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플래니테리엄>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벨기에가 자랑하는 다르덴 형제 감독이 제작한 영화 ‘플래니테리엄’(레베카 즐로토브스키 감독)은 유럽식 예술영화치곤 비교적 쉽다. 매 시퀀스를 적당하게 받쳐주는 뛰어난 음향효과까지 분위기를 고조시켜줘 등장인물들의 감정과의 에움길마저도 편하며 전체적인 흐름과 동반하는 데 용이하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의 1930년대. 미국의 20대 로라(나탈리 포트만)와 10대 케이트(릴리-로즈 멜로디 뎁) 영매 자매가 교령회 공연을 위해 프랑스 파리에 온다. 이를 본 유명 영화제작자 앙드레가 집으로 불러 개인적인 교령회를 갖고 직접 영을 경험한 뒤 감동해 이를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앙드레는 케이트에게 더 관심이 크지만 감독 세르비에는 로라가 재질이 훨씬 우수하다며 그녀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고 그렇게 촬영이 시작된다. 앙드레의 제안에 자매는 아예 그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앙드레는 교령회를 통해 본 사람이 형이라고 하지만 사실 누구인지 불분명하다.

그 정체를 밝히고 싶은 앙드레는 케이트를 데리고 국제심령현상연구소를 찾아 첨단 기기의 도움으로 심령의 세계를 넘나든다. 점점 가까워지는 앙드레와 케이트를 주시하던 로라는 어느 날 두 사람이 지나칠 정도로 다정하게 장난을 치는 것을 보고 케이트를 추궁하지만 ‘질투’란 메아리뿐.

▲ 영화 <플래니테리엄> 스틸 이미지

프랑스 영화가 자꾸 할리우드에 뒤처지자 앙드레는 이사회로부터 사임 압박을 받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변화할 대안으로 로라의 영화를 찍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영화 제작 배경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크게 나돌면서 사임을 통보받는다. 하지만 그는 맞소송으로 정면돌파를 시도하는데.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많으니 집중력이 필요하다. 왕년의 인기 배우 에바와 로라가 1943년 파리 한 극장에서 재회하는 수미상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바의 “난 네가 책략가인 줄 알았어. 앙드레와 권력에 빠진”이라는 대사가 핵심이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상실된 인간성과 인권이 주제다.

정치인은 음흉하고 교묘한 책략가다. 제국주의는 그런 책략가가 운영해 패망한 뒤 사회주의의 시행착오를 거쳐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와 결탁해 정착하는 듯했지만 자본가가 책략가를 경영함으로써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가난은 인권의 사멸이고 인격의 멸절이다.

책략가의 무기는 프로파간다고 외모는 포퓰리즘이다. 주인공이 영매인 건 그걸 은유한다. 사람들은 자매의 강신술을 의심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직접 ‘보면’ 일종의 아포페니아 혹은 파레이돌리아 심리에 의해 믿게 된다. 앙드레가 교령회 촬영 필름에서 희뿌연 그림자를 발견하고 영이라 주장하는 식이다.

▲ 영화 <플래니테리엄> 스틸 이미지

상류층 여자들이 파티에서 시시콜콜 떠들면서 “그래도 무솔리니가 좋아”라고 말하는 건 독재자를 가능케 하는 건 변상증과 동조현상이 낳은 불륜인 집단환각이란 직설법이자 천박한 이기주의란 메타포다.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중간에 폴란드에서 태어난 유대인 앙드레는 그들의 표리부동을 은유한다.

방이 몇 개인지 모를 정도의 대저택에서 호사를 누리던 앙드레는 프랑스 영화의 재기를 기치로 내걸지만 정작 개인적인 목적에만 몰두한다. 그러고도 이사회에서 “영화 이외에 한 푼도 안 쓰고 투명하게 경영했다”고 뻔뻔하게 나서는 모습은 도대체 일관성이라곤 전혀 없었던 무솔리니 같다.

앙드레를 사이에 두고 케이트와 묘한 긴장관계를 조성하는 로라 역시 앙드레처럼 뼛속까지 자본주의(미국)를 심은 유대인(포트만은 예루살렘 출신)이다. 그녀는 케이트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학교에도 안 보내는 등 감금에 가깝게 키운다. 로케이션 장소에서 전화를 걸며 “첫 통화”라고 말하는 게 증거.

그녀는 자신에게 없는 영매 능력을 지닌 케이트를 통해 돈을 벌면서도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야”라는 전형적인 ‘가스등 효과’를 보인다. 그리곤 케이트에게서 시작된 공동의존(역동)이 앙드레에게로 확장된다. 앙드레의 꿈속에서 유대인 전통 모자 키파를 쓴 그와 결혼하는 게 그걸 암시한다.

▲ 영화 <플래니테리엄> 스틸 이미지

케이트는 새장에 갇힌 새다. 감독은 대놓고 앙드레가 케이트에게 새장을 선물하는 시퀀스를 넣었다. 그런데 새장 속의 새가 2마리다. 로라가 그렇게 자본주의의 새장 속에 스스로 갇힌다는 의미. ‘둥지 속 새끼 새를 잡아 새장 속에서 키우면 나중엔 문을 열어도 안 도망간다’는 앙드레의 시도 그런 뜻.

가장 중요한 현상이 책략과 권력이라면 물상은 새다. 성대한 파티를 열던 날 밤 쏟아지는 눈이 눈보다는 새의 깃털에 가깝게 그려진 것도 그걸 염두에 둔 것. “낮에 별을 못 보는 이유는 별은 불을 꺼야 보이니까. 마치 꿈을 보려면 눈을 감아야 하는 것처럼”이란 니체 같은 화법도 다양하다.

“우리가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가 우리를 쓴다”는 다분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같다. “교령회에 나타나는 영은 우리에게 중요했던 사람이 아니라 우릴 중요하게 여겼지만 우리가 신경도 안 썼던 사람. 난 내 재능을 통해 영과 한 약속 때문에 죽을 것”과 전화교환원은 소통의 상실을 뜻한다.

“지금은 전쟁 전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전쟁 전엔 전쟁 전인 줄 몰랐다”와 “보고하기 싫어서 결혼 안 했다”는 현상학적 존재론, 혹은 실존주의다. 존재자는 전쟁이란 현상이 현존재가 되기 전엔 그 존재를 모르기 마련. 결혼은 존재자의 무덤인가, 존재의 소멸일까? 108분. 15살 이상. 8월 29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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