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나를 차버린 스파이>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007’ 시리즈로 대표되는 스파이 액션 영화는 그동안 다양한 변주를 통해 거듭났다. 누아르 스타일을 더한 ‘미션 임파서블’과 ‘본’ 시리즈도 성공했지만 로완 앳킨슨 주연의 ‘쟈니 잉글리쉬’ 같은 포복절도 시리즈도 호응을 얻어왔다. ‘나를 차버린 스파이’(수잔나 포겔 감독)는 그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

마트 계산대에서 일하는 오드리(밀라 쿠니스)는 30살 생일날 남자친구 드류(저스틴 서룩스)로부터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로 이별을 통보받고 기분이 완전히 잡친다. 그녀의 유일한 친구인 무명배우 모건(케이트 맥키넌)은 함께 드류의 물건들을 불태운 뒤 이를 드류에게 문자 메시지로 보낸다.

다음날 오드리 앞에 영국 첩보기관 MI6 요원 세바스찬(샘 휴건)이 나타난다. 그는 사실 드류는 CIA 요원이며 합동으로 어떤 임무를 수행 중이라고 밝힌 뒤 소재지가 파악되면 알려달라고 요청한다. 집에 돌아온 오드리는 모건이 전날 알게 된 우크라이나 남자친구 빅터를 데리고 와있는 걸 보고 놀란다.

그런데 갑자기 드류가 나타나더니 이내 밖으로부터 무차별 총격이 쏟아진다. 드류가 이 상황을 잘 수습하지만 돌변한 빅터가 드류에게 총을 쏜다. 두 여자는 믿을 수 없는 능력을 발휘해 빅터를 제압한다. 드류는 죽어가며 자신의 트로피를 비엔나의 카페 쉴레로 가서 베른에게 전하라고 부탁한다.

▲ 영화 <나를 차버린 스파이> 스틸 이미지

드류는 이 트로피에 지구촌의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달려있다는 무서운 말을 남겼다. 고급스러운 카페에서 진수성찬을 먹은 모건은 급한 용무로 화장실로 가고, 오드리 앞에 세바스찬이 나타나 테이블 밑으로 권총을 겨누며 트로피를 빨리 달라고 성화를 한다. 드류는 아무도 믿지 말라고 당부했었는데.

먼저 겉모습만 보고 CIA 현장 요원들의 임무 수행을 돕는 어수룩하고 굼뜬 내근 요원(멜리사 맥카시)이 얼떨결에 현장에서 활약하게 되는 ‘스파이’(2015)의 코미디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감독이 여자라고 액션보다 코미디가 더 강할 것이라고 선입견을 갖는 것도 절대 금물. 정통 액션의 향연이다.

숨 막히는 카 체이싱은 기본이고 각종 무기들의 난무와 맨몸 액션 역시 웬만한 정상급 첩보물에 비교해 절대 뒤지지 않는다. 특히 냉혹한 킬러 나디아 역의 이바나 사크노의 아크로바틱과 서커스 등을 활용한 액션은 눈부시다. 여기에 백치미 가득한 그녀의 매력적인 외모와 표정연기는 보너스.

인트로부터 전반에 걸쳐 울려 퍼지는 배경음악 스콜피언스의 ‘Wind of change’는 꽤 진중한 메시지를 던진다. 1989년 소비에트 연방(소련) 당시 모스크바를 방문한 리드 보컬리스트 클라우스 마이네가 ‘변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그곳의 분위기에 영감을 얻어 쓴 곡이다.

▲ 영화 <나를 차버린 스파이> 스틸 이미지

당시는 사회주의 해체로 인한 탈냉전의 시기였기에 베를린 장벽 붕괴의 상징이 됐지만 여기서는 여성의 해방 및 변혁을 말한다. 영화는 전편에 걸쳐 내내 여성의 독립과 자립을 웅변한다. 마치 가사 속의 발랄라이카가 러시아 전통 현악기이자 소련의 중요한 무기의 별명이란 중의적 의미를 지닌 것처럼.

오드리와 모건은 극과 극의 캐릭터다. 모건은 뭐든 과하지만 오드리는 뭐든 부족하다. 특히 지금까지 끝까지 해본 게 하나도 없다. 법대와 예술대를 다녔지만 모두 중퇴. “남들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는 모건은 일종의 ‘공주병’인 크렘볼트 신드롬을 가졌지만 오드리는 남자들 앞에서 항상 위축돼 있다.

그런 그녀들이 하루아침에 자연스레 비공식 스파이가 되는 과정은 남성 중심의 고정관념을 깨는 혁명이다. 처음엔 겁을 내지만 부지불식간의 능력 발휘에서 내재돼있던 새 ‘존재’를 발견하고 목숨을 건 대결을 펼치면서 “살아있는 기분”을 느끼고, “과소평가”한 남자들에게 통쾌하게 한방을 먹인다.

그녀들의 숨겨진 액션 본능을 일깨워주는 건 택시 운전기사의 “공포는 허상일 뿐”이라는 한마디다. 그래서 이후 그녀들은 “가끔 고통 속에서 강렬한 희열”을 맛보게 된다. 심리학의 ‘공포 관리 이론’이 주장하는 공포에서 벗어나는 수단은 문화고, 방법은 그걸 통한 자존감의 정립이다.

▲ 영화 <나를 차버린 스파이> 스틸 이미지

오드리와 모건에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탐정 놀이’는 문화가 되고, 그렇게 자아 존중감이 우뚝 서게 됨으로써, 고통마저도 희열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자아를 정립할 수 있는 자아가 된 것이다. 여기서 남자들은 그와 대립하는 반정립으로 작용해 종합으로의 완성을 돕는다.

물론 코미디도 있다. 뒤에 악당이 추격해옴에도 오드리가 방향지시등을 켠다든가, 비엔나에서 모차르트와 히틀러의 모습을 반씩 지닌 액세서리를 등장시키는 것 따위다. 하버드를 소재로 ‘스펙’에 대한 비판도 하고, 언론의 ‘더러운 여론조작’도 꼬집는다. 유명인을 앞세운 유머는 일부에겐 좀 생소할 듯.

모건의 성이 프리먼이라는 점부터 미남 배우 패트릭 뎀시의 실명을 거론하는가 하면 실제 CIA에 근무했던 컴퓨터 전문가 에드워드 스노든을 끌어들인 것 등이 포복절도하게 만든다. 특히 ‘태양의 서커스’를 도입함으로써 재미를 더해준다. 슬쩍 그르나슈 누아르 품종의 와인을 홍보하는 건 애교.

화장실이 매우 중요한 장소고, 그곳에서의 행위 역시 영화의 흐름상 결정적인 시퀀스가 된다는 화장실 유머가 조금 적나라하지만 불편하진 않다. 결국 액션과 코미디를 버무려 재미를 완성하는 지점은 미스터리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니 아무도 믿지 말 것. 116분. 15살 이상. 8월 22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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