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 사진=mbc 방송 화면 캡처

장준하 의원과 뜻하지 않은 유럽여행

문 장군은 차지철씨와 인연을 쌓기 전에 김재규씨와도 인연을 맺었다. 차와 김은 3공화국내내 숙명의 라이벌 관계로 지냈다.

문 장군이 육본 인사참모부 인사관리처장으로 근무할 당시 1968년 3월 어느 날 김재규 보안사령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내일 아침 자신의 집에서 조찬을 하자는 것이었다. 갑작스런 전화에 문 장군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 문 장군은 성북동 김 사령관의 자택을 방문했다. 문 장군은 반갑게 맞이하는 김 사령관과 식탁에 마주 앉았다. 당시 김재규 하면 박 대통령과 육사동기에다 권부의 실력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따라서 문 장군은 무슨 얘기를 하려나 하고 잠자코 기다렸다. 몇 숟가락 들던 김 사령관이 “문 장군, 나와 함께 일을 해주지 않겠소?” 하는 것이었다. 문 장군은 너무 뜻밖이라 그를 빤히 쳐다봤다. 그랬더니 김 사령관은 “참모총장에게도 얘기를 다했으니 보안사 참모장으로 근무해주시오.”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며칠 뒤부터 보안사 참모장으로 일을 하게 됐다. 문 장군의 눈에 비친 보안사령관실은 예상대로 매우 복잡하고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 내노라 하는 정재계 인물과 군장성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매일 아침보안사 군의관이 와 있었다. 그는 내방객이 있거나 말거나 주사기에다 간 특효약을 넣어서 김재규 사령관에게 주사하곤 나가버렸다.(원래 김 사령관은 간질환을 앓고 있어서 10.26 궁정동만찬에서도 ‘간이 안좋다’는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문 장군의 취향과는 영 딴 판이었다. 보안사에 잘못 왔구나 할 정도였다.

▲ 사진=mbc 방송 화면 캡처

그러던 어느 날 김 사령관이 문 장군을 부르더니 “문 장군, 장준하 의원을 모시고 유럽쪽으로 바람 좀 쐬고 와야겠소.” 하는 것이었다. 문 장군은 장준하 의원이 어떤 인물이며 그에 대한 감시와 탄압도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터였다. 당시 장준하 의원은 ‘사상계’라는 잡지를 통해 정부와 여당을 향해 비판하는 목소리를 높여와 청와대와 여당측에서는 매우 껄끄럽게 생각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정부에서도 장준하 의원에 대해나름대로 회유정책을 펴고 있었다. 또한 정보기관으로서도 어떻게 해서든 장준하 의원의 포문을 잠재우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곧 대통령에게 신임을 받는 일이기도 했다. 이러한 장준하 의원을 회유한다는 차원에서 김 사령관이 ‘총대’를 메고 그의 참모장인 문 장군을 장준하 의원의 여행파트너로 삼았던 것이다.

1968년 10월 문 장군은 장준하 의원과 함께 약 한달간 유럽여행을 떠났고 이역만리에서 깊은 친분을 맺게 됐다. 당시 국회 국방위원으로 김봉환(金鳳煥)씨가 함께 동행했다. 이들은 유럽으로 가는 도중 베트남의 한국군 부대를 방문했는데 그 때 윤필용(尹必鏞)장군이 술자리를 마련, 코가 비뚫어지도록 술을 마셨다.

문 장군은 “장준하 의원은 진정한 애국자였고 여행을 계기로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온 지 몇 년 후 등산길에서 변을 당했다는 신문보도를 접하고 아까운 인재를 잃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또 “당시 김재규 보안사령관도 장준하 의원을 여당으로 끌어들여 화합의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많은 애를 썼다.”면서 이는 박 대통령의 불편한 심기를 덜어보려는 충성심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그가 청와대 근무시절 치지철 경호실장과의 추억담을 하나 소개했다. 1975년 봄, 하루는 차 실장이 문 장군 집무실로 들어오더니 “책상 위치를 바꾸는 것이 어떻겠소?”라고 말했다. 문 장군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그의 설명은 대통령이 앉아 있는 본관 방향으로 등을 향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문 장군은 처음에 어이없다고 생각했으나 곧 이해를 했다.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에서 그같은 제의를 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이렇듯 문 장군은 3공화국 당시 차지철과 김재규 관계를 떠올리며 둘의 충성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 사진=mbc 방송 화면 캡처

군부의 차지철 실장 배척운동

라이벌 김재규씨와는 달리 차지철 경호실장은 대통령 이외에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었다. 경호실내에 여러 기구를 만들어 정계와 학계 인물들을 많이 집합시켰으나 누구 하나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대해 문 장군은 두 가지 예를 든다. 하나는 ‘대통령 경호위원’이라는 특별기구였다. 중앙정보부장, 국방부장관, 내무부장관,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그리고 각군 참모총장 등을 위원으로 임명하고 경호실장이 위원장이 되어 한 달에 1~2씩 회의를 주재했다. 회의 의제는 대통령에 대한 경호문제에 관련된 것들이어서 아무도 회의참석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다른 하나는 ‘경호실무위원회’라는 것이었다. 각 부처 차관과 각군 참모차장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경호실 차장이 회의를 주재했다.

