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육사교장 권총위협과 육사생도의 가두행진
-이상훈 장군 5.16거사 전 JP와의 운명적 만남

이상훈 장군은 대위때인 1959년 10월 군사정보부대 번역장교를 지내다 이듬해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에 파견근무를 나가게 된다. 여기에서 5.16때 핵심 중 핵심인 김종필(JP) 중령과 같이 근무하게 된다.

▲ 1963년 김희덕장군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외무·국방위원장 시절 박정희 최고회의의장과 함께 해군함정 진수식에 참석하고 있다, 가운데 손을 흔드는 이가 朴의장이고 김장군이 바로 오른쪽에 서 있다.

1961년 5.16거사 직후 육사생도들이 가두행진에 참여하게 되는데 누가 어떻게 해서 행진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이에 대해 이상훈 장군은 생도들의 가두행진은 차지철 대위가 강영훈 육사교장을 권총으로 위협, 성사시켰다고 말한다. 당시 강 교장은 참모총장의 명령없이는 육사생도들의 가두행진을 허락할 수 없다고 버텼다. 강 교장은 이같은 뜻을 참모총장에게 전하고자 육본으로 갔으나 이미 육본은 혁명군의 수중으로 넘어가 있었다. 거기에서 공수단의 차지철 대위 등이 강 교장을 육본 회의실로 감금하다시피 했다. 결국 차 대위의 권총위협으로 강 교장의 고집이 꺾였다는 것이다. 이상훈 장군은 당시 전두환 대위와 함께 육사생도들에게 5.16 지지를 위한 가두행진을 하도록 설득에 나선 핵심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동대문을 거쳐 시청앞 광장에 이른 육사생도들의 가두행진은 5.16을 성공적으로 이끈 매우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이 장군이 5.16거사 세력과 깊숙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당시 JP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그러니까 군사정보부대 번역장교로 근무할 때 JP는 정보참모부 과장이었다. JP는 평소 정규 육사출신들을 우호적으로 대했다. 이 대위에게 “어이 이 대위, 커피 한 잔 하지.”하면서 커피타임을 자주 가졌다. 이 대위 역시 그런 선배가 싫지 않아서 후배로서 잘 따랐다.

그러던 1960년 가을 JP는 육사 8기생들이 주동이 된 ‘16인 항명사건’으로 전역조치를 당한다. 당시 이 항명사건은 군사 쿠데타를 준비하는 마음의 과정에서 일어났다. 어쨌거나 자신한테 늘 잘 해주었던 JP가 갑자기 군복을 벗자 둘만의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1961년 5월16일 아침 JP는 계급장 없는 카키색 군복을 입고 느닷없이 육본 정보참모부에 나타났다. 허리에는 권총을 차고 팔뚝에는 ‘혁명군’이라는 빨간 완장을 두르고 있었다. JP는 이 대위를 보자 다자고짜 “이봐, 이 대위. 혁명이 났어! 몇 사람 불러서 육사생도들에게 가두행진을 시켜야 하는데 말야.”라고 매우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그러면서 JP는 빳빳한 천원짜리 한 다발을 내놓으면서 “육사에 가서 교수부에 있는 동기생들과 식사하면서 혁명의 당위성을 잘 설명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때마침 서울대학교 학군단 교관으로 나가 있던 전두환 대위가 이동남 대위와 함께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육본 정보참모부로 달려왔다. 이때가 오전 8시 무렵이었다.

이날 오후 2시30분쯤 이 대위는 전 대위 등과 함께 육사에 도착해 동기생과 육사졸업생 장교들에게 작금의 돌아가는 상황을 설명했고 이튿날 다시 이들은 JP가 지원하는 차량을 타고 육사에 갔다. 강영훈 교장에게 생도들의 가두행진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이 대위 등은 강 교장 집무실에 들어가서 혁명을 지지해줄 것과 생도들의 가두시위 필요성을 설득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강 교장이 말했다.

“너희들이 뭘 아느냐? 총장한테 지시받은 것도 아니고 박정희가 도대체 누구야? 너희들은 가라.”

