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극장 쪽으로>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극장 쪽으로’(유지영 감독), ‘극장에서 한 생각’(정가영 감독), ‘우리들의 낙원’(김태진 감독) 등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독립영화 ‘너와 극장에서’는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작이다. 사라져가는 단관극장과 설자리를 잃는 독립영화 전용관에 대한 낭만과 추억, 그리고 강한 아쉬움을 담고 있다.

영화가 ‘꿈의 공장’이라면 극장은 상업적으론 유통업장이면서 관객에겐 ‘꿈의 놀이공원’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아날로그 시절에 ‘영화 보러 가자’가 아니라 ‘극장 구경 가자’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인 특징이 있다. 취미와 레저 생활에 들일 시간도 돈도 열악했던 시절엔 극장에 가는 게 큰 행사였던 것이다.

대기업이 멀티플렉스 체인 사업에 뛰어듦으로써 이제 극장은 영화 유통업장을 넘어서, 대형 놀이공원의 차원으로 지표를 수정했다. 기존처럼 연인과 친구가 영화를 보고 간단한 간식과 음료를 즐기던 데서 몇 발자국 더 나아가 하루 종일 관람하고, 마시고, 먹고, 술도 즐기고, 쇼핑까지 겸할 수 있게 됐다.

복수의 노선이 겹치는 지하철 환승역과의 결합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김수희의 히트곡 ‘정거장’처럼 각 지역의 사람과 문화가 만나고 헤어지며 머무는 필수 경유지가 된 것이다. 단관극장의 몰락은 산업화 과정에서 자본주의 노선에 따른 대기업의 물량공세가 만든 현상이지만 마니아들은 안타깝다.

독립영화의 설자리는 더 옹색해졌다. 세 작품은 영화산업의 자본주의화에 떼밀린 예술영화 전용관이 무대다. 영화 마니아들에겐 각 극장에 대한 추억과 정서와 가치관이 있다. 대기업이 찍어낸 과자와 재래시장의 오래된 빵집에서 만든 그것과 다르듯. 이 시대 젊은이들의 허무함과 함께 그걸 그린다. 

▲ 영화<극장에서 한 생각> 스틸 이미지

‘극장 쪽으로’. 선미(김예은)는 서울을 떠나 대구 한국감정원 안내데스크에서 근무 중이다. 그녀의 일상은 매우 단조롭다. 아침에 우유 한 잔과 토스트 한 쪽을 먹은 뒤 출근해 동료가 점심을 먹고 와 교대해주면 홀로 분식집에 가서 계란덮밥으로 끼니를 때운 뒤 밤에 집에서 컴퓨터로 영화를 본다.

그러던 어느 날 책상 위 사탕 담은 병 표면에서 ‘6시에 오오극장에서 만나요’라는 메모를 발견한다. 호기심 반, 기대감 반에 퇴근 후 극장에 가지만 아무도 아는 체하지 않는다. 영화 시작 전 담배를 피우려고 뒷골목에 들어갔다 길을 잃은 그녀는 휴대전화마저 카페에 두고 왔기에 패닉에 빠지는데.

‘극장에서 한 생각’. 영화감독 가영(이태경)은 압구정동 가로수 길의 예술영화 극장 이봄씨어터에서 신작을 상영한 뒤 관객들과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 지금까지 멜로 영화 위주로 찍어온 그녀의 이번 작품은 특이하게도 서스펜스로 극장 안에서의 살인사건을 소재로 했다.

대화 중 가영은 자신이 유부남을 사랑했던 아픔이 있고, 그 이유로 멜로를 중단했지만 언젠가 경험을 소재로 멜로를 다시 찍어보겠다고 고백한다. 그러자 한 관객이 그 남자가 영화 전문지 윤 기자가 아니냐고 묻고 화들짝 놀란 가영은 갑자기 평정심을 잃고 그 관객과 날선 공방의 설전을 펼치는데.

