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죄 많은 소녀>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나홍진 감독의 ‘곡성’ 연출부 출신 김의석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쓴 장편 데뷔작 ‘죄 많은 소녀’는 최소한 문제작 반열에 오를 듯하다. 유물론과 관념론, 경험론과 합리론, 선과 악, 사랑과 증오 등 사람들이 살면서 모호하게 느낄 법한 경계 혹은 다름에 대한 심오한 성찰 또는 경멸을 담고 있다.

여고생 경민(전소니)이 실종되자 담당 형사(유재명)는 사건 당일 경민과 함께 있었던 영희(전여빈)와 한솔(고원희)을 만나지만 진술이 달라 난감해 한다. 시내 강의 다리 위에서 경민의 가방과 신발이 발견된다. 경찰은 자살로 결론짓고 구조대와 함께 강바닥을 훑지만 시신은 발견되지 않는다.

경민이 다니던 학원에 영희가 들른 걸 본 경민 엄마 해숙(서영화)이 안내 데스크에게 조금 전 여학생이 뭐라고 했냐고 묻자 경민을 찾았다고 답한다. 분노한 해숙은 영희를 붙잡아 세운 뒤 따귀를 때린다. 그러자 영희는 “경민은 죽은 게 아니라 나를 엿 먹이려 하는 것”이라며 억울한 감정을 터뜨린다.

교내에서 학생들의 영희를 바라보는 눈길은 경악과 멸시다. 몇몇 아이들이 영희를 골탕 먹이자며 한솔을 앞세워 그녀의 집을 찾아간다. 아이들이 킬킬거리며 문밖에 있는 영희의 신발을 훼손하고, 집안에서 숨죽이고 있던 영희는 참다못해 문을 열고 나오지만 대여섯 명에게 일방적으로 폭행당한다.

▲ 영화 <죄 많은 소녀> 스틸 이미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영희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집안이 엉망인 데 대해 “처신 똑바로 하고 다녀”라는 야단만 친다. 교장에게 한 여학생의 ‘담임선생에게 성추행 당했다’는 투서가 전달되고, 수색대는 결국 강에서 싸늘하게 식은 경민의 시신을 발견하는데.

영화는 온통 심리적 양가성 혹은 철학적 이항대립으로 점철된다. 경민의 실종을 자살로 잠정 결론 내린 형사는 자살에 대한 미필적 고의 혹은 방관의 ‘심증’만 있는 영희를 마치 타살 혐의자처럼 신문한다. 게다가 “책상 위의 팔 내리고 아저씨 똑바로 쳐다봐”라며 고압적인 자세까지 보인다.

담임도 “이 새끼, 어른한테 버르장머리 없이”, “어린놈이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라는 폭언을 쏟아붓는가 하면 손찌검마저 서슴지 않는다. 나이가 벼슬인 양 무조건 연하를 깔보는 ‘꼰대’의 전형이다. 보건교사는 생리통을 호소하며 보건실을 찾은 영희를 의심해 그녀로 하여금 증명까지 하게 만든다.

경민의 자살로 학생들 수업 분위기가 산만하자 수학교사는 “교직 20년 동안 자살 4번 봤지만 6개월 지나면 다 잊혀. 그럴 시간에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우고 수학 문제 하나 더 푸는 게 낫다"라고 한다. 해숙은 역지사지라곤 전혀 없이 또 다른 부모의 자식인 영희를 윽박지르고 폭행한다.

▲ 영화 <죄 많은 소녀> 스틸 이미지

그렇다고 아이들이 일방적인 피해자고 약자일까? 경민의 자살의 이유는 모르지만 입버릇처럼 경민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저주를 퍼부으며 다닌 다솜이란 동급생이 존재한다. 다수의 학생들은 영희를 ‘왕따’하고, 자살 유도자로 몰고 갔으며, 그들의 왠지 모를 폭력성의 앞잡이로 한솔을 ‘사용’했다.

담임이 성추행을 주장한 여학생을 앉혀놓고 “진짜 그랬으면 억울하지나 않지”라고 호통을 치자 여학생이 치마를 걷어 올리며 “지금이라도 만지시면”이라고 말하는 신은 영화 중 흔치 않은 코미디지만 웃음 뒤의 섬뜩함은 꽤 크다. 유사한 사례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어른보다 타락한 청소년이 없진 않다.

정신이 혼미한 채 갈지자로 운전하는 해숙의 옆 차선에 붙은 차의 남자가 “운전 똑바로 안 해?”라며 욕설을 퍼붓는 장면은 이 사회의 남성의 여성에 대한 폭력성, 무차별적 무시, 상대적 우월감 등을 대변한다.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교장 옆에 담임이 의전 하듯 서있는 신 역시 웃기지만 현실이다.

‘꼰대’들은 형이상학적이거나 인식론적인 사고와는 담을 쌓고, 관념론이나 합리론을 무시한 채 철저하게 현실주의적 물질만능주의에 치중한다. “공부도 잘하고, 부모도 좋은 직장 다니는데 왜 자살해?”라는 교장의 질문 하나에서 기성세대의 천박한 가치관이 그대로 드러난다.

▲ 영화 <죄 많은 소녀> 스틸 이미지

겉으론 영희를 돕는 듯하지만 사실은 고문하는 해숙의 잔인한 극단의 양면성은 표리부동한 기성세대의 낯 뜨거운 민낯이다. 그녀가 발화하는 건 복수고, 그 언표는 생각과 행위의 다름이다. 등장인물의 심리를 표현하는 잦은 핸드헬드와 이를 뒷받침하는 비장하고 암울한 음향효과는 전율을 증폭시켜준다.

경민의 생사 여부에서 자살의 이유로 옮겨가는 과정의 미스터리는 굉장한 긴장감을 준다. 수수께끼가 풀리는 순간의 경이로움을 위해 긴장을 풀지 말 것. 여고가 무대지만 스케일이 결코 좁게 느껴지지 않는 건 시나리오와 배우들이 가진 진정성 있는 정성 때문. 전여빈의 놀라운 연기력은 연출력에 못지않다.

인트로와 아웃트로가 한 시퀀스인 수미상관이 매우 중요하다. 전염되는 분노의 뫼비우스의 띠! 영화가 양극단을 동시에 아우른다는 점은 무척 잔인한데 그 극단적 잔인함의 원인이 바로 이 사회란 존재고, 각 조직이란 시스템이며, 또한 시스템 안의 다수의 존재자들이란 점에선 처절하게 슬프다.

어른과 아이의 부조리 모두 지적한 무책임한 양비론이란 불완전한 명증성일 수도 있지만 미스터리 스릴러란 장르적 장치를 감안한다면 ‘순’한국인들이 한국어로 만든 ‘서치’ 수준이다. 한적한 밤길을 혼자 걷는 영희는 위험한 현실 속 소외된 존재들의 뒤안길이다, 15살 이상. 9월 13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