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외곽경호 군병력이 맡아 [김문 작가 칼럼]

김문 작가l승인2018.08.06l수정2018.08.10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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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 사진=KTV 화면 캡처

청와대 외곽경호 군병력이 맡아

수경사 예하 경복궁의 30경비단은 청와대 주변에 있다는 이유로 그 동안 숱한 화제를 뿌려왔으며 우리 현대사의 격랑만큼이나 많은 비화와 야사를 간직하고 있다. 1979년 12.12사건 당시만 하더라도 30경비단(단장 장세동 대령)은 전두화, 노태우 소장, 차규헌(車 圭憲), 황영시(黃永時) 중장 등 이른바 신군부측의 핵심들이 모여 10.26으로 빚어진 권력공백의 상태에서 현대사의 물줄기를 송두리째 바꾼 ‘역사적인 장소’가 됐다.

1.21 직후 청와대 경호실은 대대적인 개편작업에 들어갔다. 군이 경호를 맡은 것도 이때부터였다. 경호실 개편작업은 새로 부임한 차지철 경호실장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졌다. 차 실장은 우선 박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군이 외곽경호를 맡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지근거리의 경호는 청와대 경호실이 맡지만 원격경호는 군이 맡아 상호 완벽한 경호작전을 수행한다는 것이 취지였다. 또 1.21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예로 들면서 완벽한 경호만이 대통령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 차 실장의 주장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를 승인했다. 이에 따라 수도권 지역의 군지휘를 맡고 있는 수도군단장은 자동적으로 경호경비사령관직을 겸직 수행토록 했다. 따라서 수도군단장은 대통령 공식행사가 있을 때마다 차 실장한테 미리 경호경비작전을 브리핑해야 했다.

이 무렵 이상훈 장군이 수도군단 참모장으로 근무했다. 이 때 이 장군은 대통령 경호경비사령부 참모장을 겸임했다. 이 장군은 경호경비사령부 참모장으로 2년동안 근무할 때 수도군단장이 아닌 자신이 직접 차 실장한테 브리핑을 했다. 왜 군단장이 아닌 참모장이 그랬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5.16 직전 육사 7기 출신 조문환(曺文煥 )장군이 1공수 여단장으로 있을 때 차 실장이 직속 부하로 몸담고 있었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 이 장군의 회고.

“내가 수도군단 참모장으로 간 지 얼마 안되어 조문환 장군이 나를 부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직접 차 실장한테 브리핑을 할 수가 없네. 공수단에 있을 때 내 부하였는데 그렇게 할 수 있겠나. 그러니 자네가 내 대신 하게.’라고. 나는 차 실장과는 5.16때 처음 만났고 또 태권도로 맺은 인연이 있어 비교적 친한 사이였다. 조 장군은 이런저런 예를 들면서 나에게 브리핑 숙제를 떠맡겼다.”

경호경비작전은 ‘코드1’으로 명명됐는데 ‘코드1’이란 말은 10.26사건으로 유명해졌다. 1979년 10월26일 거사 직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선호 중정의전과장에게 무장을 시키면서 “오늘 밤 해치운다.”고 하자 박 과장은 “코드1도 포함됩니까?”라고 되물었다. 물론 김 부장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코드1’의 제거를 암시했다. 당시 청와대통신실에서 이루어진 통화내용도 거의 ‘코드1’에 관한 것이었다. ‘코드1과 연락두절’ ‘코드1과 연락두절’이라는 암호명이 거미줄처럼 사방팔방으로 긴박하게 타전됐던 것이다.

1.21 이후 군의 경호작전은 대통령 공식행사장 반경 2킬로미터 외곽을 군인들이 철통같이 경비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일주일 전에는 경호경비사령부에서 차 실장한테 작전계획을 미리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에 관해 이 장군은 “브리핑은 경호실장 집무실에서 이루어졌다. 배석자는 국방부장관, 육군참모총장, 수도군단장 등이었다. 브리핑을 하고 난 후 차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 없으면 작전은 그대로 진행됐다.”면서 “지금 생각해도 그러한 광경이 약간 코믹하게 비춰질 수 있겠지만 그 당시에는 매우 진지했다.”고 말했다.