‘우리들의 낙원’. 은정(박현영)은 중요한 서류를 회사에 제출하지 않고 며칠째 무단결근 중인 후배 직원 민철을 찾으라는 상사의 명령에 그의 집을 방문한다. 비밀번호를 알기에 집안에 들어가지만 민철도 서류도 찾을 수 없다. 그녀는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종로 서울극장에서 민철을 발견하는데.

▲ 영화<우리들의 낙원> 스틸 이미지

오오극장은 2015년 개관된 지역 독립영화감독들의 아지트이자 팬들의 성지다. 뜻을 함께하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설립됐다. 영화의 내용과 별로 매칭되지 않는 장소지만 감독의 각별한 애정과 유지의 이유에 대한 간절함을 담은 것으로 풀이된다. 힘들지만 살아야 하는 선미의 존재와도 같다.

흑백 톤에 대사마저 없는 초반은 무성영화 느낌을 의도한 듯하다. 아날로그 정서에 대한 진한 향수를 풍긴다. 현대 젊은이들의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무미건조한 일상에 대한 단상이다. 선미가 마시는 건 매일우유. 그녀의 매일은 점심 메뉴마저도 똑같이 무한 반복된다는 걸 의미한다.

뒷골목에서 담배를 물었다 노파를 보고 그녀를 피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길을 잃은 뒤 당황해 이리저리 헤매지만 결국 갔던 곳을 계속 맴돌고 있음을 깨닫고는 자포자기, 제자리에 주저앉아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는 장면은 고단한 현실에서 헤어나고자 발버둥 치지만 제자리걸음인 청춘을 말한다.

새벽에 우유배달부는 복도식 서민 아파트 각 철문 앞에 우유를 놓고 간다. 선미는 철문을 여는 게 귀찮아(보안 문제가 아님) 신문 투입구로 팔을 뻗어 우유를 수거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거의 모든 주민들이 그런 방식을 취한다는 엔딩 신은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는 데서 긍정적이고 또 절망적이다.

‘극장에서 한 생각’은 하이라이트 전까지 매우 지루하지만 뜻밖의 반전이 전율케 하니 긴장의 끈을 놓으면 곤란하다. 일상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 혹은 자신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그에 연루된 상대방에겐 의외로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즉자-대자적’인 울림과 역지사지의 교훈이 담겼다.   

▲ 영화<우리들의 낙원> 스틸 이미지

‘우리들의 낙원’은 게르만 민족의 신화와 전설이 담긴 중세 시대의 영웅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를 바탕으로 할리우드에서 1938년 제작한 동명의 영화와 종로 낙원상가에 대한 메타포를 동시에 담은 중의적 표현이다. 마지막에 은정과 민철은 서울아트시네마 안에서 다정하게 ‘우리들의 낙원’을 관람한다.

은정이 민철을 찾는 여정은 청계천을 거쳐 낙원상가로 이어진다. 일행은 “(예전엔 젊은이들의 성지였는데) 이젠 여긴 노인국이네”라고 말한다. 언제부턴가 할 것과 갈 곳을 잃은 노인들이 파고다공원으로 몰려들면서 그 일대는 정말 ‘노인을 위한 나라’가 돼버렸지만 더 오래 전엔 그렇지 않았다.

명동에 돈과 나이가 좀 있는 이들이 몰렸다면 종로 2~3가는 주로 대학생, 재수생, 젊은 직장인들로 넘쳤다. 주말엔 허리우드, 서울, 피카디리, 단성사 등의 개봉관이 청년과 청소년으로 가득했다. 이에 허리우드와 서울은 멀티플렉스로 도약하려 했지만 대기업에 밀리고 노인 부대에 치여 옛 명성을 잃었다.

이쯤 되면 이 영화의 의도와 존재의 가치가 드러난다. 노인을 공격하자는 게 아니라 ‘젊은’ ‘독립’ 영화의 존재의 이유와 그걸 아끼는 관객과 영화인의 설자리, 그리고 독립영화 전용관의 절대적 필요성이다. 스크린 독과점에 문제를 제기해야 할 타당성이다. 79분. 12살 이상. 6월 28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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