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연재를 시작하면서

장강(長江)은 뒷물이 앞물을 세차게 밀치며 도도히 흐른다. ‘삼국지’의 첫대목에 나온다. 새 시대가 구시대를 밀쳐낸다는 역사의 강을 뜻하는 것일 게다. 술잔에 먹구름이 드리우면서 ‘오호통재!’라 외마디를 읊으며 새로운 바람에 의해 스러져가는 역사의 그림자를 말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도 이 말에 크게 다름이 없다. 격동의 바람이 세차게 불기도 했고 격랑의 파고가 연이어 생겨나곤 했다. 그 속에 많은 인물들이 동분서주 우왕좌왕 뛰어들었고 홀연히 사라지면서 부질없는 역사의 명멸을 보여줬다. 우리 현대사의 격동기를 얼핏 꿰보면 8.15광복 이후 한국전쟁-4.19-5.16-3공화국-10.26-12.12-5.18-5공화국 등으로 이어진다. 이런 역사의 흐름에 주연과 조연은 대부분 군인이었고 그들에 의해 물줄기가 크게 달라지곤 했다.

이 연재물은 그동안 상세하게 알려지지 못한 현대사의 비화, 시간이 지나면 잊혀져버릴 그런 숨은 이야기를 다루려고 한데서 비롯됐다. 역사의 현장을 직접 목격했거나 중심에 서 있었던 군장성들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했다. 물론 그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알려진 내용도 있지만 가급적 피상적인 것보다 역사 현장에 있었던 군장성들의 입을 빌어 보다 깊숙이 사건의 비화 중심으로 엮어봤다. 인터뷰에 응했던 군장성들은 지금 대부분 작고했으며 인물 위주의 이야기는 1998년 필자가 쓴 ‘장군의 비망록’이라는 책을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따라서 이번에 연재하는 내용은 인터뷰 당시 ‘못다 쓴 이야기’를 사건 위주로 재구성했다. 묻힐 뻔한 역사의 페이지를 넘겨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연재에 등장하는 주요 예비역장성들

-김희덕 장군:예비역 중장으로 육사2기 출신. 5.16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외무, 국방장관 등 요직을 두루 거쳤고 박정희 대통령 집권을 위한 극비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등 많은 비화를 간직하고 있다.

-채명신 장군:초대 주월한국군사령관으로 베트남전의 영웅으로 꼽힌다. 5공화국때까지 묻혀 있던 백골병단 창설사령관을 지냈다. 한때 대권주자로 지목받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2013년 작고할 때 현충원 사병의 묘에 묻혀달라고 해 많은 감동을 주었다.

-이건영 장군:육사7 출신으로 12.12때 3군사령관을 맡아 자신의 부하끼리 적과 아군이 되어 싸우는 광경을 목격했다.

-김영선 장군: 육사7기 출신으로 10.26사건 재판장을 맡아 이와 관련된 많은 비화를 간직하고 있다.

-이범준 장군:육사8기 출신으로 한국전쟁, 베트남전 참전, 12.12때 국방부 총격전을 직접 목격한 역사의 한 증인으로 알려져 있다.

-전성각 장군:청와대와 야전에서 ‘별들의 전쟁’을 직접 목격한 육사8기 출신이다. 10.26과 12.12때의 상황을 지근거리에서 겪었다.

-김윤호 장군:육사10기 출신으로 보기 드문 ‘미국통’이다. 12.12때 신군부의 대미(對美)창구 역할을 했다.

-이상훈 장군:육사11기 중 비하나회 출신으로 4성 장성과 국방부장관까지 지냈다.

-이기백 장군:전두환, 노태우 등과 육사 동기로 ‘아웅산폭탄테러’에서 살아남은 불사조로 알려져 있다.

-박희도 장군:육사12기 출신으로 12.12때 합수부에 가담하여 특전사 예하 1공수여단 병력을 이끌었다. 판문점 도끼만행 보복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유학성 장군: 신군부의 원로로서 안기부장 재직중 88올림필 유치작전의 성공과 북방외교의 초석을 다졌다.

-우종림 장군:10.26 사건을 청와대 경호실에서 생생하게 목격한 비육사 출신으로 육군에 태권도 붐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김종곤 제독: 첫 해사생도 출신으로 급변하는 한국 현대사를 지켜본 해군의 산 역사로 알려져 있다.

-옥만호 장군:영화 ‘빨간 마후라’의 실제 주인공으로 한국 공군역사의 산증인으로 꼽힌다. 실미도 사건에 대해 여러 가지 비화를 갖고 있다.

1. 5.16 군사쿠데타

암호명 ‘부모가 위독하다’

-전성각 장군의 증언에 의해 재구성된 당시의 상황이다.

5.16거사 한달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1961년 4월 육군대학 동료들과 함께 한강을 배경으로 한 모의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왔다. 이 때 전 장군은 6관구사령부(현재 수도군단)에 근무하고 있는 친구들과 저녁 술자리를 하게 됐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게 되자 6관구 참모 중 한 사람인 K중령이 “조금 있으면 혁명이 일어날 것이오.”라고 불쑥 말을 꺼냈다. 그러면서 준비가 거의 다 됐으니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전 장군이 물었다.

“누가 중심이오?”

“박정희 소장이오.”

잠자코 생각하던 전 장군이 말했다.

“박정희 소장은 장교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분이오. 아마 그 분 같으면 여러 사람이 따를 것이오. 그런데 육참총장 하고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거요?”

K중령이 말했다.

“총장하고는 현재 대화 중에 있습니다. 아마 동의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K중령은 거사의 D데이가 이미 카운트다운이 됐음을 귀띔했다. 그리고 부대로 돌아가면 다른 장교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잘 설명해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부모가 위독하다’라는 전보가 도착하면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과 함께 상경해달라는 극비의 언약을 하기도 했다. 둘은 이런 엄청난 얘기를 주고 받으며 거나하게 술을 마셨다. 취기가 어느 정도 오르자 K중령이 말했다.