강 교장은 소리를 버럭 지르며 다시 말했다.

“안돼, 절대 안돼. 내가 육본으로 가서 상황을 직접 확인해야겠어.”

강 교장은 서둘러 집무실을 빠져나와 육본으로 향했다. 이 대위는 황급히 육본 혁명위원회로 전화를 걸어 이같은 사실을 알렸다. 혁명위원회 측은 강제로라도 육사생도들을 동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강 교장은 훗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생도동원을 막기 위해 육본으로 가는데 마장동 근방에서 오치성(육사8기)과 박창암(혁명검찰부장) 등이 트럭에 병력을 싣고 육사로 가고 있었다. 육본에 도착한 나는 장도영과 박정희 장군에게 ‘생도들을 정치도구로 쓰지 말라.후배들에게 민주주의를 하도록 가르쳐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쿠데타 주체들이 강제로 나를 총장실 옆 회의실로 끌고 가다시피 했다.

이 대위가 다시 혁명위원회의 명령을 받은 것은 강 교장이 육본에 도착한 직후였다. 내용은 내일 육사생도 시가행진때 대열에 합류하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 대위와 전두환 대위 등은 5월18일 오전 10시 생도 800명과 함께 동대문~남대문~반도호텔~시청앞 광장으로 이어지는 시위 대열에 합류했다.

박정희 소장 등 주체세력들은 이 광경을 흐믓하게 지켜봤고 차지철 대위도 박 소장 바로 뒤에 서서 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응시했다. 바로 이 장면이 5.16거사 성공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이 한 장의 사진’이다.

생도들이 시청앞 광장에 도착하자 JP는 이 대위를 박 소장에게 데리고 가서 소개를 했고 박 소장은 “내일부터 나하고 같이 일해.”라고 말했다. 이 장군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강영훈 교장이 완강하게 반대하자 차지철씨가 권총을 들이대고 육본에서 육사에 전화를 걸어 가두시위를 지시하도록 했다.”고 ‘장군의 비망록’ 인터뷰에서 처음 밝혔다.

이처럼 육사생도들의 시가행진은 5.16이 성공적이라는 분위기를 과시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와 관련된 선우종원 전 장면총리 비서실장(당시 조폐공사 사장)의 회고를 들어보자.

18일날 나는 출근하다가 경향시문사에 들렀다. 한창우(韓昌愚)사장과 개인적인 친부도 있고 해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오전 10시쯤 육사생도들이 5.16을 지지하는 시위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 ‘이제 끝났구나’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5.16 군사쿠데타는 왜 진압이 안됐을까. 선우종원 전 사장은 생전에 당시 이한림 장군이 5.16쿠데타군을 진압하려다 실패했던 일에 대해 상세히 밝혔다. 이한림 장군은 당시 1군사령관으로 5.16세력과는 반대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5월17일 점심시간이 임박해서 김재순 재무부정무차관과 조연하 민주당의원이 우리 사무실에 들렀다. 그런데 마땅히 점심 먹으러 갈 데가 없었다. 식당 대부분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마침 종로구 견지동에 있는 장면 총리 측근 모씨가 자신의 집에서 점심이나 하자고 연락이 왔다. 우리는 곧 견지동으로 갔다. 그런데 잠시 후 한창우씨도 왔다. 그는 나한테 전화했다가 자리에 없으니까 비서실을 통해 내가 거기 간 것을 알아낸 모양이었다. 자연스럽게 5.16에 관한 얘기가 나왔고 이한림 장군이 왜 진압을 하지 않았는지도 궁금해 했다.

