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원더스트럭>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원더스트럭’은 인상 깊은 멜로 ‘캐롤’로 많은 관객을 감동시킨 토드 헤인즈 감독 때문에 관심을 끄는 영화다. 시공간을 뛰어넘는 판타지 멜로의 외형을 지녔지만 소년과 소녀가 사랑하는 이를 찾는 여정을 통해 소통하는 방법과 우정 등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때론 잔잔하게, 때론 격정적으로 표현한다.

1927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소녀 로즈(밀리센트 시몬스)는 부유하지만 극도로 가부장적이고, 형식에 얽매이며, 남의 시선에 민감한 아버지 밑에서 힘겹게 산다. ‘도와줘’라고 쓴 종이배를 강물에 흘려보낼 만큼 괴롭다. 그녀의 유일한 낙은 유명 여배우 메이휴(줄리안 무어)의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는 것.

아버지에게 호되게 야단맞은 로즈는 오빠 월터가 보낸 자연사박물관 그림이 있는 생일 축하 엽서를 소중하게 간직한 채 마침 메이휴의 공연이 있는 뉴욕을 향해 떠난다. 박물관에 간 그녀는 소원을 빌기 위해 거대한 운석에 손을 댔다가 다른 사람이 놓은 동전을 훔친 것으로 오인한 경비원에게 쫓긴다.

1977년. 소년 벤(오크스 페글리)은 기억에 없는 아버지가 궁금해 엄마 일레인(미셜 윌리엄스)에게 묻지만 엄마는 ‘다음에’만 연발할 뿐이다. 갑자기 엄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벤은 유품 중 ‘원더스트럭’이란 책갈피에 있는 뉴욕 킨케이드 서점이 인쇄된 메모 한 장에서 아버지의 단서를 발견한다.

▲ 영화 <원더스트럭> 스틸 이미지

메모 속의 번호로 서점에 전화를 건다. 그런데 때마침 떨어진 번개에 귀를 심하게 다쳐 청력을 잃는다. 그는 병원에서 회복하자마자 수차례 대중교통을 갈아타며 결국 뉴욕에 도착하지만 서점은 이미 폐쇄된 지 꽤 된 듯하다. 그리고 망연자실한 채 흑인 소년 제이미와 살짝 접촉하게 된다.

제이미는 이 서점을 잘 알고 있는 듯 뭐라 떠들고 떠나지만 들릴 리 만무. 할 수 없이 그의 뒤를 쫓는다. 도착한 곳은 자연사박물관. 제이미는 여기 직원의 아들이기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고 심지어 위층의 빈 방 하나를 자신의 아지트로 만들어놓고 있었다. 그렇게 둘은 친구가 돼 그날 밤을 지새운다.

직원들의 서류를 뒤지던 벤은 익숙한 그림이 그려진 파일을 발견한다. 자주 꿈에 등장해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늑대를 비롯해 호숫가의 집을 본다. 그런데 그 집은 바로 엄마와 함께 살아온 자신의 집이었다. 이제 아버지를 찾을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든 그는 날이 밝자 이사 간 서점으로 향하는데.

벤과 로즈의 여정이 교차로 펼쳐지는 편집을 통해 스토리 속으로 빨아들이는 솜씨가 썩 괜찮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놓인 경제발전기에 살던 로즈의 분량은 음향효과를 더한 흑백 무성으로, 베트남전쟁이 끝난 지 2년 된 벤의 시대는 자유분방하면서도 왠지 피로하고 허망한 느낌의 컬러로 꾸몄다.

벤은 자신의 말을 남에게 들려줄 순 있지만 남의 말을 듣진 못한다. 로즈는 수화나 글이 아니면 소통이 안 된다. 의사와 감정을 서로 알고 전달하는 방식의 중요성을 말하고자 함이다. 멀쩡해 보이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사실 저마다의 장애는 조금씩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인식의 차이도 존재한다.

▲ 영화 <원더스트럭> 스틸 이미지

로즈를 도둑으로 오인하는 경비원과 벤이 떠날까 봐 서점이 이사 갔다는 정보를 주지 않은 제이미의 행위가 그렇다. 벤과 로즈는 의사표현 방식이 다수와 다르다. 그렇다면 다른 걸 인정해야 마땅한데 이단시 취급하는 이가 적지 않다. ‘다른’ 걸 ‘틀리다’고 표현하는 이가 많은 우리나라는 특히 심하다.

제이미는 벤의 청각장애를 잠시 잊고 그와 공감한답시고 스위트의 ‘Fox on the run’을 틀어놓고 흥겨워하다 이내 미안한 의사를 표시하지만 벤은 아무렇지 않게 포터블에 손을 대고 그 진동만으로도 음악을 즐길 수 있다고 안심시킨다. 바로 서로의 형편과 감정의 상태를 고려해줄 줄 아는 소통이고 배려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자본주의의 맹주가 되기 직전 성장기의 미국(로즈), 히피 문화와 반전운동 등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전쟁을 강행군했지만 결국 패전함에 따라 실리도 명분도 모두 잃은 직후의 미국(벤)이란 배경은 의미를 곱씹을 만하다. 과거의 낭만과 추억에 대한 그리움과 변혁의 동시 진행.

그래서 박물관은 매우 중요하다. 한 박물관엔 디오라마가, 또 다른 박물관엔 파노라마가 펼쳐져 있다. 두 이미지 모두 추억이란 키워드로 연결된다. 사람은 누구나 기억으로 잊지 못하는 추억을 회상하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일레인이 왜 벤에게 남편에 대해 속 시원히 얘기해주지 않는지 그 답이 있다.

▲ 영화 <원더스트럭> 스틸 이미지

스탠리 큐브릭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삽입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재활용은 모든 사물의 근본인 생(生)을 파악하고 이해하려면 합리적인 직관이나 체험에 의지해야 한다는 생철학의 니체가 아니라 주체적 존재로서의 실존이 최고라는 실존주의의 야스퍼스의 손을 들어준 것을 의미한다.

앞에 배치한 ‘폭풍의 딸’은 유성으로 바뀌기 직전의 마지막 무성영화로 설정됐다. 로즈와 벤의 시대는 모두 크나큰 변화의 시기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기존의 질서와 도덕관념을 허무는 사랑에 계급과 자본의 붕괴라는 외피를 둘렀다. 그렇게 사람도 세상도 디오라마에서 파노라마로 변한다는.

집시 소년이 상류사회에서 상처를 받고 떠나 부자가 돼 돌아와 복수하지만 결국 고통만 더 키운 채 죽는다는 이 소설 일부의 도입은 변화를 거부하는 기성세대와의 불통을 이겨내는 진보의 여정이다. 로즈가 과감하게 긴 머리를 쇼트커트 웨이브로 바꾸는 것도 같은 맥락. 115분. 전체 관람 가. 5월 3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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