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박수룡 원장의 부부가족이야기] 저는 아들 둘을 두고 있습니다만, 사실 저도 처음부터 아이를 낳아서 키울 구체적인 결심이나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도 아니고, 그저 남들이 모두 그렇게 살고 있으니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많은 것들이 대부분 계획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서,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는 미처 몰랐던 의미를 나중에 발견하게 되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도 그렇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저에게 아이들이 태어났던 당시에는 그 일이 제 인생에 어떤 의미가 될지 짐작도 하지 못했지만, 이제 와 돌아보면 참으로 놀랍고 깊은 경험이 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전에는 저 자신도 잘 몰랐던 부족한 점들을 깨닫게 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서로 싸우면 저는 두 아이에게 똑같은 벌을 주곤 했습니다. 제 아내는 작은 아이는 아직 어린데 똑같이 대하는 건 옳지 않다고 했지만, 저는 벌을 다르게 주는 것은 편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제 고집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돌이켜 지금 생각하면 두 아이에게 벌을 줄 때 나이 차이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를 몰라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 뿐 아니었습니다. 저는 벌을 준 뒤에 아이들에게서 반드시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그러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을 듣고서야 벌을 마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큰 아이는 눈치껏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작은 아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눈치가 없는 건지, 고집이 센 건지, 말이 늦은 건지 여하간 잘못을 비는 이야기를 통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형보다 오히려 더 오래 혼나기가 일쑤였습니다. 나중에 타일러보기도 하고 제 엄마를 시켜서 용서를 비는 말을 연습시켜도 작은 아이는 좀처럼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저는 이제 와서 원칙을 바꾸거나 다르게 적용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고, 애들 엄마는 그것을 또 못마땅해 했습니다. 저 역시 아이들에게 벌을 주고 기분이 좋을 리 없으니 조금씩 아이들 일에 나서지 않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그만큼 아이들과 점점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저지른 잘못을 한참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즉 어른들처럼 아이들마다 각자 다른 특성이 있는데 제가 그런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작은 아이가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이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거나 고집부리는 것이 아니라, 비록 잘못했다고 느끼더라도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점을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게다가 제가 일방적으로 정한 원칙을 한참 어린 작은 애에게 고집한 것은 더 큰 잘못이었습니다. 혼을 내더라도 아이들 각자의 수준에 맞게 했어야 하는데, 저는 대단치도 않은 저만의 원칙을 고집하려고만 했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소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그때 이런 점들을 알았더라면 작은 애에게는 “잘못했지? 이제 그러지 않을 거지?”하고 친절하게 묻고 아이의 반응을 봐서 벌을 멈출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명색이 아버지이고 나름 배운 것도 많은 저였지만, 부끄럽게도 그런 기본적인 의사소통 원리조차 지키지 않은 채 제 고집만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설마 이런 잘못을 아이들 키울 때에만 저질렀겠습니까?
저는 이 경험을 곱씹어 보면서, 그 동안 상대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일들이 저의 편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는 점과 또 설령 상대에게 잘못이 있는 경우에도 제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반드시 관계를 나쁘게 만들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이런 점들을 미리 알았더라면 제 아이들과도 훨씬 더 친하게 지냈을 것이고, 불편하게 끝나고 말았던 많은 인간관계들에서 좀 더 잘 처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제가 이제는 이런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되었을까요? 아니지요. 아직도 잘 모르는 저의 결점들이 있을 테니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르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적어도 이전처럼 제가 가진 원칙이 옳다고 믿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제 기준에서 함부로 평가하는 실수는 저지르지 않으려 노력하는 정도입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겠지만, 제가 이 정도나마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저에게 아이들이 있어서 그들을 키울 수 있었던 덕분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다른 인간관계에서도 얼마든지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계기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배우자나 자녀들만큼 우리를 깊이 고민하고 갈등하게 만드는 관계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이들은 우리에게 행복한 경험을 하게 하는 것으로 우리를 살 맛 나게 해주고, 우리에게 쓰라린 체험을 하게 하는 것으로 우리를 보다 성숙하게 이끌어 줍니다. 만약 당신이 아이를 낳을지 말지 고민한다면, 저는 당신에게 아이가 아니라 오히려 당신 자신이 어떤 부모가 되고 또 어떤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지를 고민하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물론 자녀를 키운다는 것은 결코 쉽거나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이 아이 양육에 드는 수고와 책임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라면, 당신이 아이에게 해 주어야 할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소중한 것을 오히려 당신이 아이에게서 받게 될 수도 있다는 말도 해주고 싶습니다. 적어도 당신이 아이를 당신의 소유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인격체로 존중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아니 당신의 아이들은 당신이 이런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계기까지도 만들어 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으로 부모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함께 살아가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부모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특히 경쟁이 치열한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이 정말 힘든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다른 곳에서는 얻을 수 없는 이런 소중한 기회를 너무 간단히 포기하지 말기를 당부합니다.

▲ 박수룡 라온부부가족상담센터 원장

[박수룡 원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과 전문의 수료
미국 샌프란시스코 VAMC 부부가족 치료과정 연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겸임교수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현) 부부가족상담센터 라온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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