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 사진=EBS 화면 캡처

최고회의 940일만에 해체하다

1963년 후반기의 정치상황은 급변 그 자체였다. 10월15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당선된 한 달 뒤인 11월26일의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박 의장이 이끄는 공화당이 압승을 가뒀다. 이어 12월17일 제6대 국회 개원과 함께 새 헌법이 발효됨으로써 파란의 제3공화국이 공식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이보다 하루 앞선 12월16일 오후 2시 정각. 최고회의청사(지금의 미대사관 옆 공보처 건물) 앞뜰에서는 역사적인 의식이 거행됐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박 의장과 이주일 부의장, 김희덕 재경위원장, 그리고 조진만(趙鎭滿)대법원장, 김현철 내각수반을 비롯한 각료들과 전(前) 최고위원들을 포함한 모든 최고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940여일만에 최고회의가 해체되는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5.16거사 후 2년7개월동안 입법 사법 행정 등 3권을 모두 장악하고 대한민국 권력의 핵심으로 군림해왔던 최고회의가 마침내 종지부를 찍는 의식이 거행됐다. 회고회의 건물 8층 옥상에 게양됐던 최고회의 깃발(하늘색 바탕에 가운데 태극문양과 둘레에 별이 새겨짐)이 내려졌다. 곧이어 박 의장이 고별사를 했다.
“오늘로써 파란과 격동의 5월혁명은 일단 매듭을 짓게 됐지만 5월의 구국혁명이 민족과 국가에 필요한 제반 명제는 계속 추구해나갈 것입니다...”

평소 냉정하고 침착한 박 의장의 목소리는 이 날따라 사뭇 떨리면서도 감회가 어렸다. 김희덕 장군을 비롯한 대부분의 참석자들도 향후 정국구도와 5.16 당시를 오버랩시키면서 숙연해지는 모습들이었다. 황종갑(黃鍾甲)총무처장이 그동안의 운영실적을 보고했다.
“그동안 최고회의는 67차례 본회의와 274차례의 상임위원회의가 개최되었고 이 기간 중에 제정되거나 정비 또는 개정된 법률안건의 수는 157건에 달했습니다...”

황 처장의 보고는 계속됐다.
“당초 30명으로 출발했던 최고위원들은 여러 차례 개편을 거듭한 끝에 지금까지 상당수가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곡절을 겪었습니다. 적을 때는 21명의 위원들에 의해 희의가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이 날의 행사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참석자들 중에는 자신의 처지에 따라 다소 희비가 엇갈리기도 했다. 최고위원 중 대부분은 민정에 참여했으나 군으로 원대복귀한 사람은 17명이었다. 특히 반혁명 사건으로 영어의 몸이 된 사람과 재야에 묻힌 사람이 각각 13명이나 됐다. 예비역으로 있다가 혁명직후 특별법을 재정하여 현역에 복귀한 행운의 주인공은 김종필과 김동하(金東河)소장 등 두 사람이었다. 이 날 행사의 마지막은 훈장수여. 김희덕 장군 등 3공화국 탄생에 공이 큰 최고위원들 대부분이 훈장을 받으면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 사진=EBS 화면 캡처

“미국서 비밀회동, 과학기술연구소 만듭시다”

군복귀를 희망했던 김 장군은 군발전에 기여하고자 1964년초 하버드대 최고경영자과정에 들어갔다. 학비는 미국무성의 도움으로 충당했다. 그는 유학 중 박정희 대통령과 매우 중요한 비밀회동을 하게 된다. 1965년 5월16일 박 대통령은 존슨 미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게 됐다. 워싱턴의 의전관례에 따라 박 대통령은 원싱턴 방문에 앞서 하루 전 윌리엄스 버그(영국 식민지때의 수도)에 도착, 여정을 풀었다.

이 날 저녁 미국측이 환영만찬을 베풀었다. 한국측에서는 박 대통령 내외와 김현철 주미대사, 오치성(吳致成)공화당부총무가 참석했고 김희덕 장군 내외가 특별히 초청됐다. 특히 박 대통령과 김 장군은 일년여만에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자리였다. 고국소식과 미국생활 등으로 둘은 만찬이 이루어지는 동안 격의없이 많은 얘기를 주고 받았다.