이런 문제가 누적되어 1978년말과 1979년초 군내부에서는 차지철 경호실장 배척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루는 보안사령관 진종채(陳鍾埰 육사8기)장군이 박 대통령에게 경호실의 비위사실을 보고한 적이 있었다. 내용인 즉 “청와대 경호실내에 공산당 세력의 프락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실로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박 대통령은 노발대발 하며 엄중히 조사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진 장군은 이렇다 할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고 이런 일이 있은 후 경호실장은 진 장군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결국 진 장군은 얼마 뒤 2군으로 전속됐다.

하루는 당시 노재현 국방장관이 문 장군을 부르더니 “차지철 실장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오?”라고 물었다. 문 장관은 노 장관의 의중을 모를 리가 없었다. 대통령이 어떻게 해서 차실장을 그런 자리에 오래 놔두느냐는 뜻이었다. 이는 군수뇌부에서 전횡이나 다름없는 차 실장의 월권행위에 대해 무척 못마땅하게 여겼음을 시사해주는 것을 의미했다. 김계원 비서실장이나 김재규 중정부장도 이와 같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신군부의 득세도 이러한 일련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문 장군은 술회한다.

아무튼 무소불위의 경호실 행사는 1.21사건 이후에 시작됐으며 10.26사건때 차 실장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사진=mbc 방송 화면 캡처

“무장공비 21명이 서울 한복판에 침투했다”

그러니까 1.21사건이 발생한 지 3년 뒤인 1971년 8월23일 서울시민들은 ‘실미도’ 군특수범들의 총기난동 사건으로 공포와 불안에 떨어야 했다. 대간첩대책본부는 이 날 오후 3시10분 긴급 발표문을 통해 “무장공비 21명이 서울에 침투했다.”고 짤막하게 사건내용을 설명했다. 이어 수도권 일원에는 비상령이 내려지고 김포공항이 폐쇄되는 등 긴장감이 돌았다. 그러나 이로부터 3시간이 흐른 저녁 6시40분 정래혁 국방부장관은 “이번 사건은 공군관리하에 둔 군특수범 24명이 평소 외딴 섬에 수용된 데 불만을 품어 관리원을 사살하고 집단으로 탈출하여 난동을 벌인 것”이라고 사건경위를 정정 발표했다. 이후로 이 사건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공식언급은 없었다.

이처럼 1970년대 초 국민들을 경악케 했던 ‘실미도 사건’은 아직까지도 누가 계획을 세웠고 도대체 이들의 정체가 무엇이며 왜 난동을 부렸는지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언론과 주변인들을 통해 어느 정도 실체가 밝혀졌을 뿐이다.

이 사건이 생기자 공군참모총장이 바뀐다. 김두만(金斗萬)에 이어 옥만호(玉滿鎬)장군이 임명됐던 것이다. 옥 장군은 이에 대해 “실미도에 특수부대가 있었다는 것을 사전에 전혀 몰랐다. 나중에 사건이 터지고 총장이 되고 난 뒤에야 사고내용을 보고받았을 뿐”이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다음은 사건개요.

△인천 앞바다에 있는 실미도에서 공군관리하에 있던 특수부대 요원 24명이 무기창고를 부숴 무장하고 경비병 12명을 사살한 후 탈출, 인천 송도유원지에 상륙했다. △이들은 23일 오후 민간버스를 탈취하여 인천 남쪽 조개고개 앞에서 군경 예비군과 교전을 벌이면서 부평과 소사를 거쳐 청와대를 목표로 서울로 난입하다가 영등포 유한양행 앞에서 경찰과 충돌을 벌이며 노량진까지 진출하던 중 폭사했다. △당황한 정부는 처음에는 무장공비라고 발표했으나 나중에는 군특수범으로 정정, 사건을 은폐시키다가 9월16일 비로소 김종필 국무총리가 난동자들을 군특수부대 요원이라고 발표했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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