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 사진=KTV 화면 캡처

1.21사건 “무장공비를 소탕하라”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 수많은 사건이 벌어졌지만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두 가지 을 꼽으라면 무엇일까. 그 첫 번째는 1968년 1월21일에 발생한 북한의 무장공비 김신조(金新朝)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이고 두 번째는 1974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행사장에서 벌어진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일 것이다.

특히 1.21사건으로 허를 찔린 박 대통령은 “어떻게 청와대 앞까지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라는 말을 되뇌이며 한동안 식음을 중단할 정도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주변 측근에서는 이에 대한 보복작전을 생각하다가 비밀특공대를 조직, 인천 앞바다 실미도에서 극비리에 훈련을 시키게 된다. 물론 나중에 특공대원들의 난동으로 들통나기는 했지만 철저히 비밀에 붙여 은밀히 진행됐다. 이들은 북한의 주석궁 습격을 목표로 한 특수부대라는 점에서 당시 박 대통령이 얼마나 분개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박 대통령은 1.21 직후 대대적인 군조직 개편에도 손을 대 차후에 생길 일을 대비했다.

1.21사건은 청와대 인근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일반 국민들에게도 큰 충격을 줬으며 아직도 그에 대해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당시 수경사령부 참모장으로 근무했던 전성각 장군 역시 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다. 수경사령부는 서울지역을 관할하는 부대였으니 더욱 그렇다. 전 장군을 통해 1.21사건을 되짚어본다.

“그러니까 1968년 1월21일 밤 10시쯤이었습니다. 퇴근 후 집에서 쉬고 있을 때 수경사 상황실에서 긴급 연락이 왔지요. 청와대 입구 바로 옆 효자동에서 무장공비와 교전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부대로 복귀했다. 도착해보니 수경사 상황실은 이 엄청난 사건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대처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그는 상황장교로부터 간단한 보고를 받았다. 원래 참모장이라는 자리는 유사시 적절한 작전시나리오를 세워 사령관을 보좌하도록 되어 있다. 상황장교에 의하면 일단의 공비들이 버스를 탈취하고 자하문 고개까지 이르렀으며 여기서 경찰과 약간의 총격전을 벌이다 지금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 상태라는 것이었다.

전 장군은 신고 있던 단화를 벗고는 전투화로 갈아신으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장교들은 이 광경을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이 긴박한 와중에 어떻게 태평스러울 수가 있느냐는 표정들이었다. 전 장군은 이들한테 “이놈들아 뭐가 이상해! 너희들은 실전경험이 없지. 전투에서 침착하지 않으면 모조리 죽는 것이야.”라고 말하면서 지프를 부르도록 했다. 완전무장을 마친 전 장군은 지프를 타고 경복궁에 위치한 예하 30경비단으로 향했다. 이미 최우근(崔宇根,육사3기)수경사령관이 도착해 있었다. 상황이 너무 긴박하게 돌아가기 때문인지 다들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최 사령관은 여기저기에서 걸려오는 전화와 기자들의 질문공세에 시달리느라 아무런 작전조차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침투한 공비 숫자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수경사령부는 며칠 전부터 비상에 돌입했다. 무장공비로 보이는 괴한들이 미2사단 지역의 경계망을 뜷고 서울쪽으로 남하했다는 보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2~3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자 긴장이 풀리면서 우리 경계망이 쉽게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 사진=KTV 화면 캡처

경복궁 30경비단에 임시 지휘부 설치

전 장군은 베트남전에서 게릴라전을 익혔던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우선 작전참모를 별실로 불러 소탕작전을 벌이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사령관은 여전히 국방장관 등으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받기에 여념이 없었다. 잠시 후 전 장군은 최우근 사령관에게 소탕계획을 간단히 브리핑을 했다. 최 사령관은 이를 듣고는 흔쾌히 수락했다. 전 장군은 우선 수경사 예하 33경비단을 불러 청와대 북쪽 외곽을 담당케 하고 특전사 예하 공수여단 전 병력을 구파발 지역으로 출동시켜 공비들의 퇴로를 차단했다. 그리고는 육본 헌병대를 불러 청와대를 중심으로 한 남쪽 외곽을 철저히 경계토록 지시했다. 청와대가 기습위기에 놓인 이상 30경비단(단장 전두환 중령)은 임시로 마련된 지휘부였다. 수도권 인근 부대는 모두 30경비단 상황실의 지휘를 받았고 그러한 작전은 전 장군의 지시대로 움직였다. 비록 한밤중이었지만 청와대를 중심으로 한 서울 일원은 일단의 공비를 소탕하기 위한 병력으로 일사불란하게 겹겹이 에워싸여졌다. 전 장군은 이제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아침 햇살이 30경비단 상황실의 창문까지 스며들었다. 30경비단의 한 소령한테 긴급 무전연락이 왔다.
“참모장님, 공비 3명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적을 발견했다는 기쁨보다 무전기의 목소리가 베트남전에서 같이 참전했던 부하라는 점에서 전 장군은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게릴라전에 능한 소대장이었다. 그런 소대장은 이러한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야, 작살내지 말고 그냥 건져봐.”
“알겠습니다.”

잠시 후 전 장군 앞에 놓인 무전기에 빨간 불과 함께 ‘삐’하는 부저음이 울렸다. 그 소대장이었다.
“참모장님, 아무래도 해치워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피해도 예상됩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전 장군은 한 명이라도 생포하여 도대체 어떤 루트로 몇 명이 침투했는지를 알고 싶었지만 게릴라전 경험이 풍부한 그 소대장의 말을 전적으로 믿었다. 전 장군은 더 이상 고민할 필요도 없이 “알았다.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로부터 정확히 10분 뒤 공비 4명을 사살하고 상황이 끝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전 장군은 베트남전에서 베트콩을 사살했을 때 그 소대장의 모습과 무장공비를 사살한 지금의 모습을 번갈아 떠올려보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공비 사살은 이제 시간문제라는 자신을 가졌다.

전 장군의 예상대로 상황보고는 속속 들어왔다. 6군단 상황실에서 공비 중 1명을 생포했다는 소식과 함께 침투한 무장공비는 모두 31명이며 청와대가 목적이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결국 1월22일 아침 한 사람(김신조)만 생포했을 뿐 나머지 30명은 전원 사살되면서 긴박했던 간밤의 상황은 모두 끝났다.

침입루트는 이러했다. 17일 밤 얼어붙은 임진강을 도하한 김신조 일당은 나무꾼 3명을 인질로 잡으면서 경기도 법원리와 앵무봉을 지나 노고산을 거쳐 21일 새벽 북한산 비봉에 도착한 뒤 세검정 일대에서 지나가던 버스를 탈취(아군복장으로)하고는 청와대쪽으로 향하다가 경찰과 교전을 벌였던 것이다. 이 때 종로경찰서 최규식 서장은 버스탈취 소식을 듣고 자하문 근처로 달려가 현장지휘를 하던 중 공비가 난사한 총탄에 순직했다.

이같은 일목요연한 상황전개는 전 장군에 의해 보고자료가 작성됐고 박 대통령에게까지 신속하게 보고됐다. 이어 전 장군은 상황이 종료된 뒤 사살된 공비들의 시체들을 30경비단 연병장에 모아놓고 각 부처 장관과 기자들에게 공개했다. 이 때부터 30경비단은 청와대를 지키는 핵심부대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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