이윽고 만찬이 끝났다. 다들 헤어질 시간이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갑자기 “김 장군, 지금 내 침실에 잠시 왔다 갔으면 좋겠소.”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일까. 김 장군은 부인한테 잠시 밖에서 기다리라고 일러두고 혼자 박 대통령의 침실을 노크하면서 문을 열었더니 육영수 여사가 침대 위에서 박 대통령의 무릎을 주무르고 있었다. 김 장군이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짓자 육 여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 양반 성격 잘 아시잖아요. 어서 들어오세요.” 하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도 몸을 일으키며 “어서오시오.”라고 했다.

박 대통령과 김 장군은 침실 옆에 마련된 응접실로 자리를 옮겨 마주 앉았다. 박 대통령 이 말문을 먼저 열었는데 표정이 매우 진지해 보였다.
“김 장군은 미국에서 생활해보니 이곳의 발전상을 잘 알 것이오. 김 장군도 알다시피 우리한테 절실히 필요한 것은 경제개발을 가속화하는 것이오. 내일 존슨 대통령을 만나면 뭘 하나 부탁을 해야 하겠는데 혹시 뭐 좋은 생각이 없소?”

성격이 급하고 평소 소신이 있던 터라 김 장군이 즉시 의견을 제시했다.
“각하, 우리 민족이 살 수 있는 것은 과학기술뿐입니다. 우리나라에 뭐 뚜렷한 부존자원이 있습니까, 석유 한 방울 나옵니까, 결국은 두뇌입니다. 두뇌양성만이 경제개발을 가속화할 수 있고 선진국 대열에 올라설 수 있습니다. 미국은 첨단 과학기술이 뛰어납니다. 각하, 내일 존슨 대통령을 만나게 되면 무조건 과학기술연구소를 하나 만들어달라고 하십시오.”

박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나도 그런 생각을 안해 본 것은 아니오. 김 장군의 얘기를 들으니 새삼 용기가 나는 것 같소.”

김 장군의 얘기는 계속됐다.
“각하, 하버드에 와 보니 우리 경제가 너무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우리 기업은 미국에 비하면 구멍가게에 불과합니다. 제가 하버드에 있는 동안 좋은 친구 몇 사람을 사귀었습니다. 하와이에서 드링햄이라는 재벌기업을 운영하는 한 친구가 있는데 한국의 과학기술발전을 위해 1천만달러 정도는 기꺼이 투자할 용의가 있다고 했습니다. 또 하버드대에 레너드 박사라는 친구가 있는데 컴퓨터뿐만 아니라 첨단과학 분야에도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으며 과거 장개석(蔣介石)총통의 고문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는 한국에 대한 관심도 많은 사람입니다. 제가 의사타진을 해봤는데 한국 경제발전을 위해 기꺼이 ‘고문역’을 맡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만약 그 친구를 한국에 초치하게 되면 그의 제자, 동료 등 내노라 하는 석학들이 고구마줄기처럼 줄줄이 따라오게 돼 있습니다. 특히 미국 친구들은 프로젝트만 좋으면 아낌없이 투자하는 관행이 있습니다. 존슨 대통령한테 과학기술에 대한 원조만 약속받으면 제 나름대로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 대통령은 ‘굿 아이디어’를 연발했다. 박 대통령은 또 김 장군에게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게 되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주어야 좋겠느냐고 물었다.

“두뇌센터, 즉 아이디어뱅크를 만드는 것입니다. 무기 원격조정 장치도 의학박사가 개발해낸 아이디어입니다. 심장 수술 과정에서 인풋과 아웃풋의 논리에서 얻어진 것이지요. 각하, 여의도 땅 만평만 주십시오. 21층짜리 건물을 짓고 동양최대의 ‘두뇌센터’를 만들 생각입니다. 아이디어 생산공장이지요. 건축비용은 하와이 재벌친구가 투자한다고 했습니다. 미국의 석학들과 한국의 인재들을 한데 모아 기술개발 아이디어를 생산할 것입니다. 또 과학기술의 발전은 자동적으로 무기의 현대화를 의미합니다.”

김 장군의 말을 듣고 있던 박 대통령은 매우 고무된 표정으로 “좋소, 그렇게 해봅시다. 되도록 빨리 귀국하도록 하시오.”라고 말했다. 또 박 대통령은 아이디어를 줘서 고맙다고 여러번 강조했다. 김 장군도 박 대통령의 반응이 좋자 빠른 시일내에 귀국하겠다고 약속했다. 둘만의 극비회동은 여기서 끝났다. 하지만 이 날의 만남을 생생하게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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