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버닝>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예상됐던 현상이긴 하지만 제71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극찬을 받은 ‘버닝’(이창동 감독)이 국내 관객들에게 그만큼의 평가는 받지 못하는 분위기다. 호불호가 엇갈릴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균형이 안 맞으리라고는 예견하지 못했는데 깨졌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TV에 뉴스, 다큐멘터리, 드라마, 예능, 교양 등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방송사는 언론사로서 공정하고 신속하며 날카로운 보도 프로그램과 교양, 다큐멘터리 등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결국 회사를 먹여 살리는 효자는 드라마와 예능 등 오락이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같은 SF 판타지 대작이나, ‘데드풀2’ 같은 성인용 코미디 액션이나, ‘지금 만나러 갑니다’ 같은 따뜻하고 감동적인 가족 드라마나, ‘나쁜 남자’ 같은 자신은 즐겁지만 남은 불편한 드라마가 공존하듯 상업영화 반대편에 감독 및 전 관계자들이 예술정신으로 무장한 ‘버닝’도 있는 법이다.

만약 이 감독이 돈벌이가 목적이었다면 ‘버닝’보단 ‘초록물고기’ 같은 작품을 기획했을 것이다. ‘버닝’은 크게 보면 우리네 역사를, 좁게 함축하면 오늘의 젊은이들의 방황과 혼돈을 말하고자 하는 기색이 역력한데 불편하다는 관객은 돈 내고 2시간 동안 즐기고 싶었는데 엉뚱한 소리를 해대니까 그런 것이다.

이 영화는 관람 후 개인적인 사색이나 동반자와의 토론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즐겁게 즐기자는 것과는 애초부터 출발점이 다르다. 종수, 해미, 벤의 세 주인공은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젊은이다. 경기도 파주 고향 친구인 종수와 해미는 서울 변두리를 전전하는 전형적인 1인 가구 독립인인데 좀 다르다.

▲ 영화 <버닝> 스틸 이미지

번화가 개업 상점 앞에서 짙은 화장에 짧은 치마를 입고 춤을 추는 해미는 아직 꿈을 잃지 않고 있다. 결코 쉽지 않은 일로 모은 돈을 아프리카 여행에 쏟을 정도로 지적인 신분상승을 꾀한다. 이에 반해 택배 기사인 종수는 삶의 목적도, 희망도 잃은 채 자기계발 따윈 잊은 지 오래다.

반포 호화 빌라에 살며 포르셰를 타는 벤은 직업이 없는 ‘금수저 백수’다. 그가 아프리카에 간 건 해미와 달리 색다른 경험을 위해서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고생을 통해 빈자에게 ‘이거 봐, 우리도 고생할 줄 알아’라고 뻐기기 위해서 혹은 그들의 입장에 서는 ‘배우 놀이’다.

해미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어떻게든 거기서 탈출하거나, 혹은 극복하려 한다면 종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자포자기로 바꾸는 데 익숙해졌다. 어릴 때 가출했던 엄마가 뜬금없이 나타나 빚을 졌다고 하소연하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신 갚아주겠다는 착한 효성을 드러낸다.

그건 진짜 효심이 아니라 역설의 복수일 것이다. 가장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채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는 아버지를 대신해 엄마에게 사과하는 동시에 자식을 버린 엄마가 고마움과 동시에 죄책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괴로움을 안기려는 심리다. 그래서 그가 집착하는 지점은 오로지 해미다.

자신과 쉽게 잠자리를 하지만 곧 아프리카에서 처음 본 벤과 눈이 맞은 해미를 사랑한다. 대마초에 취해 자신과 벤 앞에서 스스로 옷을 벗고 춤을 추는 해미에게 “천박한 여자나 하는 짓”이라고 일갈하는 건 그만큼 그녀를 소중하게 여기는 동시에 정신이 올바로 성장하기도 전에 벌써 ‘꼰대’가 됐기 때문이다.

