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변산>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변산’은 이준익 감독이 ‘왕의 남자’ 이후 가장 노골적으로 상업적 농도를 강하게 채색한 영화다. 별로 내세울 게 없는 ‘빡센 청춘의 흑역사’를 가진 등장인물들이 그다지 자랑할 게 없는 현재에 서서 안개같이 자욱한 미래를 바라보며 살지만 그럼에도 청춘은 당당하고 아름다울 권리가 있다는 얘기다.

전북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출신 30살 학수(박정민)는 전주에서 대학을 중퇴한 뒤 서울로 올라와 대리 주차,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래퍼로서의 꿈을 키우고 있다. Mnet ‘쇼 미 더 머니’에 6년째 도전하며 후배 래퍼들의 ‘디스’를 받고 있지만 홍대 클럽 일대에선 나름대로 유명세를 떨친다.

고등학교 때 그는 시인을 꿈꿨다. 그만큼 실력도 좋았다. 그러나 실습 나온 교생 원준(김준한)이 체육시간에 그의 시작 노트를 훔친 뒤 그 내용을 베껴 등단하는 바람에 포기했다. 또 초등학교 동창인 미경(신현빈)을 짝사랑해 단짝 상렬 구복 석기의 도움으로 프러포즈했지만 보기 좋게 퇴짜 맞았다.

전라도에서 알아주는 ‘주먹’인 아버지(장항선)는 경찰을 피해 달아나느라 밥 먹듯 집을 비우더니 결국 바람이 나 딴살림을 차렸다. 엄마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아버진 장례식에 얼굴도 안 비쳤다. 그런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병원의 전화가 걸려온다.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간다.

▲ 영화 <변산> 스틸 이미지

2인용 병실의 아버지 병상의 맞은편엔 학수를 짝사랑했던 동창 선미(김고은)의 아버지가 누워있다. 아버지에게 원한과 반감밖에 없는 학수는 병실을 나와 단짝들과 편의점에 앉아 술을 마신다.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치더니 학수를 잡아간다. 지명 수배된 보이스피싱 범죄 용의자와 유사하다는 이유다.

지역 유력 일간지 기자가 된 원준이 용의자가 잡혔다는 소문을 듣고 지구대로 달려온다. 제자이자 후배인 학수를 알아본 원준이 신원을 보장하자 경찰은 부안을 떠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그를 풀어준다. 선미는 면사무소 공무원으로 근무 중이고, 미경은 피아노 학원을 운영 중이다.

원준은 선미에게 구애 중이지만 그녀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멋지게 성장한 학수를 만난 선미는 은근히 마음이 끌리는 눈치다. 학수는 원준이 보는 앞에서 그녀를 데리고 저녁을 먹으러 간다. 건달 보스가 된 동창 용대(고준)는 어릴 때 학수에게 괴롭힘을 당한 쓰라린 아픔이 있다.

부안에서 꽤 힘을 쓰는 원준은 용대에게 학수를 혼내주라고 사주한다. 그렇잖아도 언제 복수할지 이를 갈던 용대는 흔쾌히 학수를 괴롭힌다. 용대는 예전에도 예뻤지만 지금은 성숙하게 아름다운 미경에게 한눈에 빨려 든다. 그는 그녀를 사로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놓고 학수와 내기를 하는데.

▲ 영화 <변산> 스틸 이미지

억지로 웃기려 하지 않지만 절로 웃음이 터질 코드가 곳곳에 포진된 게 이 감독의 예전 영화와 다르다. ‘아나키스트’를 제작하고, ‘왕의 남자’ ‘동주’ ‘박열’ 등을 연출할 만큼 이데올로기에 확실한 방향을 지니고 있던 감독은 이번엔 철학과 이념보단 위안을 통한 오락에 집중하기로 작정한 듯하다.

소재가 청춘의 꿈이라면 주제는 그들의 권리장전이다. ‘알바생’도, 건달도, 견인차 기사도 아무리 가난하고 희망이 안 보여도 젊음 자체가 재산이니 꿈을 펼쳐야 할 권리를 포기하지 말라는 얘기다. 부수적 주제는 고향이다. 유독 수도에 모든 가치관이 편중된 한국의 현실을 비웃는다.

