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3월15일 밤, 운명적인 사건 [김문 작가 칼럼]

김문 작가l승인2018.06.29l수정2018.06.29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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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 최고회의재경위원장 시절 김희덕장군이 원용섭경제기획원장관(오른쪽)으로부터 업무현황을 브리핑 받고 있다.

1963년 3월15일 밤, 운명적인 사건
-김희덕 장군의 증언

5.16 거사 2년 후인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은 1963년 2월27일 민정이양을 발표한다. 미국측은 때를 놓칠세라 3000만달러 원조계획을 조기에 실행하겠다며 미국무성 관계자들을 한국에 급파했다. 이들은 한국 도착 직후인 3월15일 저녁 한국측 관계자들과 처음으로 저녁 식사자리를 가졌다. 민정이양을 축하하는 뜻에서 미국측이 마련한 자리였다. 그러나 이 날 저녁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갈라놓는 운명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만찬장소는 윌리엄 버거 주한미대사 관저였다. 참석자는 박정희 의장, 김희덕 장군(외무,국방위원장)을 비롯 김용식 외무장관, 김종오 육군참모총장, 그리고 미국측은 버거 대사외 미국무성 관계자들이었다. 분위기는 시종 화기애애했다. 그러다가 버거 대사가 박 의장에게 “그만 두시면 앞으로 뭘 하시지요?”라고 물었다. 박 의장은 주저없이 “초야에 묻혀 살면 되는 것 아니겠소.”라고 응수했다. 미국측 한 관계자는 “과거 역사적으로 볼 때 군사혁명을 일으켜 이렇게 빠른 시일내에 민정이양을 하는 전례가 없었소.”라고 하면서 박 의장의 용단을 높이 평가했다.

그렇게 저녁자리가 끝나고 참석자들도 모두 일어섰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박 의장이 김희덕 장군에게 다가가더니 귓속말로 “김 장군, 먼저 가보시오. 버거 대사와 할 말이 좀 남았소.”하는 것이었다. 당시 김 장군은 박 의장 공관에서 함께 당분간 출퇴근하고 있던 터였다. 김 장군은 다른 일행과 함께 자리를 마무리하고 현관문을 나섰지만 불길한 예감이 가시질 않았다. 그래서 김 장군은 관저 현관 입구에 대기해 있던 박 의장 지프 안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시간이 꽤 흘렀다. 밤 11시30분이 넘도록 박 의장은 나오질 않았다.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기다리다 못한 김 장군은 관저 안으로 들어갔다. 만찬이 열렸던 자리는 이미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김 장군은 응접실 출입구로 예상되는 문고리를 열었다. 그런데 응접실이 아니라 버거 대사의 침실이었다. 누워 있던 버거 대사의 부인이 깜짝 놀라 일어났고 당황한 김 장군은 응접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응접실은 바로 옆방이었다. 김 장군은 서둘러 응접실 문을 열었다. 아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박 의장은 서 있었고 버거 대사는 앉은 채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박 의장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동시에 버거 대사가 박 의장에게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없느냐”고 간곡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 의장은 “절대 그럴 수 없다. 미국무성에 그대로 통보해달라.”고 단호하게 말하면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뒤따라 나서던 김 장군이 물었다.

“각하,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버거 대사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입니까?”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던 박 의장이 지프에 오르면서 대답했다.

“군정을 4년동안 더 연장한다고 했소.”

김 장군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다시 한번 되물었다. 박 의장의 두 번째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군정 4년 연장이라! 민정이양한다고 발표한지 한달도 안되어 이를 뒤집는다는 것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올 일이었다. 김 장군이 말했다.

“아니 각하, 사전에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러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박 의장은 김 장군의 항의성 질문에 아무말 없이 장충동 공관에 도착했다. 박 의장은 응접실 의자에 앉으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군정을 연장해야겠소. 각군 총장을 설득해주시오.”라고 말했다.

