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인랑>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제작비 190억 원, 강동원과 정우성이란 톱스타, 김지운이란 감독, 원작이 주는 무게감 등 무엇 하나 빠질 게 없었기에 관객들의 기대감을 증폭시켰던 영화 ‘인랑’이 손익분기점인 600만 명은커녕 100만 명에도 못 다다를 치욕을 안고 사실상 퇴장 수순을 밟고 있지만 논란은 진행 중이다.

개봉을 ‘5일’ 앞둔 ‘금요일’에 ‘이례적’으로 언론배급시사회를 열 때부터 분위기는 수상했다. 물론 일부 언론과 평단의 호평도 있었다. 본질을 짚어보면 간단하다. 관객은 바보가 아니다. 언론, 트레일러, 인터넷 등의 행간을 읽고, 감독과 배우의 면면을 세심하게 살피며, 소문도 고려한 뒤 선택한다.

대다수의 관객은 언론이나 평론가나 누리꾼이 낮은 평점을 던진다고 해서 무조건 외면하는 유아적 결정을 하지 않는다. 오래전엔 ‘극장 구경 간다’고 했고, 그 뒤엔 ‘누가 나오는데?’라고 선택 기준을 뒀지만 현재 그런 이는 극소수다. 극장은 일상적 공간이고, 영화는 취향적 대중문화 활동의 필수 매체다.

사람마다 개성이 있고,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영화 선택엔 다양한 기준이 있기 마련이지만 600만 명이란 흥행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는 재미와 관객을 이해시키고 동의를 얻는 플롯은 필수다. 배우와 감독의 이름값은 유리하긴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아이돌이 나온다고 흥행이 보장되는 게 아닌 게 증거.

▲ 영화 <인랑> 스틸 이미지

조연 배우 유상재는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고가 담긴 영화가 너무 쉽게 폄하되고 평가절하 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 안타깝고 개탄스럽다. 상영 시간을 줄이기 위해 편집 과정에서 많은 얘기들이 생략되다 보니 인물들의 감정적 흐름이 명확하게 보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이라고 피력했다.

그의 오류는 유독 ‘인랑’에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고가 들어갔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는 점이다. 그러나 모든 영화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고가 아낌없이 투입된다. 저마다 영화인이라는 자부심과 예술 혼을 불태운다. 상영 시간은 투자배급사와 극장주, 그리고 더 나아가 관객에 대한 배려다.

관객은 같은 돈을 내고 긴 영화를 본다고 가성비를 높게 보진 않는다. 지나치게 길면 지루하고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재미가 떨어진다. 투자배급사와 극장주는 적당한 러닝타임으로 충분한 수익을 올릴 수 있게끔 회차를 맞춰주는 걸 선호한다. 감독과 편집감독의 편집 능력은 원초적 약속에 가깝다.

김무열은 최근 무대인사에서 “거대 자본의 외국 영화가 한국 영화를 맹공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인랑’을 선택해주신 여러분의 높은 지적 수준에 존경을 표한다”고 발언해 또 논란을 야기했다. 물론 ‘웃자고 한 얘기에 죽자고 달려드는’ 모양새도 없지 않지만 다소 경솔했다는 지적에선 자유롭지 못하다.

▲ 영화 <인랑> 스틸 이미지

지금은 거리에서 삭발을 하며 ‘스크린 쿼터제 사수’를 외치는 시대가 아니다. 한국 영화를 지키는 건 맞지만 그건 영화인 및 관계 부처에서 할 일이지 관객에게 강요할 순 없다. 게다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본다고 지적 수준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만약 그런 의미였다면 그거야말로 수준이 의심된다.

일본 오키우라 히로유키 감독의 애니메이션 ‘인랑’은 일본보다 1년 늦은 2000년 12월 국내에서 개봉돼 192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마니아들 사이에서 걸작으로 칭송받음에도. 김 감독의 영화는 원작과 다른 결과를 냈다. 이를 위해 스토리는 멜로에 집중하는 모양새가 짙다. 원작의 철학과 엄발난다.

물론 원작을 따른다고 리메이크작이 훌륭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플롯이 뒤엉키고 철학이 증발하며 SF 액션과 멜로의 장르가 충돌하는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역시 프랑스 샤를 페로의 동화집 ‘옛날이야기’에 수록된 ‘빨간 모자’에서 모티프(소재)를 얻고 모티브(동기, 원인)를 차용했다.

원작의 배경은 패전 후 오랜 점령군 통치에서 해방돼 고도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한 급진적인 국가 재편이 이뤄지는 혼란의 시대를 맞은 일본. 실업자가 양산되는 등 혼돈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치경찰이 결성돼 정규화의 승격을 노리는 한편 테러단체 섹트가 무장봉기 중인 준 전시상황이다.

▲ 영화 <인랑> 스틸 이미지

이에 정부는 자치경찰을 견제하고 섹트를 제압하기 위해 수도경을 새로 조직하고 그 중심에 특기대를 세운다. 김 감독의 작품에서는 자치경찰이 공안부로 바뀌고 배경이 남과 북이 통일에 합의한 때로 바뀐다. 관객들이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설정은 섹트가 통일 반대 세력이라는 것이다.

물론 남측에 개인적 이유로 통일에 반대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과격하게 저항한다는 점과 더불어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조직적이고, 그런 무기를 보유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상상력 발휘가 도저히 안 된다는 게 큰 핸디캡이다. 설득력이 부족해도 아주 부족하다.

적지 않은 제작비는 액션을 위한 세트, 슈트, 무기 등에 주로 투입됐다. 김 감독의 전작들에서 입증됐듯 액션은 볼 만하다. 그러나 정작 인랑의 액션 때 슈트가 지나치게 무거운 관계로 활기가 사라진 채 그냥 밋밋하게 서서 총질을 해대는 게 결정적으로 어색하다. 여기에 빗발치는 총알에 끄떡없는 슈트라니!

일부는 배우로 영화를 선택하거나 거부하긴 하지만 될 영화가 배우 1명 때문에 망하진 않는다. 한효주 논란은 본질에서 비껴가긴 하지만 거듭될 경우 입장 표명이 발전적이다. 결국 논란은 원작과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190억 원이란 큰돈 때문이다. 19억 원이었어도 이랬을까?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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