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업그레이드>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쏘우’ 시리즈의 기획, 원안, 극본, 주연을 맡았던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감독 리 워넬의 ‘업그레이드’는 어디선가 본 듯한 설정이지만 그 여운의 결이 다르고, 충격의 진폭이 이채롭다는 점에서 변별성을 갖춘다. 단순한 액션 영화로서도 재미있고, 의미와 철학이 풍부하다는 걸 깨닫는다면 더 재미있다.

일상의 모든 시스템이 스마트화되고, 자율 운전 자동차가 생활화된 미래. 아내 애샤(멜라니 벨레조)는 인공 팔과 다리 등을 만드는 첨단 회사 코볼트에 다니지만 남편 그레이(로건 마샬 그린)는 부자들을 위해 아날로그 슈퍼카 정비 및 수리를 하며 자신도 그런 수동운전 차량을 각별하게 아낀다.

그레이는 베셀 컴퓨터사 오너인 갑부 애런(해리슨 길벗슨)의 파이어 버드를 수리한 뒤 직접 집에 운송해주던 날 애샤에게 돌아올 때 탈 차가 없다며 그녀의 차를 함께 가져가자고 제안한다. 배달이 끝나고 돌아오는데 갑자기 자동주행 차가 집 반대편 그레이의 고향 뉴 크라운으로 질주한다.

차는 노숙자들의 집단 숙소 앞에서 장애물과 추돌한다. 중상을 입은 그들 앞에 괴한들이 나타나 총을 쏜다. 3개월 뒤. 사고 때 애샤는 죽었고, 그레이는 사지마비 상태로 목숨만 건졌다. 삶의 의지를 잃은 그에게 애런이 오랫동안 모든 걸 쏟아부어 완성한 신개념 컴퓨터 칩 스템을 보여준다.

▲ 영화 <업그레이드> 스틸 이미지

이걸 몸 안에 이식하면 예전처럼 건강해짐은 물론 초능력으로 업그레이드된다는 것. 그러나 아직 국가적으로 승인받지 못한 기술이므로 이게 알려질 경우 강력한 제재를 받게 되니 당분간 몸이 나아진 걸 드러내지 말라는 비밀유지 계약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고 그레이는 자필서명을 한다.

그레이는 사건 담당 형사 코르테즈(베티 가브리엘)를 추궁하지만 범인은 오리무중이다. 그래서 스템의 도움을 받아 용의자 중 한 명의 신원을 알아내 그의 집에 잠입한다. 그러나 때마침 들어온 용의자와 몸싸움이 벌어지는데 스템은 놀라운 능력으로 범인을 제압한 뒤 잔인하게 죽인다.

이 사건을 접수한 코르테즈는 CCTV를 통해 사건 현장 인근에 그레이가 나타났음을 알고 매우 놀란다. 그레이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면서도 아내의 복수심 때문에 범인들의 우두머리인 피스크의 집에 잠입한다. 그러나 팔에 총까지 장착된 피스크의 압도적인 초능력에 그레이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는데.

일단 슈퍼 히어로 장르로선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한 재미를 준다. 돌연변이의 ‘엑스맨’, 과학과 신화와 SF를 결합한 ‘어벤져스’ 등과는 또 다른, 사이보그 개념을 변형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겉보기엔 단순한 무협지적인 구성 자체도 킬링타임용으로 무난하지만 의외로 심오해서 놀랍다.

▲ 영화 <업그레이드> 스틸 이미지

감독이 ‘매트릭스 2-리로디드’에 단역으로 출연했다는 점과 호러 전문 작가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영화는 다분히 ‘매트릭스’부터 ‘A.I.’ ‘터미네이터’ 등의 철학을 잇는다. 특히 호러 영화가 아닌지 착각이 들 만큼 장중한 스케일의 프로그레시브 록이 전편에 깔려 몰입도를 높여준다.

그레이와 애샤가 애런을 처음 만날 때 장면이 중요하다. 애런은 구름을 만지고 있다. 그는 그레이 등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준 창조주라는 얘기다. 그러나 정작 그는 조류독감이 두려워 외출 때 마스크에 집착할 정도로 폐쇄적인 인물이다. 창조주가 되려는 인간의 정작 나약한 본질을 암시한다.

애샤와 애런은 최첨단 컴퓨터 회사에서 내일을 만드는 사람들이지만 그레이는 ‘손으로 하는 걸’ 좋아하는 아날로그적 인물이다. 그가 애샤와 자율 운행 차량에 탑승했을 때 핸들에 손을 댔다가 차의 AI에게 야단맞는 걸 보면 어떤 인물인지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는 과학의 발전에 실업자를 걱정한다.

이 영화가 주시하는 철학은 본질주의와 속성다발론이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 테세우스는 조국 아테네를 겁박하던 미노스 왕이 다스리던 크레타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아테네를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아테네는 그걸 기념해 그가 타고 돌아온 배로 1년에 1번씩 항해를 하는 축제를 벌였다.

▲ 영화 <업그레이드> 스틸 이미지

그런데 항해를 다녀온 뒤엔 부분적으로 새 목재로 수리를 하다 보니 세월이 흐른 후 배의 모든 부위가 새것으로 교체됐다. 그래서 누군가 ‘모든 부위가 새 재료로 교체된 이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일까?’라고 물었고 아무도 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답하면 본질주의고 ‘아니다’면 속성다발론이다.

사지마비 환자인 그레이는 분명히 그레이다. 그런데 스템에 의해 슈퍼맨이 된 그레이는 아직도 그레이일까, 시뮬라크르일까? 시뮬라크르라면 애런의 시뮬라시옹을 거친 이 복제물은 그레이의 진화일까, 시뮬라크르의 확장일까? 영화는 교묘하게 ‘매트릭스’의 보드리야르의 철학을 한발 앞서간다.

바로 ‘창조’된 존재자와 ‘생산’된 존재자의 존재를 묻는 존재론이다. 로봇은 분명 생산물이지만 사람들의 인식은 점점 창조물로 바뀌고 있다. ‘러브 돌’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A.I.’의 인공지능 소년 데이빗은 자신의 실존을 새로 정립하고, 완벽한 인간이 되고자 파랑새를 찾아 먼 여행을 떠난다.

이 영화는 위버멘시(초인) 개념을 통해 모순의 모사의 철학을 펼친다. 사람들이 가상현실 게임에 빠지는 건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라고. 애런의 지하 대저택 입구에 서있는 거대한 바위 2개는 ‘창조’와 ‘생산’을 비롯한 모든 이분법을 상징한다. 100분. 15살 이상. 9월 6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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