이때가 새벽 2시쯤이었다. 김 장군은 우선 용산에 있는 김종오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찾았다. 단잠에 빠져 있다가 느닷없이 김 장군의 방문을 받은 김 총장은 이 사실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라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정신을 가다듬은 김 총장이 말했다.

“아니 그런 법이 어디 있소. 어제 저녁만 해도 민정이양을 축하하는 만찬이 있었잖소. 그런데 아무런 사전논의도 없이 말이나 되는 소리요?”

“나도 동감이오. 그러나 어쩔 수 없소. 버거 대사에게 말했다는 것은 이미 미국 대통령에게 공식 통보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것이 박 의장의 주문입니다. 최고회의가 와해되어서는 안됩니다.”

육군총장 공관을 물러나온 김 장군은 차례로 장성환 공군총장, 이맹기 해군총장, 김두찬 해병대사령관 등과도 만나 박 의장의 결심을 전했다.

이튿날 오후 2시 박 의장은 직접 4년간 군정을 연장한다는 이른바 ‘3.16성명’을 전격 발표했다. 성명발표 직전 박태준 김형욱 장지수 홍종철 등 최고회의 상임위원 30명이 긴급 소집됐음은 물론이다.

3.16 성명이 발표되자 미국측의 즉각적인 반응이 나왔다.

4년간 군정을 연장하려는 군사정부의 노력은 한국에 매우 어려운 상황을 초래했다. 미국은 군사통치의 연장이 안정되고 효율적인 정부에 위협이 된다고 믿고 있으며 이같은 모든 일이 한국정부에 의해 재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미국은 한국의 군정 지도자들과 주요 정치단체들이 민정이양 절차를 함께 수립해나갈 수 있다고 믿으며 또 그것이 한국 전체 국민들에게 납득할 만한 것이 되기를 희망한다.

케네디 대통령은 또 헌법에 의해 구성되지 않은 정부의 영구화를 반대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아울러 5개년 계획을 위한 3000만달러의 경제원조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상황이 이쯤되자 박 의장은 김 장군에게 특명을 내렸다. 어떻게 해서든 버거 대사를 설득해서 한미관계를 호전시키라는 것이었다. 김 장군은 이때부터 버거 대사와 살다시피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만나며 군정연장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미국측의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일은 꼬이기만 했고 고심 끝에 김 장군은 묘책을 생각해냈다. 그해 3월말 버거 대사를 만나 최후 통첩이나 다름없는 말을 했다.

“이보시오 대사, 만약 이렇게 계속 나간다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일선 장병들이 총부리를 서울로 겨눌지 모릅니다. 끝내 미국의 지원이 없다면 파국이라는 결과밖에 없습니다. 혁명한다고 해놓고 아무 일도 못한다면 일선 장병들이 가만 있겠습니까? 벌써 전방에서는 이상 징후가 포착되고 있습니다.”

버거 대사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김 장군의 말을 들은 버거 대사는 “가서 8군사령관을 만나야겠소.”하면서 김 장군과 함께 자리를 떴다. 이때가 새벽 2시였다. 맬러웨이 사령관도 이같은 말을 듣더니 놀라워하며 곧바로 김종오 육참총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방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정보가 있습니까?”

“그렇소.”

버거 대사는 더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김 장군에게 돌아가자고 했고 둘은 리무진에 탔다. 김 장군은 다시 한번 강조해야겠다고 마음 먹고는 리무진 내부 칸막이(운전기사가 듣지 못하도록)를 올렸다. 그리고는 대사에게 말했다.

“대사, 당신은 미국 대통령을 대신하고 있고 나는 한국을 대표하고 있소. 솔직히 털어놓읍시다. 군정연장에 공감해야 되지 않소?”

창밖을 응시하던 대사가 말했다.

“김 장군, 군정연장을 2년만 하면 어떻겠소?”

김 장군은 쾌재를 불렀다. 대사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미국무성과 이미 합의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김 장군은 그렇게 건의하겠다면서 버거 대사와 헤어진 뒤 곧바로 박 의장 공관으로 향했다.

