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 사진=KTV 화면 캡처

군조직 수술 ‘특검단’을 설치하라

박 대통령은 1.21사건의 충격으로 대대적인 군조직 개편에도 손을 댔다. 이듬해 5월 군조직 수술을 위해 ‘특명검열단’(특검단)의 설치를 지시했다. 각군에 대해 대통령의 특명사항을 점검하고 수시로 보고하는 대통령의 임시 직속기구였다. 그러나 이는 대외적인 명분에 불과했다. 특검단의 본래 목적은 군조직을 개편하는 것이었다. 특검단은 과거 일본이 방대한 군조직을 검열하기 위해 일왕(日王)의 이름으로 원로급 장성들이 중심이 되어 각군에 출동검열하는 이른바 ‘특명검열사’를 두었던 사례에서 착안된 것이었다.

원래 박 대통령은 1.21사건이 일어나자 임충식(任忠植)국방부장관한테 특검단 신설을 지시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계속 미루어오다 1969년 5월 박 대통령이 재차 지시하는 바람에 가속화됐다. 이번에는 김계원 육군참모총장이 총대를 멨다.

며칠 뒤 김 총장은 곧 특검단 구성초안을 만들고 결재를 받기 위해 청와대에 들어갔다. 박 대통령이 보고서를 쭉 훑어봤다. 육,해,공군과 해병대 등 각군에서 장성 1명씩 차출해 그 밑에 유능한 장교 몇 명씩 두는 식이었다. 또 국방관리 제도개선을 위해 서울대, 연세대, 서강대, 고려대 등에서 저명한 학자들을 차출하는 것이 골자였다. 구성안을 천천히 들여다보던 박 대통령은 ‘특검단장 후보’ 부분에 이르자 시선을 멈췄다. 김 총장은 특검단장에 노재현(盧載鉉)군단장을 올려놨던 것이다. 박 대통령은 특유의 결재습관인 밑줄을 쫙 그으며 “이봐요, 김 총장. 노재현 장군은 안돼.”라고 말했다. 당황한 김 총장은 “그럼 누가 했으면 좋을까요?”라고 물었다. 박 대통령은 노재현 장군의 이름을 싸인펜으로 X표를 하면서 그 옆에 김희덕이라고 적었다. 박 대통령은 “내가 보기엔 김희덕 장군이 적임자인 것 같소. 즉시 연락해서 특검단을 맡아 고생 좀 해달라고 하시오.”라고 말했다.

결국 김희덕 장군은 육사교장 재임 1년9개월만인 1969년 5월3일 특검단장에 발탁됐다. 김 장군은 보임신고때 박 대통령한테 몇가지 특명을 받았다.

“특검단의 취지와 목적은 군조직을 개편하는 것이오. 그러나 이것은 극비요. 또 해병대가 많이 비대해진 것 같소. 축소시키는 문제도 비밀리에 검토해 보시오.”
그 후 해병대사령부는 해체됐다. 이를 놓고 한때 말이 많았지만 김 장군과 박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엿볼 수 있듯이 해병대사령부 해체는 박 대통령의 이같은 의지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 김 장군은 “당시 대화 중에 박 대통령은 해병 1개사단에 장성이 9명이나 있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고 밝혔다. 김 장군은 “박 대통령의 해병대사령부 해체지침을 받고는 최종 보고서를 작성할 때 해병대와 공수부대를 통합, ‘전략군사령부’의 신설계획을 세웠다.”면서 자신이 전역후인 1973년 10월 전략군사령부 계획은 무산되고 해병대사령부만 해체됐다고 말했다. 다음은 김 장군의 회고.

▲ 사진=KTV 화면 캡처

“당시 특검단 활동은 박 대통령의 최대 관심사였다. 우리의 활동영역은 국내는 물론 일본, 대만, 미국, 캐나다, 이스라엘, 스위스 등 20여개국의 군부대를 돌아다니며 그 나라의 군조직과 운용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내가 본 나라 중에서 가장 군조직이 잘 된 나라는 스위스였고 그 다음은 이스라엘이었다. 캐나다는 이스라엘의 형태를 많이 참고해서 그런지 매우 잘 돼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검단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군조직 개편작업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다만 각군별로 있던 보안사령부, 정보사령부 등을 한 곳에 통폐합한, 즉 ‘국군보안사령부’로 개편해 국군참모총장 직속으로 두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각군 본부에 소속돼 있던 보안사, 정보사 등이 어떻게 해서 현재의 국방부장관 직속으로 되어 있는지 새롭게 밝혀준 내용이기 도 하다. 당시 군개편 작업은 극비리에 완성됐으나 보안이 새어나가는 바람에 정래혁 국방장관 등 군고위층에서 많은 방해공작으로 인해 성사를 보지 못했다.

“1971년 초 박 대통령은 국방부 연두순시때 통합계획을 빨리 보고 싶다고 했다. 밤잠을 설쳐가며 보고서를 완성한 것은 그해 6월25일이었다. 보고서 분량은 단행본으로 8권정도였다. 계획대로 하면 지휘통솔이 원할해지고 병력이 10만명정도 줄어들어 연간 300억원 정도 절감되는 경제적 효과가 있었다. 그런데 박 대통령에게 브리핑할 시기가 다가오자 각군 실력자들부터 압력이 들어왔다. 아마 자리를 잃거나 또 권한의 폭이 줄어든다는 이유에서 그랬던 것 같았다. 심지어는 암살위협까지 받아 늘 권총을 차고 다닐 정도였다. 국방부장관 역시 청와대 보고채널을 차단시키는 등 노골적으로 방해했다. 사면초가였다. 때마침 김종필 총리가 나를 찾았다. 계획서 내용이 궁금해서였는데 김 총리는 보고서를 쭉 훑어보더니 흡족해 하며 병력을 10만이 아닌 15만으로 감축하면 어떻겠느냐고 적극성을 띄었다. 그러면서 4일 뒤 주말 오후에 박 대통령과 셋이서 비밀리에 만나자고 했다.

그러나 이틀 뒤 약속확인을 위해 김 총리한테 전화를 걸었더니 도무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참다 못한 나는 총리실로 달려갔다. 다짜고짜 왜 전화를 피하느냐고 따졌다. 김 총리는 당황해 하며 언제 그런 약속을 했느냐고 발뺌했다. 나는 이에 대비해 일기장을 들고 갔다. 일기장을 내보이며 ‘엊그제 총리가 한 말을 여기에 다 기록해 두었다’면서 이제와서 오리발을 내미느냐고 했다. 김 총리는 ‘선배님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김 총리도 여러 곳에서 압력을 받은 듯했다. 김 총리는 또 비밀회동 계획이 새어나갔다는 말도 했다. 뭔가 결심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전역원을 제출하게 됐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