▲ 사진=KTV 화면 캡처

청와대 30경비단 핵심부대로 떠올라

30경비단은 5.16직후 박 대통령의 지시로 수경사의 창설과 함께 청와대 외곽경비를 위해 일단의 군병력을 주둔시키면서 권력의 최고위층과 호흡을 같이 해왔다. 원래 30경비단은 30경비대대로 출발했다. 그런데 1974년 8월 문세광 사건으로 육영수 여사가 저격되자 박종규 경호실장이 물러났고 차지철 실장이 부임하면서 대대적인 경호력 확충작업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30경비단은 대대급에서 여단급으로 확대개편됐다. 특히 대학교수, 국회의원, 주한 외교사절 등을 초청해 군의 위상과 막강권력의 청와대 경호실을 과시하기 위한 ‘30단 분열식’을 접하게 했다. 따라서 30경비단은 1.21사건 당시 수도권 주요부대를 지휘하며 유사시 작전상황실로서의 명성을 날렸고 10.26때에는 박 대통령의 시해사건을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여 직무유기라는 지적을 받는 등 찬사와 비난을 받는 묘한 지정학적 장단점을 안고 지내왔다. 어쨌거나 30경비단은 그 위상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한 부대임에는 틀림없다고 군출신들은 말한다.

전 장군이 30경비단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21사건 당시 수경사 참모장으로 작전지휘를 했을 때였다. 사건수습을 잘했다는 평가를 받은 전 장군은 박 대통령의 신임을 바탕으로 1976년 6월 경호실차장(소장)에 임명되자 30경비단을 어느 정도 장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기에 이른다. 1.21때 생긴 실미도 사건에 대한 내용은 잠시 뒤로 미루고 30경비단 얘기를 먼저 해보자.

스틸웰 미8군사령관의 수모

전 장군은 청와대 입성직후 하나의 사건을 접하게 된다. 다름 아닌 주한 미8군사령관 스틸웰의 이임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가 30경비단 연병장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1976년 말쯤이다. 여느때처럼 집무실에서 근무하고 있던 차지철 경호실장은 하나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며칠 후면 한국을 떠날 스틸웰 사령관을 청와대로 불러 콧대를 꺾어놓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차 실장은 평소 미국에 대해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특히 권위적이고 매사에 원칙론을 고수하는 스틸웰 사령관에 대해서도 그러한 감정을 복선에 깔고 있었다. 당시 스틸웰 사령관은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으로 미군 장교 2명이 살해되자 그 후속조치로 문제의 미루나무를 절단하는 작전을 성공리에 수행, 국내외 언론으로부터 집중적인 관심을 받고 있었다.

스틸웰이 주도한 작전은 이러했다. 도끼만행사건 3일 뒤인 8월21일 새벽 7시 한미 양국군은 데프콘2(전쟁돌입 경계태세) 발령을 하달하고 문제의 미루나무 절단작업에 나섰다. 작전명은 ‘폴 버년’(전설 속에 나오는 나무꾼의 이름)이었다. 포드 대통령의 재가를 얻는 스틸웰은 북한측을 향해 “미루나무를 절단하는데 있어 만약 우리측 작업반에게 손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전쟁이 나는 줄 알라.”고 비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어 스틸웰은 B52폭격기 3대, 무장헬기 26대, F4 및 F111 전폭기 수십대를 발진시켜 판문점 상공을 겹겹이 엄호케 한 뒤 한미 양국군 기동타격대를 투입시켰다. 특히 이 절단작업에는 16명의 작업반을 비롯, 권총과 도끼자루로 무장한 30명의 경비소대, 비무장 무술유단자인 한국군 특전사요원들도 가담했다.(한국군 관련은 나중에 자세히 언급한다.) 결국 이같은 무력시위에 북한군 병사들은 ‘돌아오지 않는 다리’ 건너편에서 사진만 찍었을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날 오후 김일성은 “이러한 사태가 일어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쌍방은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스틸웰에게 보내옴으로써 사령관의 진가를 발휘했던 것이다.

