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주피터스 문>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헝가리 출신 코르넬 문드럭초 감독의 새 영화 ‘주피터스 문’은 민감한 종교와 정치 문제를 판타지 트레이지디로 풀어낸다. 내전 8년을 넘기며 ‘제2의 이라크 사태’라 평가받는 시리아의 정치적 문제와 더불어 그들처럼 구 소련 등의 침략과 지배를 거친 헝가리의 현실과  유럽의 미래를 말하는 진지한 작품이다.

헝가리 의사 스턴은 어느 크리스마스이브에 위스키를 진탕 마시지만 병원 측의 급한 호출에 달려가 수술을 하다 실수로 환자를 죽인 뒤 소송에 휘말렸다. 면허까지 박탈당한 그는 원고를 매수할 돈을 마련하려고 경찰 간부 라슬로의 도움으로 난민 수용소에서 불법으로 난민을 빼돌리고 있다.

시리아 청년 아리안은 아버지 등 여러 명과 함께 국경을 넘다 수비대에 들켜 총기 사격을 받는 천신만고 끝에 아버지와 헤어진 채 헝가리 땅에 들어오지만 라슬로의 총에 맞는다. 라슬로는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혼비백산한다. 죽어야 마땅할 아리안이 살아나 공중으로 부양하는 것.

스턴은 연인인 수간호사 베라가 일하는 병원에서 총알 3발을 맞고도 멀쩡한 데다 공중 부양까지 하는 아리안을 보고 경악한다. 그는 해외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동료 의사 란토스를 대신해 왕진에 나서 환자에게 신의 기적을 보여준다며 아리안을 공중에 띄워 큰돈을 뜯어낸다.

▲ 영화 <주피터스 문> 스틸 이미지

라슬로는 헝가리에 들어온 아리안을 스턴이 돕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스턴의 집을 급습한다. 스턴은 간발의 차이로 아리안을 데리고 도주하는 데 성공하지만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는 아리안과 갈등한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목표액을 벌어 원고를 달래 소송을 취하시켜야 하기 때문.

아리안을 잡으려 혈안이 된 라슬로와 경찰, 오직 아버지와의 재회가 목표인 아리안, 아리안을 이용해 한탕 해 의사로 복귀한 뒤 베라와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려는 스턴, 웬일인지 스턴과의 관계 후 눈물을 보이는 베라, 이들의 끝은 어떻게 될까? 아리안의 초능력은 어떤 결말을 가져올까?

시리아는 중동의 용광로다. 국민 다수가 수니파지만 장기집권 중인 아사드 집안과 그 추종세력은 시아파다. 러시아는 지중해에 거점을 마련할 요량으로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고, 범 수니파 아랍연합을 구상 중인 이란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미국은 반군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내전이 외세 개입으로 확전 된 혼란의 국가에서 약자인 국민만 고통을 겪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하는 건 집단 탈출. 9세기 말 러시아에서 이주해 온 마쟈르 족이 대부분인 헝가리는 몽골, 터키, 오스트리아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고 근현대에 소련의 위성국이 되기도 했다.

▲ 영화 <주피터스 문> 스틸 이미지

시리안이 갈망하는 천국이 헝가리지만 헝가리안에게도 그럴지는 미지수라는 뉘앙스가 영화 전편에 걸쳐 흐른다. 신부가 성경을 선물하려 하자 스턴은 “난 성경 안 읽어요. 종교가 헝가리를 부활시킬까요?”라고 묻는다. “이 나라는 온통 회색”이란 대사도 등장한다. 어둡고 정체성이 불명확하다는 얘기.

라슬로는 전형적인 제노포비아의 상징이다. 한때 독재자들이 정권 유지를 위한 선전도구 세트에 끼워 넣은 단일민족이란 억지를 이젠 믿을 사람이 없듯 세계적 추세가 다민족, 다문화의 수용이다. 스턴 집의 유리창에 붙은 벌레 사체와 죽은 새는 외국인 혐오증이자 그로 인해 병든 국민적 정서다.

이렇게 전편에 걸쳐 의도적으로 돌출된 외국인 혐오증은 사회적 편견에 대한 문화적 비판으로 확산된다. 스턴의 단골 술집 주인은 “사람들은 게이가 문란한 줄 알지. 그런데 잘 깨지는 건 이성 커플이야”라고 말한다. “나이 먹으니 도덕관념이 희박해져”라는 대사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큰 공감을 줄 듯.

인도-게르만 어족 계열로 인도에 정착한 아리아인을 지칭하는 아리안이란 이름은 참으로 노골적이다. 그들은 혼혈을 권장했고 여러 신을 섬겼다. 그래서 아리안은 신이 보낸 천사지만 기독교로만 국한하는 건 금물이다. “천사를 믿어. 왜 성경에 천사 얘기가 많은데”라는 대사 역시 마찬가지.

▲ 영화 <주피터스 문> 스틸 이미지

갑자기 스턴이 아리안 앞에 무릎을 꿇고 신발 끈을 묶어주자 아리안이 스턴의 머리에 손을 얹는 장면은 기독교도는 예수를, 불교도는 부처를 연상하면 될 따름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장기로 결정된다”라는 대사는 외모가 아니라 내면이 중요하고, 내면이 결정하는 종교적 차이 또한 존중돼야 한다는 의미.

공중 부양한 아리안이 건물 외벽 가까이에서 서서히 하강하며 유리창을 통해 비치는 각 집안의 다양한 군상을 바라보는 시퀀스는 신이 우리를 항상 내려다보고 있으니 심신을 정갈하게 하라는 뜻. 스턴의 “그동안 우리는 위를 쳐다보지 않고 수평적으로 살아왔다”는 반성이 그 맥락을 잇는다.

“예전엔 희망이 있던 시대가 있었어. 과거의 고통에서 벗어날 곳은 없어. 신은 인간이 창조한 가장 기발한 생각”과 “아리안, 너는 메시지를 갖고 온 거야”라는 대사의 충돌은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이항대립이다. 작은 침대 위에 스턴과 아리안이 엇갈려 누운 것도 모순과 아이러니로 이뤄지는 균형이다.

아이가 숫자를 세는 마지막 시퀀스는 새 세계가 올 때까지 새 천사가 계속 올 것이란 예고다. 삶(중력)과 죽음(무중력)의 철학을 담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나 희생을 통한 구원과 희망의 종교적 철학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 살짝 엿보인다. 128분. 15살 이상. 8월 2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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