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주혁 소장의 성평등 보이스] 만 35세 이상 여성이 임신하면 뭐라고 불릴까? ‘노산’(老産)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임신한 여성은 35세만 넘으면 노인 취급을 받는다는 얘기다. 잘못됐다. ‘고령임신’이라고 하기도 한다. 노산보다는 어감이 나을지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다. 고령자는 노인과 마찬가지로 최소한 65세 이상 정도는 되는 사람 아니겠는가. 심지어 요즘 65세는 지하철 경로석에 앉기를 부담스러워하는 청춘이다. ‘늦은 임신’ ‘만산’(晩産)이라고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임신 10개월을 채우지 않고 일찍 세상에 나온 아기를 예전에는 성숙하지 못한 아이라는 뜻에서 ‘미숙아’라고 불렀으나 요즘은 ‘이른둥이’라고 바꿔 부르니 훨씬 듣기 좋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부인병(婦人病)은 ‘여성 생식 기관의 질환이나 여성 호르몬 이상으로 인한 병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고, 산부인과(産婦人科)는 ‘임신, 해산, 신생아, 부인병 따위를 다루는 의학 분야’다. 결혼 여부에 관계없이 미혼 여성도 관련 질병에 걸리면 ‘부인병’이고 ‘산부인과’에 가야 한다. 적절치 않다.

여성가족부 주최 ‘2018년 내 삶을 바꾸는 양성평등 정책 대국민 공모’에서 임신·출산을 위한 병원이라는 느낌이 들어 미혼 여성들이 이용하기를 꺼리게 되는 주요 요인인 ‘산부인과’라는 명칭을 ‘여성의학과’ 등으로 개선하자는 제안이 장려상을 받았다.

사실 산부인과 명칭 변경 문제는 수년 전부터 논란이 돼온 사안이다. 대한산부인과학회는 지난 2102년 대의원총회에서 진료과와 학회 명칭을 바꾸기로 결의하고 추진했다. 대한의학회와 대한의사협회의 인준을 거쳐 보건복지부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확정된다. 그러나 내과, 피부과, 성형외과, 가정의학과, 외과 관련 학회가 일제히 반대해 보류됐다. 명칭의 부적절성도 있지만 저출산 시대를 맞아 진료영역을 확대하려는 의도도 담겨 있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대립한 것이다.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적절한 명칭을 찾아야 할 것 같다.

▲ 대한산부인과학회 홈페이지

서울시는 최근 ‘미망인’(未亡人)과 ‘학부형’(學父兄) 등 성별이나 장애 유무에 따른 차별적 의미가 담긴 구시대적 행정 용어 13개를 고치기로 했다.

‘미망인’이란 용어는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 같이 죽었어야 했는데, 미처 그러지 못하고 아직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가부장제의 잔재다. 시는 ‘고(故) ○○○씨의 부인’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학부형’도 ‘학생의 아버지나 형으로 학생의 보호자를 이르는 말’로서 여성이 배제돼 있다. 시는 ‘학부모’(學父母)를 쓰도록 권고했다.

‘배우자가 죽거나 이혼해 홀로 있는 아버지(어머니)’를 뜻하는 ‘편부’(偏父)와 ‘편모’(偏母)는 성중립적인 ‘한부모’로 바꿨다. ‘정상인’은 장애인을 비정상인으로 간주하는 개념이어서 ‘비장애인’으로 바꾸기로 했다.

▲ 서울시 행정용어 순화 고시

시집과 처가 식구들을 부르는 명칭도 성차별적이다. 남편의 형제는 아주버니, 서방님, 아가씨 등으로 높여 부르는 반면 아내의 형제는 처남, 처형, 처제라고 낮춰 부른다. 시집 식구들을 시남, 시형, 시제라고 평등하게 부르면 듣기가 어떨까. 시댁과 처가댁, 처가집과 시집으로 격을 맞춰 부르는 게 평등하다. 남편을 기준으로 시형, 시누이, 시동생이라고 하고 아내를 기준으로 처오빠, 처언니, 처동생이라고 하면 어떨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등 속담도 마찬가지다. 이제 스토킹처벌법이 만들어져서, 싫다는데 계속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행동에 대해 징역형까지 가능해지는 등 처벌이 강화된다. ‘열 번 찍으려다가 감옥 가는 수가 있다’는 말이다.

시대착오적이고 차별적인 용어나 속담 등을 바꾸는 노력이 시급하다. 말은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젠더폭력 예방과 일과 삶의 균형을 이루고 저출산을 극복하며 여성과 남성이 모두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행동과 함께 말도 바뀌어야 한다.

▲ 김주혁 가족남녀행복연구소장

[김주혁 가족남녀행복연구소장]
여성가족부 성평등보이스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양성평등․폭력예방교육 전문강사
전 서울신문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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