이러한 스틸웰은 이임을 앞두고 청와대 초청에 거절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특히 유엔군사령관직을 마감하는 자리에서 한국의 대통령으로부터 ‘지휘도’를 받는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휘도는 청와대의 권위를 상징하는 약 2미터 길이의 긴 칼로 차 실장은 행사때마다 허리에 차고 다닐 만큼 애용했으며 경호실에 별을 단 군인, 즉 경호실차장과 차장보를 두면서 전입신고때 차 실장이 직접 수여했다.

드디어 스틸웰이 초청됐다. 장소는 30경비단 연병장. 사열병력들이 연병장에 질서정연하게 서 있었다. 차지철 경호실장과 전성각 장군 등 경호실 간부들이 단상에 올랐고 스틸웰은 황영근(黃英根, 해운공사 사장) 통역보좌관의 안내로 차 실장 옆에 나란히 앉았다. 임석상관에 대한 경례가 있은 후 “지휘도 수여가 있겠습니다”라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왔다. 의자에 앉아 있던 차 실장이 단상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스틸웰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이유는 박 대통령으로부터 지휘도를 받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차 실장이라는 사실에 적이 놀랐던 것이다. 반면 차 실장은 만족한 듯 시종 미소띤 모습이었다. 스틸웰은 불쾌했지만 도리없었다. 결국 4성장군이자 유엔군사령관인 스틸웰은 공수부대 대위출신에 불과한 차 실장에게 지휘도를 받는 수모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전성각 장군도 스틸웰의 불쾌함과 차 실장의 통쾌한 마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특히 육군소장인 전 장군은 스틸웰의 마음이 어떠할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다음 순서는 사열이었다. 전 장군은 스틸웰을 안내하며 사열차에 올라 연병장에 정렬해 있는 병력들을 사열했다. 그러나 스틸웰의 안색은 일그러진 표정 그대로였다. 전 장군은 행사가 끝난 뒤 다과회 장소에서 스틸웰과 악수를 하면서 짤막하게 아쉬움을 표했다. 결국 스틸웰은 이 날 박 대통령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속았다는 마음을 안고 돌아갔다. 당시 참관했던 관계자는 이런 모습을 보고 일대 사건이나 다름없다고들 말했다.

차지철의 국기강하식 쇼

이처럼 1970년대 중후반 당시의 ‘30경비단 행사’는 여러 가지 형태로 이루어졌다. 국회의원, 대학교수, 주한 외교사절 등을 30경비단으로 초청한 가운데 분열과 사열행사를 함으로써 경호실의 권위와 위엄을 내보였다. 초청된 인사들은 그 어떤 제의에도 거절하지 못했으며 더러는 차 실장 앞에서 적극적인 아부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행사에 대통령은 한번도 참석하지 않았으며 다만 초청인사의 명단과 프로필이 보고가 됐을 뿐이었다, 정치인들은 직접 경호실에서 명단을 작성했으며 대학교수 등 학자들은 서울대 최모 교수가 연락책을 맡았다. 초청의 명분은 주로 ‘국기하강식’이었다.

당시 국기하강식에 참석했던 대학교수들은 노재봉(盧在鳳 서울대), 이현재(李賢宰 서울대), 김덕(金德 외국어대), 이홍구(李洪九 서울대), 조순(趙淳 서울대), 고병익(高柄翊 서울대) 등 매우 주목받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조순 교수는 별도의 특강시간을 마련해놓고 경호원들에게 국내외 경제문제 등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국회의원은 박찬종(朴讚鍾 공화), 오유방(吳有邦 공화), 오준석(吳俊碩 공화), 장승태(張承台 공화), 고재필(高在珌 유정회), 황병규(黃秉奎 공화), 윤인식(尹仁植 공화) 등 여당의원이 대부분이었으며 일부 야당의원도 초대됐다. 이밖에 장관, 각군 총장, 우방국 대사 등을 초청해 청와대 경호실의 위세를 과시했다.

