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레슬러>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레슬러’(김대웅 감독)는 가족 코미디의 외투를 걸친 인생의 철학을 어렵지 않게 풀어가는 영화다. 40살 귀보(유해진)는 체육대학 레슬링 선수인 20살 아들 성웅(김민재)과 함께 소영 가영(이성경) 지영 세 자매를 슬하에 둔 성수(성동일) 미라(진경) 부부의 단독주택 반지하에 세 들어 산다.

레슬링 국가대표 선수였던 귀보는 19살에 10살 연상의 아내를 만났지만 아내는 성웅을 낳고 금세 죽었다. 체육관에서 남자들에겐 레슬링을, 아줌마들에겐 에어로빅을 가르치는 귀보의 삶의 목표는 성웅의 올림픽 금메달 획득이다. 국가적 영웅이 되고, 연금도 받아 자신과 달리 안정적으로 살길 바라는 것.

성웅과 가영은 10년 된 친구고 귀보는 가영을 친딸과 다름없이 여기고 있다. 귀보는 성수를 친형처럼, 미라를 친누나처럼 따른다. 엄마(나문희)는 재혼하라고 성화고 안부 전화 한 통 없다고 잔소리다. 미라 역시 안타까운 마음에 4차원 의사 도나(황우슬혜)를 소개해주지만 귀보의 마음은 철옹성이다.

성수가 운영하는 동네 호프집에선 매일 저녁 술판이 벌어진다. 성수와 귀보에겐 친한 동생 승혁(김태훈)이 있는데 그는 게이다. 성웅과 가영은 야릇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 할 말이 있다며 놀이공원에 간다. 사랑 고백을 위해 반지를 준비한 성웅에게 가영은 “네 엄마가 될게”라고 폭탄선언을 한다.

가영은 귀보를 유혹하기 위해 체육관에서 레슬링을 배운다. 늦은 밤 귀보 앞에 나타난 가영은 갑자기 입을 맞춘다. 귀보는 없던 일로 하고 성웅 앞에서 어색해하지 말자고 당부한다. 그러나 술에 취한 성웅이 양 가족이 모인 곳에서 이 모든 사실을 폭로하고 아버지와의 감정의 골이 깊어만 가는데.

▲ 영화 <레슬러> 스틸 이미지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의 틀 안에서 형성되는 가족 코미디임을 드러내놓고 있는 만큼 억지스럽지 않은 유머와 말장난이 꽤 큰 재미를 준다. 임대인과 임차인 사이인 미라와 귀보는 친남매 이상으로 가깝다. 미라는 귀보에게 재혼하라며 “늙어서 혼자 살면 냄새나”라고 말한다.

이에 성수는 “당신과 사는 나는 왜 냄새가 나는데”라고 투덜대는 식. 함께 장을 본 귀보가 “벚꽃이 흩날리는 것만 봐도 눈물이 나”라고 말하자 미라는 “그건 나이 먹어서 여성 호르몬이 생성되기 때문이야. 그런데 나는 남성 호르몬이 생겨”라고 투덜거린다. 나이 먹으면 배우자가 있어도 불평, 없어도 불편.

러닝타임이 흘러가다 보면 단순한 가족 코미디가 아님을 알게 된다. 철부지 남편이자 아버지인 성수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부수적인 재미를 주는가 싶더니 갑자기 나타난 도나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4차원 캐릭터가 긴장감의 해방을 허락하지 않는다. ‘데미지’와 ‘설국열차’의 인용도 쏠쏠한 재미.

부모와 자식의 애증, 가족의 대화와 소통, 그리고 어설픈 청춘의 성장통이 큰 소재라면 회전목마, 우산, 양수경의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는 매우 중요한 키워드다. 회전목마는 추억이다. 엄마는 귀보가 주는 우산을 마다하고 “너나 써”라고 외친다. “자식 키우는 게 힘드네”라고 말하는 귀보에게 “넌 20년 됐지? 난 40년 됐다”라고 서운함을 토로한다.

