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개들의 섬>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색감과 미장센의 대가 웨스 앤더슨은 ‘문라이즈 킹덤’에서 외로움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낭만적 과거에 대한 향수를 각각 노래했다면 이번엔 ‘개들의 섬’에서 개를 매개로 강력한 사회적 비판에 날을 세운다. 게다가 그 배경이 일본이라는 점에서 세기말적 디스토피아의 예감에 전율케 만든다.

11세기부터 고바야시족이 다스린 일본 열도 메가사키의 고바야시 시장은 먼 친척인 12살 고아 아타리를 양자로 삼았다. 개체 수가 엄청 는 개에게 인간에게 치명적인 독감이 만연함으로써 시민의 개 혐오증이 극에 달하자 고바야시는 개들을 고립된 쓰레기 섬으로 추방하는 극단의 조치를 취한다.

이를 시민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아타리의 경호견 스파츠를 먼저 추방하는 솔선수범을 보인다. 쓰레기 섬에는 ‘나는 문다’가 캐치프레이즈인 떠돌이 개 치프를 비롯해 예전에 안락한 생활을 했던 렉스, 보스, 킹, 듀크 등 5마리 친구들이 산다. 그들은 들개 무리가 동료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을 듣는다.

6개월 뒤. 그들 앞에 경비행기 하나가 추락한다. 문을 열고 나와 쓰러진 인물은 스파츠를 찾아온 아타리. 그들은 아타리를 먹을까, 말까 갑론을박하지만 그가 깨어나자 스파츠를 찾는 일에 도움을 주기로 뜻을 모은다. 그 사이에 고바야시의 정치적 라이벌 와타나베 교수는 개 독감 치료제를 완성한다.

▲ 영화 <개들의 섬> 스틸 이미지

그러나 고바야시는 이를 은폐하고 부하들을 이용해 와타나베를 독살한 뒤 자살로 위장한다. 고등학교 신문 히로시 편집장은 와타나베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미국에서 온 유학생 트레이시는 이를 취재하기 위해 와타나베의 조수 오노 요코를 만나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 뒤 고바야시의 음모를 확인한다.

고바야시는 5마리의 개가 아타리를 유괴했다고 언론을 조작하고 여론을 움직인 끝에 2선에 성공한 뒤 취임식 날 고추냉이 독으로 쓰레기 섬의 개들을 몰살함으로써 개들의 포화상태라는 위기를 종식시키겠다고 선언한다. 스파츠는 살아있는 것일까? 다섯 친구와 아타리는 살아남을 것인가?

‘상상력의 천재’, ‘잔혹동화의 대부’는 앤더슨이 등장한 순간 더 이상 팀 버튼에 머물지 않는다는 걸 입증이라도 하듯 ‘유령신부’의 물신화 혹은 물상화를 잇는다. 그걸 비꼬는 장소가 일본이라는 점에선 특히 대한민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의 고추장 같은 고추냉이를 독으로 설정한 데서 가장 두드러진다.

나치의 제국주의를 따라갔다 패망했지만 기사회생해 경제대국으로 거듭났던 일본은 화폐의 물신화와 인간의 물상화로 대표됐었다. 사시미와 스시를 전 세계에 퍼뜨린 일본이지만 지금은 방사선 오염 때문에 특히 한국인에겐 그곳의 해산물은 금기 식품이다. 물신화의 대표적인 폐해라 할 수 있다.

▲ 영화 <개들의 섬> 스틸 이미지

겉으로 드러난 건 개 혐오증이지만 실제 개를 혐오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데서 그게 은유라는 걸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다. 영화가 주목하는 곳은 자연, 사랑, 우정이다. 개는 친구이자 프롤레타리아다. 자신의 친구이자 국민을 희생양 삼아 이권을 챙기고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정치권에 대한 선전포고다.

쓰레기 섬은 예전엔 아름다웠을 곳이지만 인간의 이기심이 낳은 지나친 산업화, 과학화의 열기로 인해 발생한 각종 폐자원 등 쓰레기들로 가득찬 탓에 생명이 살기 힘든 죽은 땅이다. 그 자본주의의 극대화에 밀려난 프롤레타리아들이 추방돼 살지만 그들이 그곳에서 자유와 평등을 일군다는 역설.

일본인이니 당연히 일본어를 사용하겠지만 다른 동물과 달리 개만 영어를 구사한다는 설정은 통쾌할 정도다. 일본의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트레이시를 가리켜 “우리를 분열시키려 외국에서 보낸 사람”이라는 고바야시의 선동은 극우주의와 제노포비아(이방인 혐오 현상)에 대한 폭로.

암캐의 “이런 세상에서 새끼 낳기 싫어”라는 대사와 개들을 잡기 위해 로봇 개를 양산하는 내용은 황폐한 현대사회를 꼬집는 것. 과학화와 편리화란 명목 아래 인간의 정서를 자본으로 잠식해가는 데 열을 올리는 일본에 대한 비아냥거림이다. 시장의 수입이 일급비밀이라는 대사는 정치권을 통렬하게 때린다.

▲ 영화 <개들의 섬> 스틸 이미지

쓰레기 섬이란 배경은 이름에 걸맞게 황량하고 지저분하면서도 아름답다는 아이러니. 왜 앤더슨인지 다시 한 번 입증한다. 특히 와타나베를 독살할 초밥을 만들기 위해 셰프가 회를 뜨는 장면은 단연 최고의 비주얼을 자랑한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서 이런 비주얼은 당분간 쉽지 않을 듯하다.

영화 전편에 흐르는 일본 특유의 전통문화양식과 도슈샤이 샤라쿠 스타일의 그림은 한국인에겐 다소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사는 게 전쟁”이란 대사처럼 이런 설정 역시 전쟁의 하나라고 보면 의미를 찾을 순 있다. 일본인이 유독 애착하는 고양이를 개의 대척점에 세움으로써 비웃음은 계속된다.

영화에서 올빼미는 개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주는 한편 꽤 심오한 이미지로 각인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암살을 소재로 한 시바 료타로의 소설이자 후에 영화화된 ‘올빼미의 성’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한 듯하다. 이 영화의 검은 올빼미는 ‘올빼미의 성’을 이끄는 검은 옷을 입은 닌자를 의미한다.

고바야시가 결국 변하는 것은 조금은 일본을 의식한 듯하다. 마지막에 스파츠가 헌신으로 판세를 뒤집고 아타리가 시를 읊는 동화적 설정으로 매조지는 것도. 트레이시의 주근깨 하나까지 기울인 비주얼의 정성과 완성도에 교훈까지 걸작이란 평가가 아깝지 않다. 101분. 12살 이상 관람 가. 6월 21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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