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공작>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공작’(윤종빈 감독)은 관객에게 정치적 진실을 까발릴 것이란 점에서 충격파다. 남측 정부가 북측의 핵 보유 여부를 파악하는 데 모든 혈액을 집중하고 있던 1993년 안기부 해외실장 최학성(조진웅)은 육군 정보사 소령 박석영(황정민)을 대북용 공작원으로 스카우트해 흑금성이란 암호명을 붙인다.

바로 자원 전역한 석영은 사업을 한답시고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 흥청망청 쓰는 등 통 큰 사업가로 철저하게 신분을 세탁한 뒤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간다. 북측의 여러 인물들을 접촉하며 사업가로서의 존재를 알린 그는 드디어 북측 베이징 주재 대외경제위 처장 리명운(이성민)과 만나는 데 성공한다.

외화벌이의 총책임자인 명운은 그동안 석영에 대해 충분히 조사한 뒤 판단한 듯했다. 돈벌이가 급한 그는 석영에 믿음을 보내지만 함께 근무하는 국가안전보위부 과장 정무택(주지훈)은 끊임없이 석영을 의심하고 감시하며 확인하는 데 주력한다. 석영은 명운에게 광고 사업을 제안한다.

북측의 훼손되지도, 널리 알려지지도 않은 수려한 경관을 배경으로 상업용 광고를 찍는다고 하면 남측 기업들이 앞다퉈 달려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엄청난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것. 명운은 이를 김정일 위원장에게 보고하고 김 위원장은 흔쾌히 허락하지만 때마침 다가온 15대 대선이 걸림돌이 된다.

▲ 영화 <공작> 스틸 이미지

여론조사 결과 제1 야당 후보인 김대중이 집권 여당 후보인 이회창을 앞서는 것으로 드러나자 안기부장이 오금이 저린 상태가 된 것. 부장은 1년 전 총선 때 북측의 도움으로 여당의 압승을 이끌어낸 것처럼 이번에도 거액을 조건으로 지난해보다 더 큰 무력시위를 부탁하는 SOS 신호를 보낸다.

만약 그렇게 되면 광고사업은 물 건너 갈 확률이 매우 높다. 애초에 북핵 확인이 임무였던 석영은 명운의 호의와 신뢰에 마음이 변해 이 사업을 성공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커졌다. 만약 사업이 어긋나면 김 위원장의 실망이 커져 명운의 입지는 물론 생명까지 위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과연 둘의 운명은?

첩보영화지만 ‘미션 임파서블’ 같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액션은 없다. 대신 절묘한 로케이션과 후반작업으로 구현해낸 북측의 풍광이 볼거리고,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심리 게임이 웬만한 스릴러를 찜 쪄 먹을 듯한 지적인 유희다. 석영-명운-학성-무택 등의 얽히고설킨 심리전은 백미다.

황정민과 이성민의 연기 대결은 그야말로 명불허전이다. 명운의 석영에 대한 신뢰가 진정성에 근거한 것인지, 믿어야만 하는 간절함 때문인지 아리송하게 표현하는 이성민이 태풍의 눈이라면 명운, 학성, 무택에 대한 오만가지 감정을 소용돌이치는 듯 그려낸 황정민은 싹쓸이 바람 그 자체다.

▲ 영화 <공작> 스틸 이미지

다만 ‘신과 함께-인과 연’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해원맥으로 관객과 먼저 만날 주지훈이 그린 무택의 누가 봐도 과하게 진지한 캐릭터가 얼마나 현실적으로 관객에게 몰입될지가 미지수. ‘브이아이피’가 카 체이싱 등 나름대로 액션의 볼거리를 갖췄음에도 관객에게 크게 어필하지 못한 점도 비교 포인트.

그럼에도 담고 있는 메시지와 교훈만큼은 단연 발군이다. 실존 인물 흑금성을 통해 밝혀지는 내용은 이미 널리 알려졌음에도 놀랍다. 보수정권이 권력 유지를 위해 선거 열세 등 위기 때마다 전가의 보도로 사용해온 이른바 ‘북풍’이다. 정체성이 모호한 기득권 세력이 어떤 목적으로 유지됐는지에 대한 교훈.

학성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렇게 싸운다"라고 북풍 조작을 합리화하지만 사실은 진보정권이 들어서면 그동안 본래의 안보 의무를 저버린 채 불순한 정치적 목적에 혈안이 됐던 안기부가 해체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다. 여기서 국가에 대한 개념이 엇갈린다.

그에겐 ‘보수정권’(대통령)이 곧 ‘국가’다. 이 얼마나 황당한 논리인가? 스스로 국부라 칭한 이승만부터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자는 통치철학이라는 말이 안 되는 용어를 만들었다. 대통령이 국가의 아버지라면 국민은 그의 자식이란 시대착오적인 군림에 많은 국민이 복종하다가 한국전쟁 때 희생됐다.

▲ 영화 <공작> 스틸 이미지

고대에도 민주주의가 엿보였던 그리스에서 시작된 철학은 일찍부터 인권을 넘어선 인격에 고뇌하며 진리와 지혜를 사유했다. 통치란 나라를 도맡아 다스림인데 철학에 그런 군주제는 없다. 헌법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이에 비해 석영과 명운은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다. 석영은 남측 국민에게 가장 위협이 될 북측 핵의 존재 여부 확인에 ‘올인’하는 공작원 본연의 임무에 충실함으로써 정녕 국가에 충성하는 게 뭔지 보여주는 한편 명운과 발을 맞춰 남북 공통으로 윤택해질 사업에 매진하는 사업가 기질도 보여준다.

북측 국민이 김 위원장을 맹목적으로 흠숭하고 무조건적으로 복종할 때 명운은 목숨을 담보로 직언을 서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최근 무려 300만 명이 굶거나 얼어서 죽은 북측의 국민을 위해서다. 흑금성은 2010~15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실형을 살았다. 21세기에 이런 토사구팽이 있다니.

‘삶의 요람’과 ‘호연지기’가 미장센으로 쓰이는 건 의미심장하다. 석영과 명운은 ‘국가’가 다른 적대국의 국민인 동시에 같은 민족이다. 그러니 정치적 색채나 이데올로기를 떠나 남자로서의 호연지기로써 양국과 민족의 삶의 요람을 위해 큰 그림을 그리자는 얘기. 137분. 12살 이상. 8월 8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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