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마녀>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엑스맨’ 시리즈의 스핀 오프라는 ‘엑스맨: 뉴 뮤턴트’는 아직 베일을 벗지 않아 그 내용과 완성도 등에 있어 판단이나 비교가 불가능하지만 SF 공포라는 장르에 비춰볼 때 박훈정 감독의 신작 ‘마녀’는 감히 그것의 한국 버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탄탄한 완성도와 재미를 동시에 갖췄다.

10년 전. 한 비밀 기관에서 8살 소녀가 탈출한다. 수뇌급으로 보이는 닥터 백(조민수)과 미스터 최(박희순)는 ‘상부’에서 이 사실을 알 경우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한다. 최는 소녀를 계속 추적하기로, 백은 상부에 소녀를 잡아 문제를 잘 해결했다고 거짓말을 하기로 각각 임무를 분담한다.

현재. 충남 광천하고도 외진 곳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늙은 구 씨 부부는 미국에 살다 아들과 손자를 잃은 뒤 이곳에 와 정착했고, 10년 전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있던 소녀를 구해준 뒤 입양해 자윤(김다미)이란 이름을 붙여 키웠다. 구 씨의 경제사정이 악화된 데다 아내의 치매 증상이 심해졌다.

부모를 돕고 싶은 자윤에게 친구 명희(고민시)가 큰 상금이 걸린 TV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할 것을 권유한다. 노래 실력이 출중한 자윤은 충남 예선을 당당히 통과한 뒤 본선 참가 차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그런데 앞에 앉은 처음 본 귀공자(최우식)가 아는 체를 해 기분이 상한다.

▲ 영화 <마녀> 스틸 이미지

백과 최는 TV에서 자윤을 보더니 “이제야 찾았다"라며 각자의 부하들을 풀어 자윤에게 접근한다. 그러나 자윤은 구 씨에게 발견될 당시 큰 외상으로 모든 기억을 잃었었기에 그들을 알 리 없다. 그러던 어느 날 귀공자가 자윤에게 부모를 해코지할 것을 암시하자 다급해진 그녀는 집을 향해 내달리는데.

해외 언론 및 영화계의 극찬과 이에 따른 판매 등의 뉴스와 소문은 사실이었다. ‘신세계’의 성공 뒤 ‘대호’와 ‘브이아이피’로 잇달아 자존심이 상한 감독은 이번엔 독하게 마음먹은 듯 심오한 철학의 깊이를 더한 내용과 더불어 기존 액션물을 뛰어넘는 창의적으로 스타일리시한 액션을 뽑아냈다.

감독은 ‘프랑켄슈타인’에서 출발해 인간의 본성을 다루고자 했다고 덤덤하게 연출 의도를 밝혔지만 그리 간단명료한 메시지가 아닌, 복잡한 인간의 심리와 본성과 인생의 철학을 담고 있다. 먼저 정체성이다. 초반 자윤이 트럭을 몰고 달릴 때 현철의 ‘사랑의 이름표’가 흘러나온다.

귀공자는 자윤에게 “이름이 다 생겼네”라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말을 ‘발성화된 언어의 실존론적 본질’으로, 언어를 ‘발성화를 지시하기 위한 용어적 표현’으로 규정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정체성을 갖게 되는 ‘세계-내-존재’다. 한 인격체로서 일정한 의미를 갖는 인식의 대상이 되는 대상화다.

▲ 영화 <마녀> 스틸 이미지

누가 언어를 통해 이름이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그 주인공은 즉자이자 대자가 되고 즉자대자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윤과 귀공자는 기밀 시설에서 ‘사육’될 때 즉자도 대자도 아닌 소모품에 불과했다. 영화는 교묘하게 국가와 권력이 국민을 소비하는 방법을 우회적으로 비꼰다.

부제가 ‘Subversion’이다. 즉 체제 전복을 의미한다. 백, 최, 자윤 중 누군가는 권력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파고, 누구는 전복을 행동하는 혁신파다. 주인공들의 이름이 없는 건 권력이 국민을 독립된 인격체로서 존중하는 게 아니라 단순한 소비재로만 본다는 의미다. 성선설과 성악설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마녀 용의자는 자윤, 백, 그리고 귀공자의 동료 긴머리(정다은)다.

과연 마녀는 누구일지 영리한 화법으로 묻는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선하다는 주장과 악하다는 주장이 상충한다. 그건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도, 어느 한쪽이 틀릴 수도, 둘 다 맞을 수도 있다. 영화는 교묘하게 그 중간에서 줄타기를 한다. 기득권자가 국민을 동격이 아닌 사냥개 정도로 바라본다는 이기심은 성악설이다. 자윤은 선일까, 악일까?

기득권자와 그 수하들은 자윤을 마녀 아가씨라고 부른다. 그들이 첨단의 유전공학으로 자윤의 뇌와 육체에 온갖 초능력을 불어넣어 힐링 팩터까지 갖춘 데다 타고난 능력도 돌연변이 수준이란 점은 아다만티움이란 과학의 힘을 더한 울버린을 연상케 한다. 여기에 염력까지 갖췄으니 타노스도 긴장해야 할 듯하다.

▲ 영화 <마녀> 스틸 이미지

그런 면에서 영화는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보다 칸트의 인과율에 손을 들어준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고 씨에게마저 큰 역할을 부여한 뒤 마지막에 관객의 뒤통수를 때리는 결정적인 반전이 그렇다. 초반이 살짝 지루하지만 그건 중반 이후의 엄청난 재미를 위한 뜸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이해가 된다.

감독은 액션은 서사를 위한 보조 장치일 뿐이라고 겸손해하지만 오락영화로서의 스타일과 강도와 신선함은 기존 한국 영화와 비교하면 실례일 정도다. 명희의 차진 대사와 잔망한 캐릭터가 쏠쏠한 재미를 주고 도망자, 추적자, 개 등의 각기 다른 시선으로 훑는 인트로는 샘 레이미의 ‘이블 데드’ 수준이다.

백의 캐릭터를 강렬하게 표현한 조민수는 제2의 전성기를 연 김희애와 김성령을 위협할 태세다. 이에 비해 최의 역할은 다소 아쉽다. 1500 대 1의 경쟁률을 뚫은 김다미는 올해 최고의 스타 탄생을 알릴 듯하다. 순백의 천진난만함부터 생존을 위한 잔인함까지 극과 극을 오가는 표정 연기는 경이롭다.

“세상 사람은 자기랑 다른 이는 두고 못 봐”라는 대사는 다른 걸 ‘틀렸다’고 표현하는 이들과 장애인에게 편견을 가진 이들에 대한 조롱이다. 자윤의 “대체 저한테 왜 이러는데요”라는 대사도 같은 맥락. 중상을 입은 자윤의 얼굴을 구 씨 아내가 쓰다듬자 그 손을 자윤이 잡는 장면은 화합을 의미한다.

천사와 악마는 동격일까? 오만방자해진 루시퍼가 타락천사 사탄이 된 것처럼? 구 씨가 자윤에게 “네가 무엇으로 태어났든 우린 그렇게 키우지 않았어”라고, 귀공자는 “인생은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냐”라고 각각 말하는 데 답이 있을 듯하다. ‘신세계’를 넘어선 작품이다. 125분. 15살 이상. 6월 27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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