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 사진=KTV 화면 캡처

“청와대 외곽 적 2개사단이 들어와도 끄덕없겠지”

계속되는 그의 증언이다.
“본격적인 국기강하식은 경호실의 위상을 한껏 올려놓은 1976년부터 시작됐다. 차 실장은 청와대의 경호위력 증강에 대해 거의 광신적일 만큼이었다. 어느 날 차 실장은 청와대 외곽경비상태를 점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정도면 적 2개 사단이 쳐들어와도 끄덕없겠지.’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청와대 외곽철책에 동물이 부딪친 ‘오접사건’이 벌어졌다. 그와 동시에 1급 비상벨이 울렸다. 30단에 대기해 있던 탱크가 순식간에 출동했는데 군기가 바짝 오른 탱크 운전병은 경복궁 출입구 옆에 주차시켜 놓았던 승용차를 그냥 깔아뭉개며 통과한 적도 있었다. 차 실장은 또 국기강하식에 참가하는 청와대병력과 장성급들의 복장을 직접 디자인했다. 독일의 게슈타포처럼 독일병정들의 옷을 매우 좋아했다. 허리의 밴드나 지휘도 등도 거기에서 아이디어를 따왔으며 배지나 휘장 하나하나까지 일일이 챙겼다. 차 실장이 창안해 제작된 경호실의 군인 복장은 군법규정에도 어긋난 것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예외조항을 삽입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차 실장이 얼마만큼 대통령 경호에 신경을 썼는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차 실장은 일련의 작업을 거친 뒤 어느 정도 자신이 붙자 외부인사들을 초청, 국기강하식 등 무력시위를 펼쳤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전성각 장군은 “내가 경호실 차장에 취임했을 때 국기강하식 행사가 이미 실시되고 있었고 박 대통령은 절대 참석하지 않았다. 오로지 차 실장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그런데 나중에 여론이 안좋게 되자 박 대통령의 지시로 외부인사를 부르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또 이러한 분열식은 차규헌 장군이 수경사령관직을 그만둘 무렵인 1978년 하반기부터 없어졌다고 덧붙였다.

창경원의 학집-청와대본관 하늘에 그물을 씌워라

차 실장이 청와대 경호에 광신적이라는 얘기를 뒷빋침할 흥미로운 일화를 하나 더 소개해본다. 서울대 법대를 나오고 육사9기로 졸업한 문홍구 장군이 1975년 전성각 장군보다 바로 앞서 청와대 경호실 차장으로 근무할 때였다. 그러니까 1975년 가을이다. 문 장군이 어쩌다 박 대통령과 함께 외부 행사장에 나갔을 때였다. 장소는 서울 근교 양수리유원지 부근으로 1공수여단(여단장 전두환 준장)의 ‘침투훈련’이었다. 공수부대는 유사시 적진 중심부 에 침투임무를 띠고 있어 이 날도 적의 특정지역을 설정, 가상의 침투시범을 보이는 것이었다. 훈련은 박 대통령 등 한미 고위장성들이 참석한 가운데 순서에 따라 착착 진행됐다. 그런데 훈련도중 뜻하지 않은 사고가 연이어 발생했다. 공중지원을 하던 헬기 2대가 서로 충돌하는가 하면 폭파시범을 보이던 병사가 폭약을 잘못 다뤄 그만 폭사하는 참변이 일어났다. 문 장군은 즉각 훈련을 중지하고 사고 뒷수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훈련은 계속됐다. 참관인들도 그 광경에 안타까워했지만 지휘관이 훈련지휘를 계속하고 있는 한 그냥 지켜볼 도리밖에 별 수 없었다.

결국 훈련은 몇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끝났고 문 장군은 박 대통령과 차지철 실장을 모시고 청와대로 돌아왔다. 그런데 차 실장이 문 장군한테 “할 얘기가 있으니 잠깐 보자.”며 자신의 집무실로 오라는 것이었다. 문 장군은 혹시 오늘 훈련사고에 대해 언급하려나 생각하면서 차 실장의 방으로 들어갔다. 차 실장은 문 장군을 소파에 앉으라고 권하더니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문 장군, 오늘 훈련을 보니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소. (낙하훈련을 의식한 듯)만약 북괴군들이 북풍이 불 때 낙하산을 타고 쳐들어온다면 어떻게 되겠소? 여기서 휴전선까지는 얼마 되지도 않고 저들이 야간에 바람을 이용해 낙하산부대를 투입시킨다면 말이오. 청와대 본관 옥상에 내리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소. 그러니 문 장군, 청와대 본관옥상을 전부 그물망으로 덮어 씌우는 계획을 한번 짜보시오.”

▲ 사진=KTV 화면 캡처

이른바 ‘창경원의 학집’이라고 명명된 계획이었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차 실장의 말이 끝나자 문 장군은 즉각 반대하고 나섰다.

“서울시민들이 시민들의 집은 그대로 놔두고 얼마나 상황이 급박했으면 저렇게 하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리고 청와대본관은 외국의 원수, 외교관 등의 출입이 빈번한 곳인데 잘못하다간 국제적 망신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문 장군의 반대주장이 당연했지만 차 실장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차 실장은 문 장군의 절대불가에도 불구하고 경호실의 다른 간부들을 불러 그같은 계획을 재차 지시했다. 그러나 이같은 계획은 곧 박 대통령의 귀에 들어갔고 급기야 차 실장은 호된 꾸지람을 듣게 됐다. 문 장군은 차 실장과의 근무시절을 회고하면서 “ 차 실장은 대통령 경호와 관련된 사항이라면 물불을 안가리는 스타일이었다.”고 말했다. ‘창경원의 학집’ 계획만 보더라도 당시 차 실장이 어떠한 인물이었는가를 짐직케 하는 대목이다.

문 장군이 청와대에 근무하게 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육군본부 운용감(소장)으로 있던 어느날 출근을 하자 노재현 육군참모총장이 문 장군을 부르더니 “지금 청와대 경호실장한테 가보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문 장군은 “갑자기 무슨 말씀이냐”고 묻자 노 총장은 “나도 정확히 경위를 모르지만 차지철 실장이 무조건 보내달라고 하더라.”고만 대답했다. 문 장군은 곧바로 청와대로 갔다. 차 실장이 경호실 3층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 실장은 문 장군을 보더니 대뜸 “문 장군, 내일부터 경호실에서 근무하게 됐소.”라고 하는 것이었다. 차 실장은 또 “각하께서 추천했소.”라고 했다.

대통령의 추천이라는 말에 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이 이튿날 문 장군은 차 실장한테 부임신고를 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전속부관을 불렀다. 부관은 방에 들어서면서 90도 각도로 몸을 굽혔다. 문 장군이 알기로는 일제시대때 ‘천황’에게나 하는 ‘최경례’(最敬禮) 인사태도였다. 차 실장은 부관의 경례 모습을 보면서 “문 장군, 우리 경호실 사람들은 저렇게 경례를 해야 합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문 장군은 내심 불쾌했지만 다들 그렇게 한다니 규정을 지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박 대통령한테 부임신고를 하러 갔는데 박 대통령은 “내가 보안사령관한테 인사카드 10장을 가져오라고 한 뒤 그 중 하나를 직접 뽑았다.”면서 6.25 직후 전방에서 지형정찰 중 문 장군과 우연히 만났던 옛날의 추억을 떠올렸다. 그게 생각이 나서 문 장군을 청와대에 근무토록 했다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이 군생활의 어려울 때 만났던 사람들을 챙기는 인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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