▲ 사진=KTV 화면 캡처

차지철 경호실장 대통령에 버금가는 행세

차 실장이 이런 행사를 열게 된 목적은 △경호실을 무력시위함으로써 청와대는 그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신성불가침이며 △따라서 그것을 장악한 차 실장의 위상은 곧 박 대통령에 버금가는 것과 다름없음을 알리기 위해서라는 게 당시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그렇다면 무소불위의 권위를 내보였던 국기하강식과 30경비단의 분열식행사는 어떠했을까. 우선 당시 초청됐던 한 전직 장관의 말을 빌려보자.

“한마디로 목불인견이었다. 일개 경호실장이 장관들 앞에서 잔뜩 위세를 부리며 주역 행사를 하니 뭔가 거꾸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국회간부들이나 3군의 참모총장, 그리고 국무위원들이 차 실장의 초청을 받아 거절도 못하고 참석해서 그가 꾸며내는 ‘쇼’을 꼼짝없이 구경해야 하는 판이었으니 세상이 무섭게 돌아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지철의 행세는 경호실장도 아니고 부통령도 아니며 바로 대통령과 같은 행세였다.”

이러한 행사에 동원된 부대는 30경비단을 비롯 33경비단, 33헌병대, 경찰서에서 파견된 101경비대와 22지역대(사복경찰팀) 경호관 등이었다. 탱크 및 장갑차 등 중화기도 동원됐다. 순서는 이러했다. 오후 5시 무렵 병력들이 완전히 분열위치에 질서정연하게 서 있으면 제병지휘관(경호실 작전차장보)은 지휘 위치에서 차 실장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 날 초청된 외부인사들도 미리 도착해 있다가 각자 위치에 서서 행사가 시작되길 기다린다. 외부인사들의 위치는 경호실 행정처장이 하얀 백묵으로 표시했다. 동그라미 안에다 ‘아무개 자리’라고 초청자의 이름을 써놓아 그 위에 서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이윽고 차 실장이 등장하면 ‘경호실 찬가’의 팡파르가 수경사 군악대에 의해 울려퍼진다. 경호실 찬가는 가사없는 ‘스타마치’ 형태로 당시 수경사 초대 군악대장을 맡았던 이병호 중령에 의해 작곡됐다. 이 노래가 끝나면 △임석상관에 대한 경례 △국기에 대한 경례 △강하식 △사열 및 분열 △경호원 선서 및 경호원 노래 제창 등으로 이어졌다. 경호원 노래 역시 차 실장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작곡가 박춘석, 김승욱 등 몇 명이 청와대로 불려가 차 실장으로부터 주문을 받았으며 나중에 김승욱씨가 작곡한 것이 채택됐다. 이 노래는 누가 작사했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백두산 한라산 정기 만난 곳 반만년 역사의 터전이어라’로 시작된다.

행사가 끝나면 차 실장은 참석 인사들을 경회루 팔각정으로 불러 다괴회를 열었다. 이 때 주고받는 내용은 주로 “오늘 어떻소?”라고 차 실장이 말을 건네면 참석자들은 “실장님, 경호실이 대단합니다. 이런 정예부대가 각하를 보위하고 있으니 참으로 든든합니다.”라고 답변하는 식이었다. 다음은 당시 참석했던 한 인사가 말하는 분위기 중 한 부분이다.

“차 실장은 원래 대학교수들과 함께 하기를 매우 좋아했다. 하루는 행사가 끝난 뒤 경호실 식당에서 칵테일 파티를 열었다. 이 날은 이례적으로 PP(박 대통령을 지칭)가 참석했다. PP는 칵테일 몇잔을 마신 후 교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광경을 사진 찍어 공개하면 당신들은 모두 어용교수라고 할테지요’라고 했다. 그러자 참석자들은 파안대소했고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당시 어느 누구도 직언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김문 작가  gamsam10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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