그러던 참에 1군사령부 참모장 황헌친(黃憲親)준장과 연락이 닿았다. 그는 ‘이한림 장군이 장면 총리의 ’쪽지‘만 받아주면 즉각 서울로 달려가겠다’는 말을 거듭 전했다. 그런데 우리 일행 중에 장면 총리가 있는 곳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럴 즈음 이성모(李成模)비서관이 들어왔다. 이 비서관은 한 시간 뒤 장 총리 운전기사인 바실리오(천주교 세례명)를 만난다고 귀띔했다. 적어도 운전기사 만큼은 장 총리의 은신처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비서관에게 운전기사를 만나자마자 우리에게 연락해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그랬더니 얼마 후 연락이 왔는데 장 총리는 혜화동 갈멜 수녀원에 있다는 것이었다. 수녀원은 금남의 집이었다. 따라서 누가 장 총리한테 가서 ‘쪽지’(명령서)를 받아오느냐가 문제였다. 이때 한창우씨가 나섰다. 그는 장 총리와 동성중학교에서 같이 교편을 잡았고 사돈 사이이기도 했다. 우리는 한창우씨와 이 비서관을 은밀히 보내 꼭 쪽지를 받아오라고 전했다. 한참만에 한창우씨가 돌아왔는데 그는 쪽지를 받아오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육사생도까지 거리로 나오는 판이니 빨리 나와서 평화적으로 정권이나 이양하라고 장 총리한테 다그쳤다는 것이었다.

만약에 당시 한창우씨가 장 총리의 쪽지만 받아왔던들 역사는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한림 장군이 1군사령부 휘하의 군병력을 서울로 출동시켰을 테니 말이다. 이를 간파한 박정희 소장은 5월18일 이한림 장군을 박정희 친위조직인 ‘GD팀’에 연행돼 덕수궁에 감금했다. GD팀은 공수단 소속의 위관급 장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특수조직이다.

어쨌든 육사생도들의 시가행진이 대세흐름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주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 국회의원 출마 제의받아

이처럼 5.16때 빛나는 조연을 했던 이상훈 대위와 전두환 대위는 박정희 장군에게 전격 발탁돼 국가재건최고회의 경호실과 비서실 요원으로 각각 일하게 된다. 특히 이 대위는 박 장군을 수행경호할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으며 전 대위 역시 최고회의 비서실에 근무하면서 박 장군으로부터 국회의원 출마를 적극 권유받기도 했다.

이와 관련 5공화국때 전두환 대통령은 1987년 4월12일 오전에 다음날 발표할 4.13개헌논의 중단선언 담화를 녹화한 뒤 배석한 수석비서관들을 청와대 본관으로 불러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최고회의 시절을 소상하게 털어놨다. 당시 전 대통령의 측근 K씨가 언급한 내용이다.

내가 옛날에 박정희 대통령이 최고회의의장할 때 나보고 국회의원 나가라는 걸 안나갔어요. 장도영 사건이 끝나고 얼마 안됐을 때인데 사무실에 오라고 해서 갔어요. 나 보고 “전 대위, 국회의원에 한번 출마하지 않겠느냐”고 그래. 내가 깜짝 놀라 “제가 어떻게 국회의원을 합니까”라고 하자 “하면 하는 거지 왜 못해” 하더군. 그래서 나는 “아닙니다. 저는 군대에 있는 게 더 좋습니다.”고 했어. “군인하려고 사관학교에 갔지 국회의원하려고 간 게 아닙니다.”라고 했지. 박 대통령은 “(주위에서)자네가 필요하다고 하더군.” 나는 시간을 조금 주시면 의논을 해봐야겠다고 했더니 “남자가 하는 일에 상의는 무슨...” 하더니 이틀 뒤 다시 오라고 해서 윤필용 비서실장과 의논을 했지. 그 후 박 대통령과 다시 독대하는 자리에서 “저는 돈도 없고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는데 그 때부터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보는 거야. 가끔 내가 어디를 가 있어도 골치 아픈 일이 있으면 부르곤 하셨지. 아마 국회의원 출마를 거절한 게 인상적이었던 같고 또한 참신한 육사출신으로 본 것 같애.

만약 전 전 대통령이 박 전 대통령의 제의를 받아들여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부질없는 가설일지는 모르지만 역사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12.12도 안 일어났을 것이고 군사정권이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전 전 대통령은 5.16 당시 2000여 명의 군인으로 쿠데타에 성공하는 것을 가까이에서 보고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진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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