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 사진=jtbc 화면 캡처

3공화국 최대 미스테리 정인숙 사건

정인숙 피살사건은 3공화국 당시의 의문사로 고급 요정 종업원인 정인숙씨가 교통사고를 가장한 사고에 의해 암살된 사건이다. 1970년 3월17일 밤 11시경,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근처 도로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를 위장한 총격 살인사건이었다. 피해자 정인숙(본명 정금지)은 총상으로 사망하였고 그의 차를 운전하던 넷째 오빠 정종욱은 넓적다리를 관통당하였으나 생존해 있었다. 정종욱은 택시 기사에게 도움을 청하여 구조되었다. 정인숙은 당시 출산한 아이의 아버지로 소문난 대한민국의 국무총리 정일권과 갈등관계에 있었고, 신민당은 이 사건의 배후로 정부 고위층의 개입 의혹을 제기했으나 유야무야 묻혀졌다. 좀더 설명하자면 17일 밤 합정동 절두산 부근의 강변3로에 멈춰 서 있는 검정색 코로나 승용차에서 권총에 넓적다리를 관통당해 신음하고 있는 한 사내와, 머리와 가슴에 총을 맞아 이미 숨진 한 젊은 여인이 발견되었다. 부상당한 사내는 정종욱(당시 34세), 숨진 여인은 정인숙(당시 25세)으로 두 사람은 남매 관계였다.

당시 정인숙에게는 3살 된 아들이 1명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정부의 한 유력인사가 지목되기도 했다. 고위 공무원의 딸로 태어나 대학을 중퇴하였으며 여러 명의 친오빠가 있었다. 그 뒤 정인숙은 당시 한일회담도 이루어진 선운각 등 최고급 요정에서 호스티스로 일했다. 나중에 정인숙의 집에서 발견된 소지품에선 정관계 고위층의 명함 26장이 쏟아져 나왔다. 그 명함에는 박정희, 정일권, 이후락, 김형욱 등 대다수 5.16 주체세력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경찰 수사는 지지부진해졌고 언론 보도가 수사를 대신하게 되었다. 언론은 정인숙에게 숨겨진 아들이 하나 있고, 그 아들은 당시 청와대 고위층의 자녀라는 소문과 정인숙이 당시 정관계 고위층 전용이라 할 수 있는 고급 요정 '선운각'을 드나들었다는 것 등을 밝혀냈다.

▲ 사진=jtbc 화면 캡처

1주일 후에 나온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르면, 범인은 오빠 정종욱이라고 했다. 정종욱은 정인숙의 운전기사 노릇을 하면서 정인숙의 문란한 행실을 지적했으나, 정인숙이 말을 듣지 않고 자신에게 심한 폭언을 가하자 가문의 명예를 위해 누이동생을 암살하고 강도를 당한 것처럼 위장하려 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은 물론 평소 거느리는 주변 사람들의 여자문제에도 관대한 편이었다. 심지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직원을 시켜 정적이었던 김대중, 김영삼 등의 사생활을 캐서 보고서로 제출하자 화를 내며 찢어버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사건 직후 “정일권 총리를 물러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주위의 건의에 “남자가 여자 만나는 것은 예사”라며 사건을 무마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신민당의 정치 공세는 계속되었다. 정일권은 박정희를 찾아가 무릎까지 꿇었다고 했고, 바로 해임을 시키면 세간의 루머만 커질 것을 우려한 박정희는 정일권을 불러 자진 사퇴를 권고한 뒤, 정종욱이 구속된 이후 잠잠해질 무렵 정일권을 해임하고 바로 미국으로 내보냈다. 정인숙 문제로 박정희에게 무릎을 꿇기까지 한 정일권은 하와이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당시 정치 주요인사 수십여 명의 이름과 연락처가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사회지도층의 부도덕성은 여론과 시민들의 질타의 대상이 되었다. 또 당시 세간에는 정인숙 문제로 육영수 여사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실여부를 추궁했고, 이것이 부부 싸움으로 이어졌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또한 박 대통령의 호출에 무릎을 꿇은 정일권은 정인숙과 사귀긴 했으나 죽이지는 않았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는 소문도 생겨났다.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청와대 미스테라고 말하겠어요…’

▲ 사진=jtbc 화면 캡처

항간에선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나훈아의 노래를 개사한 ‘박의 소생’이라는 번안 가요가 퍼질 만큼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당시 한 청와대 인사는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어디서인지 변조된 가사 전문을 입수, 박 전 대통령에게 따졌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박 전 대통령은 “내 아내한테까지 오해를 받고 재떨이까지 날아왔지만 참았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씨는 ‘피살된 정인숙이 박 전 대통령의 여자였다’는 시중의 소문을 박 전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가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났다고 한다. 이 때문에 나훈아의 노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은 금지곡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 사건의 의혹은 그 이후 계속됐고 제3공화국 당시 최대의 미스테리로 여전히 남아 있다.(위키백과)

당시 ‘워싱턴 포스트’지는 도쿄발로 관련 기사를 다뤘다. 그러자 보고를 받은 홍성철(洪性澈)정무비서관은 전직 상관(정일권 총리)의 일을 확대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충정에서 문공부 관계자를 불렀다. 홍 비서관은 어떻게 해서든 문제의 기사가 ‘워싱턴 포스트’지에 더 이상 게재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이런 생각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정일권-정인숙사건’을 앞으로 다루지 않는 조건하에서 박 대통령 PR광고를 게재토록 했다는 것이다. 김 장군은 며칠 후 이러한 진상을 박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으며 문공부 관계자에게 더 이상 광고를 게재하지 말 것도 아울러 지시했다.

김 장군은 “당시 이러한 일이 외부로 알려지면 우스갯감이 될까봐 모든 자료를 폐기시킨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밖에 김 장군은 청와대 해외정보담당관으로 있으면서 미국과 ‘10월 유신’을 둘러싼 신경전, 그리고 박동선(朴東宣)사건‘ 등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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