영화가 묻는 가장 큰 질문은 ‘낭비하지 않는 인생과 진정한 행복과 꿈이 뭔가’다. 모든 부모는 자식이 꿈이고 자식이 행복한 게 희망이다. 그래서 자식에게 집착하고, 모든 걸 쏟아붓는다. 자식은 부모를 만족시키기 위해 과잉의 애정공세를 좋은 척한다. 싫지만 부모가 좋아하는 것이면 억지로 해낸다.

▲ 영화 <레슬러> 스틸 이미지

승혁은 한바탕 몸살을 앓은 뒤 많이 변한 귀보에게 “이제 철들었네. 우리 아버지도 철들었어. 내가 게이인 걸 알았는데 나만 행복하다면 알아서 하래”라고 말한다. 감독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변주를 통해 가족의 대화의 단절을 안타까워하는 한편 참사랑을 묻는다.

귀보는 딸과 다름없이 여겼던 가영의 청천벽력 같은 애정공세(엘렉트라 콤플렉스)에 놀라고, 성웅은 영원한 ‘우산’인 줄 알았던 귀보가 연적이 된 상황(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분노하고 두려워한다. 통통 튀는 유머와 다양한 캐릭터의 향연이 큰 재미를 주던 흐름은 중반 이후 꽤 진지하고 어두워진다.

뻔한 가족 코미디의 클리셰로 그칠 뻔한 뼈대를 가영이란 캐릭터의 강화로 복합적인 드라마를 형성한 건 매우 영리했지만 “미안하긴, 다 그러면서 크는 거지”라며 교과서적인 성장 드라마로 정리하려 한 시도는 아쉽다. 이제 확실한 믿음을 주는 유해진 때문에 티켓을 샀다 이성경에게 화들짝 놀랄 것이다.

드라마 ‘치즈 인 더 트랩’이나 ‘역도 요정 김복주’는 서막에 불과했다. CF에서 두드러진 비현실적 이미지는 연출에 불과했다. 때론 소녀가, 때론 어른이, 때론 애굣덩어리가, 때론 질투의 화신이 되는 등 천변만화의 질풍노도처럼 몰아치는 연기의 변신과 매력의 방출에 푹 빠져들 것이다.

▲ 영화 <레슬러> 스틸 이미지

연인 혹은 친구끼리 본다면 다소 지루하거나 진부할 수 있다. 눈물을 감춰야 하기 때문이다. 가족끼리라면 강력한 추천! 혼자 본다면 초강력 추천. 코미디라고 방심하지 말자. 귀보의 입에서 “아빠가 미안해. 고맙다고 해줘서 고마워”라는 말이 나올 때 눈물이 흐른다면 나이를 먹었거나 외로운 거다.

사랑이 왜 창밖에 흐르는 빗물 같을까? 부모는 자식에게 닥치는 삶의 위험(비)을 막아주는 ‘우산’이다. 비는 고난, 위기, 눈물이다. 집안에서 창밖을 바라볼 땐 위험에서 벗어나있지만 비를 맞던 때(실연, 고생)가 생각나 마음이 아플 것이다. 가족의 사랑도, 연인의 사랑도 과거는 다 아프다. 창밖의 비처럼.

비가 내리는 바깥은 고통과 고난이 득시글대는 차안(현세)의 공간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고난과 고통과 실연 등의 실패를 경험하면서 부모가 돼가고 어른이 돼간다. 그래서 아팠던 기억을 떠올리며 창밖의 비를 바라볼 즈음엔 어느덧 피안(해탈)의 공간으로 이동해 있는 것이다.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의 ‘세월 가면 그 누구나 잊히지만’이란 가사는 그래서 의미심장하게 작용한다. 어느덧 성장한 자식이 독립한 뒤, 혹은 사랑이 떠나간 뒤의 빈 자리를 볼 즈음엔 성징에 변화가 올 정도로 나이를 먹은 것이다. 그렇게 점점 잊고 잊히는 게 인생이란 얘기. 110분. 15살 이상. 5월 9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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