▲ 영화 <버닝> 스틸 이미지

벤은 항상 온화한 미소를 띠지만 결코 타인을 기분 좋게 만드는 수준도, 불편하게 느낄 만큼도 아니다. 매사에 무관심하거나 초월한 듯 보이는 표정과도 일맥상통한다. 종수는 소설가 지망생인데 오히려 벤이 소설 혹은 철학 같은 대사를 구사하며 알 듯 모를 듯한 여운을 남긴다.

그건 ‘흙수저’들이 변혁을 위해 아무리 발악해도 ‘금수저’들이 마치 부처님과 손오공처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본다는 의미다. 굳이 구구절절 하소연을 하지 않아도 부자는 빈자들의 사정과 희망을 다 알고 있고, 결코 부자와 빈자의 위치가 뒤바뀌거나 최소한 평등해지지 않을 것도 알고 있다는 의미다.

해미의 실종으로 애간장이 타는 종수가 고작 하는 일이라곤 벤을 스토킹하는 것과 해미의 침대 위에서 자위행위를 하는 것이다. 몰래 벤의 뒤를 쫓지만 번번이 그 행위가 드러나자 자신의 무기력감에 기껏 분노를 드러내는 데가 ‘갑질’을 하는 택배회사 면접관 앞일 따름이다.

우리 민족은 장구한 세월 동안 외세의 침략을 받았고, 일제 강점기까지 거쳤다. 그러나 해방 후 들어선 독재정권에 의해 민주주의를 누리지 못한 채 박정희-전두환 등의 군사독재정권을 거치며 반공 이데올로기와 한민족 의식 고취 등에 세뇌돼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한 채 착각 속에 살았다.

1990년대 개인주의가 팽배하는 가운데 그 어려운 민주화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지만 정치 이데올로기에 흡수돼 과거에 대한 망령이 되살아난 집단과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집단 사이에서 이기주의의 이념을 매개로 한 충돌이 거세진 게 현실이다. 그래서 관념과 믿음의 충돌이 분노를 낳았다.

▲ 영화 <버닝> 스틸 이미지

구세대는 ‘어르신’ 말에 복종하지 않는 신세대에, 신세대는 자유 평등 인권 등의 파괴로 인한 정체성의 혼란으로 분노한다. 억눌림에 대해 구세대는 기득권자에 복종하면서 다른 지점에 선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신세대 다수는 투표조차 외면할 정도로 분노에 소극적이다. 구세대는 이른 새벽 줄을 서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의 순기능을 긍정적으로 봤지만 후기 스토아학파의 세네카는 무조건 부정했으며, 에피쿠로스학파의 필로데모스는 긍정적인 ‘자연적 분노’와 영혼의 질병인 ‘헛된 분노’로 분류했다. ‘버닝’에서 이 감독은 절대 세네카는 아니다. 은근히 아리스토텔레스 쪽이다.

스피노자는 렌즈 세공으로 번 돈으로 학문에 열중하느라 가난했고 건강도 나빴다. 이에 엄청난 갑부 시몬 드 브리스가 전 재산 상속 등 거액의 후원을 제안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브리스의 부는 사회구조적 착취의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걸 공유하는 것 역시 착취라고 봤다.

종수는 벤에게서 파스타와 와인을 얻어먹고, 대마초를 얻어 피우는 등 상류사회의 ‘특혜’를 일부 지원받지만 이내 홀로서기에 나선다. 스피노자는 목숨을 내걸고 친구의 부당한 죽음에 분노했다. 이 감독은 부조리와 부당에 대해 분노하거나 하지 못하는 젊은이를 그리고자 했다. 볼지 말지 선택의 열쇠다.

설정, 캐릭터, 플롯 등 영화의 내용에 대해선 불편하다는 반응이 있는 반면 미장센 등의 그림과 특히 음악에 대한 찬사는 줄을 잇는다. 저음의 현악기를 이용한 긴장감과 불안감의 조성은 최고의 음향효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음악이 미스터리의 절반을 완성했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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