새벽 4시가 가까웠다. 공관 현관문을 들어서자 박 의장 등 최고위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 장군이 “오늘 담판을 짓겠다.”고 미리 귀띔했기 때문이다. 김 장군은 우선 결과부터 말했다. 군정연장 2년을 말했고 박 의장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미국측과 끈질긴 교섭 끝에 얻어진 결과에 다들 만족했다.

그런데 이튿날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같은 극비내용이 일본 요리우리 신문에 대서 특필됐던 것이다. 박종규 경호과장이 일본 기자한테 미리 흘려 당분간 비밀에 붙이기로 한 것이 깨지고 말았다. 일파만파였다. 버거 대사가 즉각 전화를 걸어와 ‘없었던 걸로 한다’고 통보했다.

이래저래 군정연장 발표는 국내외 큰 파란을 일으켰다. 2년 기한을 밀약했던 극비내용이 공개되면서 미국의 거센 압력과 국내의 비난 여론, 그리고 최고회의 내부동요 등으로 이어지면서 박 의장은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최고회의 내부에서는 범국민정당을 결성, 박 의장이 대통령에 출마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재야지도자 초청 정국수습 비밀회의

계속되는 김희덕 장군의 증언이다. 1963년 3.16성명 후 정국의 혼란이 격화되자 최고회의측은 재야지도자들과 정국수습을 위한 긴급회의를 열었다. 정국수습책 마련에 고심하던 김희덕 장군이 박 의장에게 건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3월19일 오후 3시 최고회의 3층 대회의실. 최고회의측은 박 의장을 비롯한 김희덕 김용순 강기천 유양수 등 상임위원장과 위원, 그리고 재야쪽에서는 윤보선 장택상 이범석 김도연 김준연씨 등이 참석했다. 5.16후 처음 마련된 자리여서 그런지 참석자들은 한껏 고무된 듯했다. 기자들이 들어오지 않는 비공개 회의로 허심탄회하게 수습방안을 도출해보자는 것이 김 장군의 제안이었다. 회의 진행은 홍종철 문공위원이 하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말문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김 장군이 나섰다.

“오늘 모처럼 재야 지도자분들을 모셔서 회의를 진행하는 만큼 정국수습 방안에 대해 좋은 의견을 개진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장택상씨가 먼저 말했다.

“의장, 나는 고향이 칠곡입니다. 의장 고향과 그리 멀지 않은 곳입니다. 다같은 고향사람이나 마찬가지인데 언론탄압이 웬말입니까? 나같은 국민대표가 말을 제대로 못한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찬물부터 끼얹는 발언이었다. 박 의장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못했다. 성질이 급한 김 장군이 또 나섰다.

“이것 보시오, 장택상씨. 결국 당신도 국무총리때 언론 때문에 쫓겨난 것이나 다름없소. 언론이란 밑에서 올라오는 것이오. 강요한다고 해서 언로가 막힙니까? 그리고 국민의 대표라고 했는데 어째서 국민의 대표입니까? 아직 선거도 안했으니 지금은 자연인 장택상일 뿐이오.”

회의는 대체로 이런 분위기였다. 재야지도자들의 성토에 김 장군이 대부분 답변하는 식이었다. 재야지도자들은 한결같이 3.16성명을 철회하고 박 의장의 원대복귀를 강력히 요구했다. 회의는 두시간만에 끝났다. 뚜렷한 결론은 얻지 못했지만 쌍방간에 의견을 교환할 수 있다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회의가 막 끝나자마자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회의시작 때부터 진행내용을 일일이 속기하는 낯선 사람이 20여명 있었던 것이다. 김 장군은 아까부터 미심쩍어 했던 일을 이후락 공보실장에게 물었다.

“이것 보시오, 이 실장. 최고회의에 무슨 예산이 많다고 필기사들이 저렇게 많소?”

“필기사들이 아니고 기자들입니다.”

김 장군의 얼굴이 갑자기 울그락불그락했다.

“이보시오. 기자들은 입회 안시키기로 했잖소.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그렇게 했소?”

