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마녀>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지난 27일 개봉된 영화 ‘마녀’(박훈정 감독)에 대한 관객 및 평단의 평가가 대체로 긍정적이다 못해 극찬도 꽤 눈에 띈다. ‘악마를 보았다’의 각본가 박훈정에게 놀란 관객들은 그의 2번째 연출작 ‘신세계’의 뛰어난 구성과 세련된 연출력, 그리고 배우들의 명연기에 감동해 후속작을 기다렸다.

하지만 ‘대호’와 ‘브이아이피’는 다소 실망을 안겨준 게 사실이다. 심지어 ‘브이아이피’는 여성 혐오 의혹까지 받는 등 감독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안겼다. 하지만 입소문대로 ‘마녀’는 확실히 독특한 스타일에 액션의 재미를 더한 데다 나름대로 깊은 철학까지 갖춰 호평 세례를 이끌어내고 있다.

부제가 ‘Subversion’이다. ‘체제를 전복시키다’ ‘믿음을 뒤엎으려 하다’ 등의 뜻이다. 파괴, 멸망의 의미도 지녔다. 영화를 음미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될 법하다. 연고가 없는 어린아이들을 살인무기로 양성하는 은밀한 집단이 있다. 드러나진 않지만 권력(국가)이 경영한다는 정황은 충분하다.
 
10년 전 이곳에서 탈출한 18살 자윤은 경제적으로 쪼들린 양부모를 도울 목적으로 큰 상금이 걸린 TV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그동안 그녀를 추적해온 비밀 기관의 수뇌급 닥터 백(조민수)과 미스터 최(박희순)에게 노출된다. 백은 오른팔 귀공자 등을, 최는 정예대원 등을 각각 자윤에게 급파한다.

▲ 영화 <마녀> 스틸 이미지

자윤은 탈출 직후 지금의 양부모의 농장 인근에 의식을 잃고 쓰러진 후 모든 기억이 지워졌기에 옛 동료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는 조직이 양부모와 친구의 신변에 위협을 가하자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조직에 잡혀간다. 이후 놀라운 반전이 거듭되며 영화는 재미와 철학을 완성한다.

‘마녀’와 ‘Subversion’은 전혀 연관성이 없는 단어지만 제목과 부제목이란 정체성을 부여받으면서 서로 불가분의 관계가 됐다. 고대 이집트부터 토테미즘이 만들어낸 마녀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검은 주술사와 비를 내리고 병을 고쳐 사람을 이롭게 하는 신앙적 주술사의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유럽에선 기독교의 영향 때문에 악마를 섬기는 이단적 존재로 각인됐다. 특히 십자군 원정의 실패 이후 타락한 가톨릭교회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2세기 말~18세기 초기까지 잔인한 ‘마녀사냥’을 펼침으로써 아이를 포함한 1000여 명의 여성들을 희생시키며 부정적 이미지로 굳어졌다.

마녀사냥이 절정에 달한 때는 어이없게도 합리주의가 철학적 사고를 지배한 16~17세기였다. 비합리적이거나 우연한 것을 배척하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필연적인 것을 중시하는 합리주의는 기독교의 신앙의 진리로 이어졌으며, 인식론에서는 생득적, 명증적인 원리로 이해됐다.

▲ 영화 <마녀> 스틸 이미지

영화에서 옛 동료들은 자윤을 마녀라고 부른다. 마녀사냥이다. 한때 타락한 기독교가 그랬듯 비밀 집단은 자윤의 능력을 질시해 그녀를 마녀로 내몬다. 영화는 진짜 마녀가 누구인지 찾는 재미를 준다. 자윤은 체제 전복이다. ‘권력’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비밀병기를 만들고 필요에 따라 쉽게 소거한다.

마녀사냥이 그랬듯 자신들만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인권 따윈 안중에도 없다. 백과 최, 그리고 그들의 부하들은 체제에 순응하다 못해 복종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다고 그들이 정체성이나 인격을 존중받고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 감독은 영리하게 그 답과 또 다른 ‘마녀’를 찾는 흥미를 준다.

두 제목을 잇는 세 번째 철학은 아이덴티티다. 감독은 ‘프랑켄슈타인’에 착안해 복잡한 인간의 본성을 다루고자 했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여러 시신 중 우월한 부분을 모아 조합한 인간을 창조한다. 자윤 및 옛 동료들 역시 어린아이의 몸에 여러 우성인자들이 투입된 괴물이다.

그들은 모두 이름이 없다. 아니 이름이 없을 수밖에 없다. 여러 사람의 이름이 붙어야 할 테니. 영화와 안 어울리게도 현철의 ‘사랑의 이름표’가 흘러나오는 건 절로 웃음을 주는 메타포다. 귀공자는 자윤에게 “이름이 다 생겼네”라며 비웃는다. 괴물들의 인식론 안엔 이름이란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 영화 <마녀> 스틸 이미지

멜로 영화 중 우연히 만난 이성에게서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어찌해볼 새도 없이 금세 헤어진 후 “이름도 못 물어봤는데”라고 안타까워하는 상황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우여곡절을 거쳐 극적으로 사랑을 완성한 커플이 “내 진짜 이름은 아무개야”라고 말하는 장면도 쉽게 볼 수 있다.

실존철학의 사람의 ‘터있음’의 ‘실존론적 존재론적 처해-있음’의 ‘개시성’은 곧 이름이란 얘기. 발성화를 지시하기 위한 용어적 표현인 언어를 통해 한 사람의 이름이 불릴 때 그 존재는 ‘세계-내-있음’으로 개시성(열려 밝혀져 있음)을 갖는다는 것. 사람은 동물과 달리 이름이 곧 정체성이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정체성을 잃은 채 살아가는 소모품(현대인)은 ‘주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부처님 손바닥 안’. 그 암울한 현실에 체제 전복이란 마지막 카드를 뽑아든다. 남자는 무지하고 나약하지만 여자는 강하고 현명하게 묘사된 것부터 마지막 시퀀스까지 소름 끼친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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