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킬링 디어>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송곳니’와 ‘더 랍스터’로 마니아들 사이에서 명성을 떨친 그리스 출신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최신 영화 ‘킬링 디어’는 무서운 장면 없이 온몸에 소름이 돋는 호러의 분위기에 스토리를 알면서도 플롯이 궁금해지는 미스터리 서스펜스 장르다. 주의! 특정 종교인은 불편할 수도 있다.

심장 전문의 스티븐(콜린 파렐)은 안과 의사 애나(니콜 키드먼)와 결혼한 지 16년 된 상류층 인사다. 음악에 뛰어난 14살 딸 킴, 운동에 자질을 보이는 초등학생 아들 밥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는 은밀하진 않지만 조심스레 16살 소년 마틴(배리 케오간)과의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어느 날 예고 없이 병원에 나타난 마틴을 보고 동료인 마취 전문의 매튜가 누구냐고 묻자 “딸의 학교 친구”라고 답하는 등 웬일인지 스티븐은 마틴에게 끌려다니는 눈치다. 스티븐은 마틴을 집에 초대하고 가족은 그를 마음에 들어 하는데 특히 막 초경을 경험한 킴이 그에게 반한다.

이에 대한 답례로 마틴은 스티븐을 자신의 집에 초대한다. 엄마와 단둘이 사는 마틴은 저녁을 먹은 뒤 돌아가려는 스티븐을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한 편만 같이 보자며 붙잡은 뒤 슬며시 자리를 피한다. 그러자 마틴의 엄마는 곧바로 스티븐에게 ‘육탄돌격’을 하지만 그는 이를 거부한다.

갑자기 밥에게 하반신 마비가 온다. 병원에선 원인을 발견하지 못한다. 스티븐은 꾀병이라 의심하지만 이내 킴에게도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 마틴은 스티븐에게 애나, 킴, 밥 중 한 명을 죽이지 않으면 세 명 모두 죽을 것이라 경고한다. 스티븐의 의료 사고로 죽은 환자의 아들인 마틴이 저주를 내린 것.

▲ 영화 <킬링 디어> 스틸 이미지

감독은 고대 그리스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에서 모티프를 얻었다고 했다. 그리스 신화의 미케네 왕 아가멤논은 전 그리스 군을 이끌고 트로이 정복에 나서려 하지만 여신 아르테미스의 분노를 산 벌로 출항이 불가능해지자 신탁을 통해 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양으로 내세운다.

소재는 유사하지만 내용은 굉장히 복잡하다. 마틴은 스티븐에게 “당신이 내 아버지를 죽였으니 당신도 똑같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라며 “세 가족 중 한 명을 직접 죽여야 한다"라고 선언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세 가족이 차례로 하반신 마비-거식증-안구 출혈-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

식물이 아닌 사람에게 걷고 뛴다는 건 각종 편리함을 넘어 생존에 절대적인 데다 행복감도 준다. 식사는 생존에 필수지만 현대사회에선 먹는 즐거움의 비중도 크다. 눈에서 흐를 건 눈물이다. 어느 부위건 피가 흐르는 건 무서운데 그게 상처가 아니라 눈이라면 공포감은 최상일 것이다.

세 청소년은 털과 초경 얘기를 한다. 밥은 마틴에게, 마틴은 스티븐에게 각각 겨드랑이 털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다. 스티븐은 마치 수사자처럼 이목구비를 제외한 얼굴 전체가 수염으로 덮여있다. 털은 어른으로 자라 지도자가 된 자의 권위와 권력을 상징한다. 음모 역시 마찬가지다.

▲ 영화 <킬링 디어> 스틸 이미지

마틴은 부부싸움 중 ‘처녀의 음모’를 거론하고, 애나의 핸디캡을 거침없이 입에 담는다. 킴이 생리를 시작한 건 육체의 기능이 남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는 것. 킴의 초경은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의 ‘성스러운 피’를 연상케 한다. 그녀는 초경을 계기로 이중적이고 천박한 속내를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킴이 신화 전설 예술 문화 감성이라면 밥, 스티븐, 애나는 과학 논리 이성이다. 그런데 마틴이 마치 신이라도 된 듯 그들에게 벌을 내리겠다는 불합리한 선언을 한 걸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건 이 영화가 부조리극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독과 소통의 불합리 속에서의 존재 및 죽음에 대한 공포를 다룬 것.

과학적 인식론을 근거로 합리주의를 추구했던 스티븐과 애나가 마틴의 저주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관념론적 합리주의를 거부하는 실존주의로 이념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 근거는 매우 이기적인 데 있다. 결혼 16년 된 두 사람의 밤은 아직도 뜨겁다. 그게 사랑일까?

애나는 아직도 섹시하다. 심지어 매튜가 추파를 던질 정도다. 게다가 저명한 안과 의사다. 스티븐 역시 명망 높은 심장 전문의다. 공들여 구축한 성(체제)을 지키기 위해 구성원 중 일부를 내놓아야 한다는(구약성서의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희생양으로 바친) 설정은 그리스 신화엔 숱하다.

그 아이러니를 영화는 우상 숭배에 대한 비아냥거림으로 살짝 비튼다. 불안과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객관성과 충돌하는 이기주의 및 개인주의로. 그래서 집중하는 곳은 딜레마다. 카뮈는 인간과 세계는 부조리의 상태에서 계속 부조리한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 영화 <킬링 디어> 스틸 이미지

부조리가 야심, 방종, 질투 등을 만연시킴으로써 인간에게 무의미하고 맹목적인 생활의 운명을 부여했기에 반항적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세상은 불합리, 불가해, 모순 등으로 점철돼 있다. 모든 상황과 선택은 딜레마고, 완벽함도 완벽한 행복과 선택도 없다. 최선책은 없고 잔인한 차선책은 있다.

마틴은 비유와 상징을 설명한다. 겉으로 보이는 항상성들의 정합성(철학)의 부정합성(지질학)을 뜻한다. 애나와 킴과 밥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깨닫는 순간 매우 가식적으로 변한다. 애나는 스티븐이 좋아하는 옷을 입고, 킴은 엄마에게 사과한 뒤 자신이 희생하겠다고 거짓말을 한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머리를 길렀던 밥은 스스로 머리를 자른 뒤 아버지처럼 심장 전문의가 되겠다고 아부한다.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 이중인격인지 정말 심장이 서늘해지는 영화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마지막 시퀀스의 불꽃 튀는 배우들의 연기 하나만으로도 볼 만한 수작이다.

팝콘을 끼고 관람하는 스타일의 관객이라면 절대 선택 금지. 2시간 동안 감독과 두뇌게임을 벌이고 싶고, 관람 후 지적인 허영심의 뿌듯한 만족감을 추구하는 관객이라면 강력 추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결말은 에우리피데스에 대한 존경심이다. 121분. 청소년 관람 불가. 7월 12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