“나는 그렇게 하면 안됩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김 장군은 달려가 이 실장의 멱살을 잡고 “홍보실장은 외부에 홍보나 하는 것이지 허락도 없이 기자들을 동원하는 법이 어디 있소?”라고 큰소리로 말하자 이 실장은 “당신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오.”라고 반박했다. 이와 동시에 김 장군의 오른손이 이 실장의 왼쪽뺨을 강타했다. 이 실장이 2년 선배였지만 최고회의 서열은 김 장군이 앞서 있었다. 기골이 장대한 김 장군은 이 실장을 땅바닥에 그냥 내동댕이쳐버렸다. 김 장군은 씩씩 대며 박 의장에게 가서 “이 실장을 당장 내보내세요.”라고 격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박 의장은 이런 와중에 그러면 되겠느냐며 김 장군을 달랬다.

이 날의 회의에도 불구하고 정국경색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3월22일 허정(許政)씨의 발언(5.16 자체와 혁명정부를 부인하고 군의 지지에 의문을 나타낸 내용)이 경향신문에 보도되자 최고회의위원들은 분노했다.

다음은 강기천 당시 법사위원장의 회고.

그 기사가 나가자 마자 최고위원들은 격분했다. 김형욱 위원장이 박 의장의 승낙을 받아 김성은 국방부장관과 당연직 최고위원인 각군 참모총장, 해병대사령관 등을 참석시켜 긴급회의를 열었다. 다음 날 국방부에서 장성급 이상의 전 지휘관이 참석해 최고회의에 대한 굳은 의지를 표명하고 군의 단결을 저해하는 어떠한 발언도 배격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이튿날 11시에 개최된 비상지휘관회의에서 결의문을 채택한 160여명의 지휘관들은 회의가 끝난 후 별판이 붙은 97대의 지프 또는 세단에 분승하여 국방부에서 청와대까지 차량 퍼레이드를 벌였다. 이들은 박 의장에게 회의참석 지휘관 전원이 서명한 결의문을 전달함으로써 군의 충성을 맹세하고 단결을 과시했다.

사태는 더욱 악화됐다. 윤보선 전 대통령이 박 의장과의 회담을 제의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3월27일 김현철(金顯哲) 내각수반 주재하에 시국수습회의가 열렸다. 각계 대표 69명이 참가한 이 날 회의에 민정당과 신정당측의 거물급 정치인들은 거의 불참했다.

이 회의가 있은 뒤 김현철 내각수반과 김재춘 중앙정보부장 등이 윤보선, 허정, 이범석씨 등 인사들을 차례로 방문, 시국수습 대책을 협의한 끝에 3월30일 박 의장과 윤보선, 허정씨가 회동한 3자회담이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조야(朝野) 실무자회의를 구성하는데 극적인 합의를 보았으며 이를 계기로 차츰 정국이 풀리는 기미를 보였다.

박 의장은 4월8일 혁명주체 내부강경파들에 대한 무마작업을 벌인 다음 시국수습을 위한 국민투표를 9월말까지 보류한다는 것과 9월 중에 정부는 각 정당대표들과 모든 정치정세를 종합 검토해서 공고된 개헌투표를 실시하든가 또는 개정헌법에 의한 대통령 및 국회의원선거를 실시하든가를 협의 결정한다는 내용을 담았으며 또한 정치활동을 다시 허용하고 이 기간 중 정계의 재정비를 단행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4.8성명이 발표되자 재야에서는 4월15일 재야지도자 11인의 명의로 된 성명서를 통해 “4.8성명은 3.16성명을 변형한 것이므로 국가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일을 즉각 철회하라.”고 반발했다. 그러나 이같은 재야의 주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누그러지면서 정국은 선거체제로 돌아가는 듯했다. 결국 5월27일 박 의장은 자신에게 민정에 참여해줄 것을 요청한 혁명주체와 공화당의 건의를 받아들임으로써 대통령 후보로 나설 것이 확실하게 됐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김문 작가  gamsam10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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