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협상>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가 교묘하게 드라마와의 차별화를 꾀하는 지점은 풍자와 해학, 혹은 그걸 비극적으로 묘사하는 사회적 시비에 있다. 그걸로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는 점에서 ‘협상’(이종석 감독)은 2명의 주연배우의 캐릭터를 극대화함으로써 시나리오의 힘을 증폭시키는 영리한 제작 시스템을 발휘한다.

서울 양재동 한 단독주택에서 동남아시아인 2명이 젊은 한국인 남녀를 잡고 인질극을 벌인다. 서울지방경찰청 위기협상팀장 정준구(이문식)가 투입되지만 영어가 서툴러 애를 먹는다. 조사관 안혁수(김상호)는 휴가 중인 미국 유학파 협상가 하채윤(손예진)에게 급히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준구가 특수기동대에게 무리한 진압을 지시하는 바람에 인질도, 강도도 모두 죽는다. 채윤은 “더 이상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걸 못 보겠다”며 사표를 던지지만 준구는 급한 해외출장을 간다며 일단 휴가를 다녀오라고 사표를 보류한다. 며칠 후 채윤과 혁수는 청장의 급한 호출을 받는다.

그들이 도착한 모처의 ‘상황실’은 첨단 시설 아래 많은 군경이 바삐 움직이는 중. 한국 출신 영국 국적의 민태구(현빈)는 한국의 무기를 빼돌려 동남아와 중동 등지에 파는 마피아 두목인데 그가 대한일보 이상목 기자와 준구를 태국 방콕에서 납치한 뒤 말라카 해협 나카섬에 억류해놓고 있었다.

▲ 영화 <협상> 스틸 이미지

태구가 협상가로 직접 채윤을 지목했고, 채윤은 자신의 직속상관의 목숨을 담보로 한 지금껏 겪어보지 못했던 엄청난 심리전을 펼친다. 고아로 자란 태구는 성장한 뒤 세계 각지를 도는 용병으로 고용돼 엄청난 전과를 올린 전투의 전문가고 두뇌 또한 뛰어나 채윤은 진땀을 흘린다.

태구의 첫 요구는 대한일보 윤 사장을 컴퓨터 카메라 앞에 앉히는 것. 골프를 즐기던 윤 사장을 급하게 데려오지만 채윤은 준구의 죽음을 보는 충격을 겪는다. 그런데 이상목은 기자가 아니었다. 청와대까지 나선 이 협상에서 채윤은 그 이면에 뭔가 수상한 내용이 있음을 감지하는데.

액션은 없지만 블록버스터 액션물에 뒤지지 않는 긴장감을 주는 이유는 시나리오가 가진 힘 때문이다. 살짝 ‘내부자들’의 냄새가 풍기긴 하지만 현빈이 극악무도한 악역을 왜 맡았는지 후반부에 가면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촘촘한 얼개다. 상구(‘내부자들’)는 양아치로 자랐지만 태구는 고아였을 뿐.

영화의 큰 틀은 채윤과 태구의 시점에서 각각 바라보는 심리전이다. 전반부는 채윤의 시점이고, 후반부는 태구의 시점이다. 눈치 빠르면 의도를 파악할 듯. 국제적 범죄자가 인질을 담보로 원하는 건 경제적 이득일 것이다. ‘인질상황’과 ‘비인질상황’이란 전문용어가 등장하는 배경이다. 과연 그럴까?

▲ 영화 <협상> 스틸 이미지

“채윤 씨, 몸 사이즈가 어떻게 돼요?”라고 능글능글하게 물으며 “소주 한잔하고 싶다”고 노골적으로 치근대는 태구의 속내는 좀체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협상가로 직접 채윤을 지목했다는 것. 그렇다면 그는 그녀의 성향부터 성격과 이데올로기까지 정체성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는 의미다.

그가 원하는 건 진실 혹은 진심이다. 정작 진정한 의도를 숨긴 채 채윤에게 진실을 강요하는 이유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한다는 아이러니. 영화 속 주인공들 중 가장 확실한 캐릭터지만 그래서 가장 무지한 인물은 채윤이다. 한 나라의 권력이라는 바위와 그에 덤비는 계란 같은 태구 사이의 새우다.

동요 ‘코끼리 아저씨’가 등장하는 대목이 굉장히 중요하다. 태구가 붙잡은 인질 중 소녀에게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묻자 ‘코끼리’라고 답한다. 이 노래를 부르라는 태구의 요구에 국정원 요원이 ‘코끼리 아저씨는 코가 손이래’를 부르자 소녀는 울면서도 고개를 가로젓고 입을 연다.

소녀는 ‘화창한 봄날에 코끼리 아저씨가 가랑잎 타고서 태평양 건너갈 적에 고래 아가씨 코끼리 아저씨 보고 첫눈에 반해’라며 정광태의 ‘코끼리 아저씨’를 부른다. 같은 제목에 전혀 다른 노래. ‘오성의 직접 대상은 관념이고, 관념은 모든 경험에서 유래한다’는 존 로크의 인간오성론이다.

▲ 영화 <협상> 스틸 이미지

혹은 이성론과 경험론을 종합하려 한 칸트적 인식론이다. 고위 관료와 재벌의 정경유착은 군주제 때나 공화제 때나 치유되지 않는 불치병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국가의 안보와 평화를 위한다고 침을 튀기지만 결국은 제 배불리는 게 목적이다. 체제는 유지될지 모르지만 국민이 피해를 입는다.

코끼리로 떠올릴 수 있는 동요가 아이와 때 묻은 어른에게서 확연하게 갈린다는 건 권력(혹은 국가)과 국민이 향하는 종착역이 엇갈린다는 의미다. 권력은 힘들여 인질을 구하려 하기보단 그냥 태구와 함께 희생시킴으로써 국가의 위기 상황을 해결하려 한다. 과연 그게 옳은 것일까?

이는 소수를 희생시킴으로써 다수를 구할지 말지 고민하는 ‘트롤리 딜레마’ 상황과 다르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걸 더 이상 못 보겠다’며 괴로워하는 채윤에게 “네 덕에 사는 사람도 있어”라고 달래는 준구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누구나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차선도 최선의 선택일 수 있다는.

그래서 채윤은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고 엄발나는 태구에게 “제가 포기 안 할 기회를 주세요. 자꾸 그러면 제가 태구 씨를 상대할 공간이 없어져요. 가슴이 닫힌다고요”라고 애원한다. 손예진의 절정의 열연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시나리오에 입이 벌어진다. 114분. 15살 이상. 9월 19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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