀에게 약물을 먹여 혼절하게 한 뒤 윤간을 하고 이를 찍어 인터넷에 올려 돈을 버는 청소년들에게선 준법정신을 떠나 일말의 죄책감이나 인간미가 보이지 않는데 이게 현실을 모티프로 했다니 정말 전율할 일이다.

감독은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에서도 영감을 얻었고 영어 제목을 ‘마리오네트’라 붙였다. 마스터는 베엘제붑(파리의 왕인 타락천사)이고 동영상을 찍는 이들은 파리며 피해자들은 마리오네트다. ‘파리대왕’에서 권위를 상징하는 소라는 모든 사람들의 욕망의 탄착점인 돈으로 대체됐다.

▲ 영화 <나를 기억해> 스틸 이미지

성범죄에 대한 접근과 처리가 매우 중요한 이유는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이 피해자에게 다시 상처를 줄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피해자와 가족에겐 사실을 숨기려는 심리가 강하게 작용되기 십상이다. 파리와 베엘제붑은 그 약점을 이용해 손쉽게 피해자를 마리오네트로 만들곤 한다는 부조리한 현실.

세정은 위로하는 서린에게 “선생님이 제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냐"라고 묻고 서린은 “숨거나 자신을 부정하거나”라고 답한다. 세정은 “전 안 그럴 겁니다. 나를 부정한다고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기에”라고 응수한다. 세정을 걱정하는 서린에게 우혁은 “생각이 얼마나 없으면 그런 걸 찍혀”라고 타박한다.

서린은 “그럼 세정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라고 묻고 우혁은 “인생 끝난 거지”라고 쉽게 답한다. 맹자와 순자는 성선설과 성악설이라는 상반된 이론을 설파했는데 이 영화는 후자다. 천박하고 이기적이며 극악무도한 본성과, 무책임한 본성의 두 가지를 부각한다. 우혁과 대다수의 대중은 후자다.

전자는 날로 숫자가 늘고 수법이 더욱 흉포해지는 강력범죄자다. 서린을 경악하게 만드는 학교 창고 신에서 거미와 거미줄이 오버랩되는 건 마스터 및 그가 파리들과 마리오네트들을 조종하는 ‘줄’의 메타포다. 마스터는 베엘제붑인 동시에 그리스 신화 속 리디아 왕국 최고의 직조공 아라크네다.

▲ 영화 <나를 기억해> 스틸 이미지

실력에 대한 오만이 극에 달한 그녀는 감히 지혜, 전쟁, 직물, 요리의 여신 아테나에게 도전한 벌로 거미가 돼 평생 한 줄기 실을 꽁무니에 달고 살게 됐다. 마스터 등은 온라인이라는 천혜의 벙커 안에서 철저하게 정체를 숨긴 채 권력을 휘두르면서 오만방자해지고(아라크네) 죄의식을 잃는다(베엘제붑).

인간 본성의 사회적 발현은 첨단의 시대로 갈수록, 자본주의가 더욱 심화될수록, 악의 성향이 강해지고 그게 적용되는 연령층이 점점 더 낮아진다는 이 노골적인 설정은 “요즘 애들, 생각처럼 그렇게 순진하지 않아”라는 대사로 방점을 찍는다. 청소년 선거권 하향 조정 요구 목소리가 높은 요즘이다.

칼 구스타프 융이 창시한 분석심리학의 중심 개념인 집단 무의식의 원형 중 페르소나와 그림자, 그리고 자기를 주인공들 속에 심어놓았다. 불량학생들은 인간의 가장 강력한 내면적 본성인 어둡고 사악한 그림자가 강해 김진호 혹은 마스터의 페르소나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서린과 국철은 매우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실수를 저지른 후 이를 바로잡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하는 자기를 보여준다. ‘파리대왕’에서 불을 피우는 가장 강력한 도구였던 안경이 여기서도 파열된 렌즈와 새 렌즈로써 꽤 의미심장하게 부각된다. 101분. 청소년 관람 불가. 4월 19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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