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마녀>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악마를 보았다’(김지운 감독)와 ‘부당거래’(류승완 감독)의 시나리오를 쓴 뒤 ‘혈투’(2010)로 감독 데뷔를 했으나 약간의 아쉬움을 줬던 박훈정 감독은 2년 뒤 ‘신세계’로 한국 누아르의 신세계를 열며 수많은 관객들을 열광시킨 바 있다. 하지만 ‘대호’ ‘브이아이피’로 다시금 아쉬움을 곱씹어야 했다.

그래도 관객들은 그에 대한 기대치를 내려놓지 않고 있다. 6월 27일 개봉될 ‘마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꽤 큰 게 증거다. 눈치 빠른 관객들은 금세 알겠지만 박 감독은 악마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대놓고 악마를 제목에 넣은 ‘악마를 보았다’가 대표적이고, ‘마녀’는 보다 더 큰 버라이어티가 예상된다.

‘악마를 보았다’는 아무 이유 없이 무차별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경철과 그에게 약혼녀를 잃은 수현이 대결하는 전형적인 선과 악의 갈등 구조다. 경철보다 약한 악마(택시강도)가 있고 경철보다 더 악마성이 강한 친구도 있다. 경철에 대한 복수심에 불탄 수현은 어느덧 그들보다 더한 악마가 돼간다.

‘부당거래’와 ‘혈투’는 악마까지는 아니지만 이기적인 인물투성이다. 작가 박훈정은 두 작품을 통해 두 얼굴의 공권력을 비꼬는가 하면 정치권을 비웃으며 중립과 정의를 웅변한다. ‘신세계’는 역시 그의 대표작임이 틀림없다. 경찰 강 과장, 부하 자성, 기업형 폭력조직 골드문의 이인자 청이 주인공.

▲ 영화 <마녀> 스틸 이미지

오래전 자성은 강의 명령으로 골드문에 위장 잠입해 청의 오른팔이 됐다. 자성은 하루빨리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강은 계속 약속을 어겨가며 임무 기간을 늘리고 있다. 누군가에 의한 음모로 골드문 회장이 타살되자 청과 라이벌 중구를 비롯한 ‘대권주자’들의 이전투구가 격렬해진다.

이 작품은 ‘악마를 보았다’와 유사한 인물 구도를 보인다. 제일 야비하지만 낭만을 아는 건달 청과 중구는 경철의 친구, 겉으론 경찰 간부지만 골드문에 목적 없는 집착을 갖는 강은 경철, 악마를 잡기 위해 악마의 소굴로 들어간 자성은 수현이다. 강은 “깡패들과 어울리더니 깡패 다 됐네”라고 말한다.

청과 중구가 서로의 부하들에게 각각 죽임을 당한다. 돈도 명예도 다 필요 없다는 강은 자신의 부하인 자성마저 희생시키며 오직 내면의 악마 같은 집착만 불태우는 데 몰두하고, 자성은 결국 경찰이란 즉자적 존재를 되찾을 수 없게 되자 자신을 골드문과 추상화함으로써 대상화하는 데 성공한다.

그렇게 대자화한 그는 골드문 경영권 다툼에 뛰어드는 고립된 존재화(즉자)로부터 객체화하는 것. 악마를 잡으려던 자가 악마가 된다! ‘브이아이피’도 얼핏 유사하다. 국가정보원과 CIA의 기획으로 월남한 북측 VIP 광일은 북측에서 무고한 생명을 무참하게 살해한 사이코패스다.

▲ 영화 <신세계> 스틸 이미지

남측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벌어지자 경찰 이도는 광일이 범인임을 직감하고 증거를 찾아 그를 검거하지만 국정원 요원 재혁이 그를 비호하고 나선다. 그렇게 자꾸 피해자가 발생하는 가운데 오직 나라(대통령)를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재혁은 가치관에 혼란이 오고 정체성이 변해간다. 악마로.

‘대호’는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차별화되긴 하지만 사극 혹은 판타지에 대해선 고민이 필요할 듯하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인 지리산의 산군 대호를 잡으려는 일본군이 악마의 선봉에 서고 늙은 포수 만덕이 이를 저지하려 하지만 젊은 포수 구경이 일본군 못지않은 악마가 된다는 얘기다.

대호는 단순한 토테미즘, 애니미즘 등을 뛰어넘는 토속신앙의 정서와 판타지의 세계를 그렸다는 점에선 높이 봐줄 만하다. 대호는 일본에 복속된 한민족의 마지막 성지이자 정신이다. 주민들이 산군으로 떠받든 게 미신이자 상징성을 뛰어넘는 역사와 민족정기에 있다는 메타포는 내내 여운을 남긴다.

아직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마녀’는 줄거리 일부만 알려졌다. 여고생 지윤은 10년 전 의문의 사고가 일어난 특별 시설에서 홀로 탈출한 후 모든 기억을 잃고 어느 노부부의 보살핌 속에 밝게 자랐다. 어려운 집안 사정을 돕기 위해 상금이 걸린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녀에게 의문의 인물들이 나타난다.

▲ 영화 <악마를 보았다> 스틸 이미지

조폭보다 더 서늘한 그들과 더불어 귀공자, 닥터 백, 미스터 최라는 미스터리하면서도 엄청난 살기가 느껴지는 인물들이 자신을 잘 아는 듯 말하고 행동한다. 그렇게 서서히 기억을 되찾아가며 지윤은 자신이 살인병기였음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이다. 과연 마녀는 누구이며 어떤 의미일까?

언더 커버를 소재로 한 누아르는 ‘무간도’부터 ‘불한당’까지 꽤 차고 넘친다. 사이코패스를 다룬 서스펜스 스릴러 역시 ‘양들의 침묵’ 이후 엄청나게 쏟아졌다. ‘마녀’ 역시 소녀가 액션 전사로 나오는 할리우드의 ‘한나’와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 액션 ‘악녀’가 동시에 연상되는 핸디캡은 지닌다.

박 감독의 기존 작품들에서도 했을 법한 고민이 이번에도 예외 없었을 것이 확실시되는 이유다. 더 이상 완벽하게 새로울 게 없는 게 영화계의 엄연한 현실임을 감안할 때 주목을 받는 지점은 과연 ‘악마’와 ‘마녀’를 어떻게 차별화할 것인가에 있을 것이다. 물론 깊은 철학과 웅장한 울림의 메시지도 필수.

그의 ‘악마론’엔 종교, 신화, 철학 등이 담겨있다. 영화 ‘콘스탄틴’은 타락천사 루시퍼를 퇴마사 콘스탄틴을 지옥에 데려가려 안달 난 인물로, 수태고지 천사 가브리엘을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인물로 각각 그린다. 박 감독은 과대망상, 자기애, PTSD 등 후천적 요인이 사람을 악마로 만든다고 보는 듯하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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