학수는 래퍼들에게 고향이 서울이라고 버젓이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 그는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이래저래 안 좋은 일에 엮이자 “이놈의 동네 가지가지 한다”라고, 그런 학수에게 선미는 “너도 고향 지우고 싶었구나?”라고 묻는다. 뭐든지 다 아는 선미는 그 이유를 “동네 좁자녀”라고 댄다.

하지만 결국 선미는 고향을 부정적으로 보는 학수에게 “그건 너와 고향에 대한 예의가 아녀”라며 “아직 사투리가 남은 건 고향에 대한 진심이 조금은 남았다는 거여”라고 한 수 가르친다. 학수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도, 그런 예의를 갖추지도 않는 것에 대한 따끔한 훈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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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는 첫사랑이다. 열병 같은 사춘기를 보낸 주인공들의 첫사랑은 진실이었을 수도, 허상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지금도 변함없다면 참사랑이 확실하다. 미경은 뒤늦게 학수의 진가를 보고, 선미는 사랑했던 학수를 끝까지 믿으며, 학수는 뒤늦게 선미의 진정한 값어치를 알아본다.

선미는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음으로써 완성된다”라고, “첫사랑은 노을 같은 것”이라고 쓰고 말한다. 선미는 헤겔의 ‘정-반-합’을 말하고, 학수의 아버지는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를 웅변하며, 학수는 칸트의 인과율의 주인공이 됨으로써 결국 영화는 에리게나의 미적 무관심성을 외친다.

노을은 아름답지만 해가 끝이란 얘기다. 하지만 내일 또 해는 뜬다. 긍정과 부정은 항상 함께하고 그게 어우러짐으로써 종합이 완성된다는 진리. 아버지가 학수에게 용대를 넘어서라고 주문하고, 선미 아버지에게 사돈이 되자고 하는 것, 학수 아버지와 선미 아버지의 결말 등은 다 예정된 조화다.

학수가 ‘쇼 미 더 머니’에서 입상하지 못한 건 실력이 뒤져서가 아니라 마음속의 짐을 덜지 못해서였다.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다스리지 못했기에 가사도 래핑도 다 제 실력에 못 미쳤던 것. 예전에 미경이 그의 프러포즈를 거부했던 건 마음에 없어서가 아니라 인과율이 그렇게 만든 것.

▲ 영화 <변산> 스틸 이미지

진정한 미학이 상업적 무관심에 있듯 영화는 마치 ‘발리우드’의 그것들처럼 음악, 즉 즐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착관계를 시종일관 유지한다. 장르는 랩(힙합), 발라드, 그리고 뮤지컬이다. 힙합은 자유와 반항과 변혁에서 비롯됐지만 이제 랩은 래퍼들만의 무한대의 자유의 공간이자 표현방식이다.

학수가 키워드 랩 배틀에서 어머니를 랩으로 끝내 다 표현하지 못하고 목메어 운 건 감정이 격해졌기 때문이다. 학수 원준 미경이 노래방에서 묘한 신경전을 벌일 때 선미가 난입해 마이크를 빼앗고 속사포 랩을 쏟아낸 건 아버지와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는 학수에 대한 분노의 분출이다.

앞의 절반은 학수가 리드하지만 나머지 몫은 선미가 담당한다. 박정민이야 이 감독이 워낙 애착을 갖는 배우라 당연한 캐스팅이겠지만 8kg이나 살을 찌운 김고은은 정말 안성맞춤의 캐스팅이었다. 박정민은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의 깜짝 놀랄 만한 피아노 연주에 이어 멋진 랩을 들려준다.

김고은은 백치미와 순수미를 오가는 묘한 매력을 뿜어낸다. 자칫 ‘도깨비’의 순진무구한 캐릭터와 겹칠 수도 있었을 법한데 절묘하게 그런 함정을 요리조리 잘 피해나갔다. 체중 증량이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화려한 엔딩 신을 즐기고 나면 기분이 청량해지는 청춘예찬 영화다. 15살. 7월 4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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