“지금 박정희 장군이 신설동 자택에 계시니 지금 나하고 같이 갑시다.”

전 장군은 약간 당황했지만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판단하고 기꺼이 승낙했다. 혁명 주체세력으로 가담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웬일일까. 신설동으로 가기 위해 새나라 택시를 막 잡으려는 순간 차 유리가 깨져버렸다. 술에 취해 실수로 그런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둘은 할 수 없이 오늘은 이만 헤어지자며 신설동 행을 포기했다.

며칠 뒤 전 장군은 부대로 복귀했고 동료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줬다. 대부분의 동료들도 혁명에 동의하고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K중령이 귀띔한 혁명거사일(4월19일)이 지났고 5월초가 되어도 아무런 연락이 없자 전 장군은 ‘서울에 꽃도 많이 피었을텐데 어떻게 꽃소식도 없느냐’는 내용으로 K중령에게 전보를 쳤다. 그러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수일 뒤인 5월16일 새벽 육군대학 관사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육대동료인 박원빈 중령이 달려와 깨우면서 라디오를 들어보라고 했다. 엉겁결에 라디오를 틀자 혁명에 성공했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전 장군은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하면서 육사 동료 8기생들과 함께 앞으로 전개될 정국에 대해 나름대로 전망을 해봤다.

며칠 뒤 서울에서 전 장군에게 급히 연락이 왔다. 내용은 최고회의에서 일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울행을 포기했다. 자신의 목표인 군사령관을 못할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청와대 경호실차장으로 잠시 근무하게 된다.

당시 5.16쿠데타의 암호는 ‘부모님이 위독하다’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최고회의 외무·국방위원장시절의 김희덕 장군(왼쪽에서 세번째), 박정희(朴正熙)의장 오른쪽에 이주일(李周一), 박원석(朴元錫)장군 등이 서 있다.

“혁명이 필요할 것 같소”
-김희덕 장군의 증언이다.

김희덕 장군과 박정희 장군이 5.16 직전에 육본 군수참모부장과 육본 작전참모부장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5.16이 일어나기 며칠 전이었다. 점심식사 후 박정희 장군이 김 장군을 불렀다. 자신의 집무실에서 커피나 한 잔 하자는 것이었다. 둘은 차를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시국에 관한 얘기를 주고 받았다. 박 장군이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가만히 듣던 김 장군이 “어떤 복안을 가지고 있소?”라고 물었다.

“혁명이 필요할 것 같소.”
“혁명이라고 했소?”
“그렇소. 혁명을 해야 하오.”

박 장군은 거사일을 5월16일로 정했다고 하면서 혁명에 참가할 사람을 적은 쪽지를 김 장군에게 내밀었다. 명단을 들여다보니 육사8기생들이 주축이었다. 그 명단에는 평소 탐탁지 않게 여기던 인물들도 다수 끼여 있었다.

“박 장군, 군에도 청렴하고 유능한 인재들이 많은데 왜 그들에게 부탁하지 않았습니까.”

“좋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선뜻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김 장군은 내심 걱정이 됐다. 박 장군은 자신에게 5.16에 동참해달라는 무언의 부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고민하던 김 장군은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기로 했다.

“나는 이번에 빠지겠습니다. 그러나 거행하세요. 꼭 성공합니다. 왜냐 하면 지금 무법천지가 되어 학생들이 직접 나서서 남북통일 문제를 판문점에서 담판을 짓겠다고 소란을 떨고 있으며 정치권에서는 수권정당인 신민당이 갈라져 시시비비하고 있고 장면 총리는 매일같이 데모에 시달려 이리저리 도망만 일삼아 국가의 운명이 백천간두에 있습니다. 군이 이것을 수습하는 것은 국민적 공감대입니다. 백정은 소만잡게 하고 요리는 요리사가 하도록 해야 합니다. 잘 되어가는 분위기일 때는 다들 따라오지만 불리하게 되면 의리를 지켜주지 않습니다. 내 과거 경험으로 보아 기필코 그럴 때가 올 터이니 그 때 내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의 말 대로 5.16거사는 성공했다. 이로부터 약 2년 뒤인 1963년 2월16일 박 의장은 민정 불참을 밝히고 열흘 뒤 이를 공식화 했다. 이 과정에서 최고위원들끼리 지리멸렬 흩어지는 분위기가 불거져 나왔는데 혁명주체 세력들 사이에 반목과 알력이 심화됐던 것이다. 당시 최고회의 내부 갈등은 1962년 말 사전 조직화된 공화당의 모습이 드러나면서 시작됐다. 일부 위원들이 주동이 되어 극비리에 공화당을 사전 조직화한 것에 대해 배신감과 소외감을 느낀 다른 위원들이 반발하고 나섰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갈등은 일부 주체세력들이 ‘오월동지회’를 결성, 범국민정당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준비를 갖추기 시작하는 계기가 됐고 또한 다른 일부 세력에 의한 이른바 반혁명음모사건이 적발되는 등 혼미를 거듭했다. 그러자 박정희 의장은 비장한 결심으로 최고회의를 전격 개편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김희덕 장군은 최고회의 외무,국방위원장으로 발탁된다. 5.16 거사 직전 약속했던 내용, 즉 ‘어려울 때 부르면 언제라도 돕겠다’는 말을 상기시키며 기꺼이 수락했다. 그러니까 그해 2월21일자로 김희덕 장군은 강기천(해병, 법사위원장), 김용순(육군,내무위원장), 박두선(공군, 교체위원장) 등과 함께 최고위원 대열에 합류했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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