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군견 100마리를 보내라 [김문 작가 칼럼]

김문 작가l승인2018.09.07l수정2018.09.07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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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미국의 군견 100마리를 보내라

이렇듯 3공화국때에는 우리가 알 수 있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어처구니 없거나 흥미있는 사건들도 많았다. 그 중 하나를 더 소개해본다. 김윤호 장군이 주미공사 시절에 본국으로부터 비밀훈령 하나를 받았다. ‘군견100마리를 보내라’는 의한한 것이었다. 당시 국내에는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자주 발생하여 군당국은 효과적인 대간첩작전을 위한 묘책 찾기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군견부대’를 만들자는 것이었고 결국 군지휘부를 통해 주미 한국대사관에 긴급훈령을 하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3개월내에 보내라는 것이었다. 군견에 관한 지식이 전무하다시피한 김 장군으로서는 여간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며칠 동안 고민하던 그는 미군 관계자에게 도움을 요청해 ‘군견학교’의 위치를 알게 됐다. 장소는 메릴랜드의 앤두루공군기지 근처였다. 이곳은 미군내 군견만을 전문적으로 교육시키는 이른바 ‘군견종합학교’였다.

며칠 뒤 그는 군견종합학교를 찾았으나 간단히 처리될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돈을 주고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김 장군은 모든 것이 순조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군견학교의 관계자에 의하면 “여기서 교육되는 군견들은 매매용이 아니며 더욱이 40마리밖에 없으니 한 마리도 팔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공항활주로에서 탈영한 군견을 잡아라

난감한 김 장군은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판단하고는 “이것은 한국의 안보와 직결된 것이다. 돈은 얼마든지 줄테니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그러자 군견학교 관계자는 “개를 구해 오면 교육을 시켜주는 것까지는 하겠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김 장군은 지역 신문에 ‘군견모집 광고’를 냈는데 다행히 군입대를 하겠다는 개들이 줄을 이었다. 그는 군견 조련사와 함께 1차 신체검사에 들어갔다. 통과한 개는 모두 200여 마리로 셰퍼드가 주종을 이루었다. 2차 정밀검사에서는 X-레이를 통한 건강진단과 함께 유사시 어느 정도 빨리 달릴 수 있는지에 대한 근육검사도 아울러 실시했다. 결국 군견후보로 최종 60마리가 선발되어 두 달 동안 엄격한 훈련을 거친 끝에 제1기로 한국군에 입대하는 영예를 안게 됐다.

이처럼 어려운 과정을 통과한 60마리의 군견은 김 장군과 함께 노스웨스트항공기에 올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탈영견’이 한 마리가 생겼다. 항공기 화물칸에 옮겨싣는 작업이 막 끝날 무렵 한 마리가 뛰쳐나왔던 것이다. 김 장군은 할 수 없이 공항 활주로를 뛰어다니며 탈영견을 잡으러 쫓아야 했다. 김 장군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개를 쫓아 공항 활주로를 뛰어다녔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터져나온다”면서 “33년 군생활에 개장사도 다 해본 사람”이라면서 웃었다. 어쨌든 당시 김 장군의 노력으로 우리나라 군견도입이 최초로 이루어진 셈이다.

▲ 사진=KTV 화면 캡처

‘워싱턴 포스트’지에 실린 박 대통령 광고사건

1970년 6월 어느 날 김계원 중앙정보부장이 김윤호 장군에게 잠깐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물론 남산의 부장실에서였다. 1년만에 재회한 둘은 반갑게 악수를 나눈 뒤 한참동안 베트남전과 국내사정에 관한 얘기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김 부장이 “김 장군, 청와대에서 한번 근무해보겠소?”하고 불쑥 제안했다. 김 부장은 이어 “각하께서 지시한 일이오. 해외정보에 밝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셨소. 아무리 봐도 김 장군만한 적임자고 없는 같소.”라고 말했다. 김 부장은 아울러 미국관계에 정통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 박 대통령의 생각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김 장군은 이 제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청와대 의전실, 대외직명은 ‘섭외담당비서관’이었다. 이 직책은 원래 없어서 대외적으로 비밀에 붙였다. 당시 청와대로 보고되는 해외정보채널은 중정, 외무부, 문공부, 총리실 등이었으나 박 대통령은 이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특히 박 대통령은 미국과 관련된 정확한 정보를 원했으며 김 장군의 직무는 각 정보채널을 통해 올라오는 해외정보를 역추적 확인하는 ‘해외정보담당관’이었다.

김 장군(2013년 작고)은 생전에 당시의 흥미있는 사실을 하나 털어놓았다. 1971년 초 어느 날이었다. 무심코 간밤에 배달된 ‘워싱턴 포스트’지를 읽던 김 장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광고면에 매우 낯익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김 장군은 혹시 잘못 봤나 하고 눈을 비벼가며 천천히 훑어봤다. 틀림없는 박 대통령의 얼굴이었다. 광고면 전면 7단 크기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한국의 박 대통령은 국가재건에 앞장 선 대통령으로서...’라는 광고문구가 빨간 글씨로 장황에게 나열돼 있었다. 아니 이게 웬 광고란 말인가. 김 장군은 반나절 내내 고민하다가 박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박 대통령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김 장군은 신문을 펼쳐보이면서 “각하, 이런 일은 아프리카 국가나 하는 일입니다.”고 말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김 장군, 누구 아이디어인지 철저히 조사해서 더 이상 이런 일을 못하도록 하시오.”라고 하면서 화를 버럭 냈다. 김 장군은 외부에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파문이 커질 가능성이 있으므로 은밀히 조사를 벌였다. 우선 외무부 관계자(당시 최규하 장관)를 불렀다. 그러나 아무 연관이 없었다. 그 다음에는 문공부관계자를 불렀다. 진상이 파악됐다.

박 대통령 PR광고 게재의 배경은 이러했다. 1970년 말 ‘워싱턴 포스트’지에는 느닷없이 ‘한국의 정일권 총리와 미모의 정인숙 사건’이라는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당시 국내에는 정인숙사건(1970년)의 파장이 계속되고 있었다. 어떤 사건이었을까.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김문 작가  gamsam10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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